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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욥기열전10] 욥의 고난은 영원한 숙제이다!(욥 42:10~17)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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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열전10]

욥의 고난은 영원한 숙제이다!

욥기 42장 10~17절

 

서론

오늘로 신수성득(神手聖得)욥 시리즈는 막을 내립니다.욥의 마지막은 레드카펫을 걷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레드카펫(red carpet)은 귀빈(貴賓),그 날의 주인공이 밟고 지나가도록 바닥에 까는 빨간 융단이잖습니까?영화제에서 몸매가 드러나도록 특별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배우들이 레드카펫을 걸어오는데 그 차림새만으로도 때로는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강남 스타일로 월드스타가 된 가수 싸이가 세계적인 음악 시상식 에서 레드카펫을 밟으며 이랴~ 이랴~ 말춤 포즈를 취해 인기를 얻었대요. 세계적 행사에 레드카펫을 밟았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스타입니다.

 

우리교회는 모두 스타입니다. 월드스타가 아니라 하늘나라, 해븐(heaven)스타입니다. 주일마다 레드카펫을 걷습니다. 레드카펫을 걸을 때마다 내 인생에서 레드카펫을 깔아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천국에 입성할 때 멋진 레드카펫을 깔아놓으실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그런데 저는 레드카펫을 걷지 못해요. 여기 깔린 게 6년 정도 되는데 걸어본 적이 많지 않아요. 지저분해질까봐~. 이거 청소하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여간하면 여기를 걷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도 비 오는 날 할 수만 있으면 레드카펫을 밟지 마세요! 그리고, 예식장에서 신랑신부 걷기 전에는 화이트카펫(?)을 밟지 마세요. 예의는 아닌 것 같아요!

 

어떻든,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고생한 욥이 오늘 레드카펫을 걷습니다.   10,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다 회복 된 거예요!

 

11. 형제들 신뢰를 다시 얻었어요. 친구들의 인정도 회복된 것은 물론입니다.

 

12. 재산적 손실도 회복됩니다. 양 만 사천 낙타 육천 소 천 겨리 암나귀 천 고난당하기 전에는 양이 7, 낙타가 3, 소가 오백, 암나귀가 오백 ()의 축복을 받습니다.

 

13. 아들 일곱 딸 셋을 얻었어요. 처음 자식 수와 같아요. 아들 일곱은 배수를 뜻할 수도 있다고 관주에 나오잖아요? 아들이 14명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다시 얻은 딸들은 14, 이름도 나오고 15, 온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16. ()가 끊길 뻔 했는데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四代)를 보았습니다.

 

17. 악창 종기도 완치되었어요.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호상이지요!

 

대단한 축복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여러분도 욥처럼 모든 면에서 회복되고 치료되고 축복의 생애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깔아주시는 레드카펫의 해피앤딩으로 끝나버리면 오해로 마무리됩니다.

축복의 원인은 고난이다

욥기 주제를 고난으로 오해하면 욥이 고난을 잘 감당했더니 대축복을 받았다! 말합니다. 욥기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그동안 욥을 갖고 장난질 친 웃기는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갖고 왜 장난질을 칩니까? 그럴 일도 없지만, 장난칠 대상이 따로 있지요! 욥은 동방에서 최고 부자, 최고 신앙인, 최고 인격자 이런 사람에게는 최고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게 인과응보이고 권선징악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루아침에 망하게 한다? 그것도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해서? 이런 하나님! 이해가 됩니까?

 

욥은 그동안 축복으로도 넉넉합니다. 양이 7, 낙타가 3, 소와 암나귀가 각각 오백 일곱 아들에 세 딸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일곱 아들에 딸 여섯! 욥보다는 3명 많지만 아들 셋을 먼저 보냈잖아요? 욥은 자식이 열 명 먼저 보낸 자식이 없습니다. 이만한 재산, 이만한 자식농사라면 더 이상 뭘 원하겠어요? 거기다 동방에서 최고 의인이라고 칭찬을 듣는 사람입니다. 기업가로도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최고의 축복 아니에요?

 

여기에 더 큰 축복을 얹어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셨다? 열 명 자식 죽이고 더 예쁜 미스 유니버스 딸 셋을 주려고 고난 주셨다? 이게 축복입니까? 이런 축복을 원하세요? 지금 자녀들 불러가고 더 좋은 자녀를 주겠다! 그런 제의에 아멘! 하겠습니까? 이건 아니에요

 

욥의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축복 준다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멀쩡한 욥을 갖고 실컷 고생시키고 친구끼리 우정을 망치면서 싸우게 하고 남편에게 죽으라! 고함치는 나쁜 부인을 만들어 버리고 그야말로 욥 갖고 장난질을 친 거예요. 그래요?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더니 아주 흥겨운 노래가 나와요! 노래 듣는 순간, 이거 히트 치겠다! 생각했는데 적중률 100%에요! 우리 김용림 권사님 버전으로 할게요! 우리사랑 변치말자고 그 약속 잊으셨나요 (짠짠) 날 갖고 장난 쳤나요 사랑이 그런건가요

장윤정의 짠짜라에요! 아이고, 저 은혜 받는 거 보세요! 이러니 그동안 딱딱한 내 설교가 은혜가 되겠어요? 쯧쯧쯧! (노래로) 잘 가요 안녕 내 사랑~ 진짜 가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설교 끝나고 집으로 잘 가라는 소리입니다.

