[어린이주일]
목수 요셉의 자녀교육
누가복음 2장 41~52절
서론
요즘 정치가에 “더불어민주당에는 ‘민주’가 없고 국민의 힘에는 ‘국민’이 없고 정의당에는 ‘정의’가 없다”고 합니다.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호두과자에 호두가 없으면 사기를 치는 것이잖아요? 이렇게 따진다면, 한국교회에 교회가 없다, 늘빛교회에 빛이 없다… 이건 심각합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는 심정이 그래요! 어린이주일인데 어린이가 없다! 무슨 뜻인가요?
-코로나로 인해 어린이들이 제대로 교회에 모이지 못하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성도들이 없는 빈 주일학교를 두고 어린이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연령이 ‘어린이자녀’가 있는 가정은 50%를 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와는 관계없는 어린이주일이다, 이리 생각하는 절반의 성도들에 설교하자니 그렇습니다.
-성도님들이 자녀교육에 대해 신앙교육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자포자기 상태이고 그저 하나님께 영혼구원의 처분만 바라는 심정이기에 어린이주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교육에 너무 기울어져 신앙교육을 할 여력이 없는 세태이기에…
오늘 어린이주일로 지키지만 참 공허합니다. 그래도 자녀의 신앙교육은 포기할 수 없는 1순위입니다. 바울은 동족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 했습니다. 자녀들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녀들이 죽어 지옥에 간다?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비유입니다. 부자가 오죽했으면, 세상에 살고 있는 자녀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제발 지옥은 오지 말라는 내 말을 전하게 해달라 부탁을 했겠습니까?
셋 레스는 “나의 자녀들이 지옥에 떨어지면 어찌할까? 하는 마음을 갖게끔 지옥에 대하여 충분히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에게는 내 돈의 한 푼도 내어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은 내 자녀가 어린이들이라면 어려서부터 부모가 말씀을 잘 심어주어야 합니다. 귀한 내 아이들 하늘나라에 보내는 것이 명문대학 보내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아닙니까?
자녀가 다 커버렸다면, 이제는 손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손자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믿어왔던 바가 있기에 쉽게 교회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은 이처럼 하루만이라도 내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생각하고 다짐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출생 때의 사건이 좀 나오고 30세까지 빈 여백을 둡니다. 어린 시절,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누가복음 2장에는 유일하게 예수의 유년시절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 교육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교육 방법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부부는 어떻게 아들 예수를 비롯해서 6명 이상의 자녀를 믿음으로 키워냈을까요?
요셉 부부는 절기를 통해서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41절,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더니”
42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관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관례를 따라 지키는 명절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로 3대 절기라 합니다. 원래 모세의 율법에는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했으나 랍비 힐렐이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키는 게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친도 동행한 것입니다. 자식들과 함께 동행 하고 지키는 3대 절기를 비롯한 여러 절기를 통해 요셉 부부는 종교교육을 했습니다.
맥추절(칠칠절 오순절). 밀의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에 보리를 드린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켰다 하여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해 첫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이후로 ‘성령강림절’로 지켰습니다.
유월절.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구원 절기입니다. 이어 1주간 동안 누룩 없는 떡을 먹으면서 무교절을 지킵니다.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초막절. 출애굽 후 40년 광야 생활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야외에서 장막을 치고 즐기던 축제로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은혜에 감사하는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 유월절에서 칠칠일, 즉 50일이 지나면 3월 6일(유대력) 칠칠절(맥추절)이 됩니다. 다시 석 달 정도 지나 7월에는 나팔절과 대속죄절을 포괄하는 수장절입니다.
이외에도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수복하고 정화시킨 날을 기념하는 수전절과 부림절은 하만에게서 유다인들이 구원 얻게 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은 12세, 13세 이상 자녀들과 의무적으로 이런 절기교육을 통해, 효(孝), 고난의 역사교육,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집단적으로 강화시켰습니다. 거대한 집단교육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강력한 정신세계의 비결을 밝히는 책을 저술한 현용수 박사는 유대인 자녀교육의 비결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는 ‘절기교육’에 있다 진단합니다.
한국 교회도 사실은 절기를 통한 부흥입니다. 어린 시절에 성탄절에 교회 가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새벽송 돌기, 성극, 선물교환… 부활절에 삶은 계란, 어린이주일에 선물… 추수감사절에 맛있는 떡… 발표회 행사… 부활절 칸타타 성탄 칸타타… 부활절 새벽기도회… 이런 절기들이 한국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있어도 소규모이고 형식적입니다. 절기가 회복이 되고 절기를 통한 집단교육시스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심이 아니라 전인교육이 될 것입니다.
요셉 부부는 말씀을 통해서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46절,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선생들 중에 앉으사…. 당시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는 전합니다. 대체로 랍비들은 안뜰의 동남부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했습니다. 당시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 샴마이, 가말리엘, 요나단, 시므온, 니고데모 등으로 그중 한 사람 정도는 소년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어린 예수가 당대 최고 석학들과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여자 나이 12세, 남자 나이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인식은 만 19세로서 유대인들보다 많이 늦습니다. 유대인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 율법은 성인식을 치루기 이전의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 지각이 생기고 율법의 의미를 이해한 후에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남자 13살, 여자 12살이 율법을 이해하고 준수할 수 있는 나이로 봅니다.
유대소년의 성인식은 13회 생일 후 가장 가까운 안식일에 행합니다. 회당에 가서 한 주간 읽어야 할 성경을 낭독합니다. 예배순서를 인도하거나 기도를 합니다. 짧게 소감을 말합니다. 이후 “나는 이제 남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키웠나 사람들에게 간증을 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율법의 아들’이 됩니다.
성인식 후에는 잔치를 여는데 5~6만 달러 축하금이 들어오는데. 대학졸업 하고 사회에 나가면 사용합니다. 이런 축하금을 바탕으로 월 스트리트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유대인이 됩니다.
유대 부모들은 성년식을 통해 자녀교육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습니다. 이후는 본인과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어릴 때 철저히 자녀교육을 했기에 13세가 되면 이미 종교가 큰 뿌리를 내려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교육으로 유대 정체성과 믿음의 대잇기에 성공했습니다.
성년식이 끝나면 율법의 아들이라는 자격이 생겨 언제든지 회당에 참석하며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회당은 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와 지역마다 세운 예배와 교육, 찬송과 기도를 위한 집회 장소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비교적 큰 마을마다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5세가 되면 회당 출입이 허락되고 성년이 되는 13세부터는 회당 출석이 율법생활의 일부분이 됩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먼저 개인 기도를 합니다. 다음에는 신명기 6:4-9, 11:13-21의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하는 쉐마를 고백하고 열여덟 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18기도문을 낭송합니다. 누구든 말하고 가르치기를 원하면, 회당 책임자에게 미리 요청해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2세, 율법의 아들입니다. 요셉 부부는 아들을 율법의 아들로 잘 가르쳤습니다.
46절,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절, 듣는 자가 다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개역성경에는 ‘기이히 여기더라’, 반복적인 놀라움,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입니다. 소년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하는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이런 게 없었습니다. 교회교육은 교회에, 지식교육은 학교에, 대학진학 교육은 학원에 맡겨버리고 부모들은 걱정하고 야단하고 감시 감독하느라 자녀들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토론의 장, 대화의 장이 없었기에 독립할 나이가 되면 가정과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 잘 다니던 아이들이 영혼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호라, 통재라~
요셉 부부는 성전을 통해서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유일한 곳이며 유대교 믿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발등상’을 상징합니다. 고대 유대교의 중심, 유대교 믿음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듯이 성전도 하나입니다. 다른 도시에는 일절 성전을 세우지 못하고 대신에 교육과 행정사무를 보는 회당을 세웁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 차례 의무적으로 성전을 참배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여호와 신앙교리의 수호에 있습니다.
-12지파, 부족으로 구성된 유대인들의 단결과 단합을 위해 있습니다.
-이는 거룩한 열정의 축제를 통해 영적으로 샤워를 합니다. 성전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스라엘 전역이 영적 분위기가 됩니다. 열기가 식어질 때 다시 성전으로 모입니다. 절기가 그렇게 계절 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에게는 성전은 그냥 예배당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고 영혼의 고향이요 오아시스입니다. 그래서 인격체로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전보다 우상을 더 좋아했고 신당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선지자들이 별 짓(?)을 해도 우상은 소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옮겨 70년 포로생활을 하면서 우상문제는 철저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상에 보였던 열정을 성전에 쏟아 붙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우상과 같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 열정과 자긍심만큼은 우상숭배에 버금 갈 정도입니다. 그랬던 우상이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이 성전의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 동상을 세워 성전을 더럽히자 B.C. 164년경 유다 마카비가 군사를 일으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정화하여 하나님께 봉헌하고 그 날을 기념하는 축제를 만듭니다. 이를 ‘봉헌절’ 혹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하누카’라고 합니다.
유대 종교력 9월(양력 11~12월) 25일부터 8일 간 지켰습니다(요 10:22). 수전절에는 가정에서는 가지가 여덟 개인 촛대에 하루에 한 등씩 불을 밝혀 8일째는 촛대의 불을 모두 밝혔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빛의 절기’라고 불렀습니다. 수전절에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 즉 ‘할렐’(Hallel, 시113~118편)을 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항상 자녀들과 성전 참배를 통해 성전을 사랑하게 만들고 성전의 힘을 공급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49절, ‘아버지의 집이라’ 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성전 신학입니다. 부모가 좋은 아버지이니 하나님도 좋은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육신의 부모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당 예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단지 대면예배이니, 비대면예배이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하던 모조품과 같은 예배들로 사람들이 예배당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예배당을 보지 못한지 1년이 넘습니다. 예배당 신학이 교회의 중심입니다. 예배당 발걸음이 뜸한 만큼 믿음은 마른 뼈처럼 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무덤덤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애통이나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전염병입니까? 예배당 예배회복을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
현용수 교수는 말합니다.
“성경공부만 잘 할 경우에는 제사장 나라는 만들 수 있지만, 그 나라를 지킬만한 독수리민족은 될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광야세월의 고난의 훈련을 통해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광야에서 유대인들은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통해 주변의 거대한 아랍국가들을 이기는 막강한 힘을 가진 ‘독수리민족’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까? 결과는 코로나 골리앗 앞에서 떨고 있는 사울과 군사들이 아닙니까? 우리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닙니까? 독수리교인들로 성장해야 하는데 참새교인들로 짹짹거리고 있습니다. 참새 떼로 무얼 할 겁니까?
다시 절기교육들이 회복되기를 기도합시다.
다시 말씀의 능력들이 회복되기를 기도합시다.
다시 예배당 예배가 회복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야 십자가의 정신이 회복되고 예수 보혈이 백신이 되어 영적 두려움이라는 코로나, 게으름이라는 코로나, ‘부득이하여’ 라는 코로나에서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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