 

욥 이야기를 하다 왜 장윤정까지 나와 버린 거예요? 욥기를 마감하면서 단순히 욥이 고난을 통해 더 큰 축복, 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해피앤딩으로만 결론을 내려버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 결론이라면 죽은 자식들 너무 억울해서 꿈속에 매일 나타납니다.

 

스바 사람들이 약탈한 양 7, 낙타 3, 소 오백, 암나귀 오백 회복되면 됩니다. 그러나 자식은 아닙니다. 다시 얻은 열 명 자식들 돌 잔치할 때 결혼시킬 때 그 아이들 자식 낳고 행복해 할 때 그때마다 죽은 아이들 생각하는 부모 마음이 어떻게 해피앤딩이 되겠어요?

 

욥기의 고난은 축복의 원인이 아니라 자수성의(自手成義)신수성의(自手成義), 자수성득(自手聖得)신수성득(神手聖得)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욥의 고난은 해피앤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내고 드러내는 정금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이 예언이라면 신약은 성취잖아요? 신약에서 최고의 고난을 당한 사람이 누군가, 찾으면 욥기 이해가 쉽습니다. 바울이에요.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옥에 갇히고, 유대인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평생 안질로 고생합니다. 누구는 간질병도 있었다고 해요. 결혼도 못했으니 자식도 없어요! 욥은 자식들도 있고 존경 받고 칭송을 들었잖아요? 바울에게는 이런 축복이 없어요. 명문가문, 좋은 학벌 다 버리고 예수 믿었다가 고생만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합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들이 모두 축복의 원인이 된다는 거예요. 선을 좋은 결과로 해석합니다. 정말 그래요? 예수님 믿었는데 결론이 선()으로만 나오던가요? 부도나고 망한 회사가 다시 선으로 돌아오던가요? 죽었던 사람 돌아오던가요? 인생의 비극 그 자체가 선()일 수 없습니다. 그건 아픔입니다. 아픔은 예수 믿어도 아픔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은 회복을 전제로 하는 현실축복이 아닙니다. 29절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합력하여 이루어진 선()은 그 아들의 형상, 예수님을 닮아내는 결론입니다. 바울은 자기 의()가 강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인간적 선함과 행위를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죽을 고비, 거절당하고 배신당하고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붙잡게 됩니다. 점점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예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성자(聖者)가 됩니다. 다양한 인생의 아픔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선()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이 인생의 해피앤딩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고 드러내듯이 예수님보다 4천 년 전의 인물 욥도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계시가운데서 자수성의가 아니라 신수성의, 자수성득이 아니라 신수성득의 원인이 되는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욥을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욥은 자기를 보였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사람들은 그동안 욥에게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인과응보의 하나님, 권선징악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중심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원인이고 하나님은 결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20%, 자기의 선함 정직함 경외의 종교심을 80% 보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욥의 형통을 보며 무엇을 생각합니까? , 잘 믿으면 축복을 받는구나! 하나님과의 믿음을 거래관계, 빅딜로 생각합니다. 욥은 그렇게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욥을 그렇게 이해해버리면 그 믿음이 아깝습니다.

 

욥은 세 친구와의 논쟁을 통해 자기교양의 바닥을 보게 되어 자수성의를 버리고 혹독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더욱 의지함으로 신수성득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 사업장이 무너졌는데 그 시간을 무얼 하겠어요? 자식이 없는데 그 널널한 시간을 무얼 하겠어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

 

그리고 알았습니다. 고난은 대속자 신앙을 갖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신수성의, 신수성득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장차 오실 구속자 욥은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며 기뻐합니다. 욥은 이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고통과 친구들, 아내의 저주 등이 만들어 낸 선물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이처럼 하나님을 닮아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이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고난의 결과는 축복이다?

오늘 10절 이하의 말씀에는 욥의 엄청난 축복이 나옵니다. 꼭 배가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욥이 고난을 잘 견디었더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 누구든지 고난을 견디면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축복이 온다? 현재 고생하지만 참고 있으면 다 회복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물질도 회복되고 건강도 회복되고 명예도 회복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축복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욥기의 결론은 그게 아닙니다. 욥기의 결론은 9절로 끝난 것입니다. 10절 이하의 축복이 없어도 욥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깁니다. 10절 이하의 축복이 오지 않고 어쩌면 재산이 회복될 수 없을 거예요. 병이 낫지 못하고 부부관계는 회복이 안 될 수 있어요. 자식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인생이 너무 아픕니다.

 

욥은 아픔 가운데 부활신앙을 갖습니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육체 안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재산이 회복, 병 고침, 자식들이 살아오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그리 아니해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부활신앙으로 자식들을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녀들 천국에서 돌봐주시다 다시 아버지 욥의 품에 안겨주실 하나님을 만나리라. 이게 정금 믿음입니다.

 

바울에게 선()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면 욥의 선은 물질에 관계없이 회복에 관계없이 일편단심 흔들리지 않는 정금믿음이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메시아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욥의 정직, 욥이 순전, 욥의 경건, 욥의 축복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볼 거예요. 지금까지는 부자 욥을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욥이 전해주는 메시아 신앙으로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욥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중심이 바뀌었어요!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KS마크의 정품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되는 것이 욥의 믿음과 소망이 된 것입니다. 욥에게 나타나는 축복은 그의 목표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만한 물질회복이 나타나지 않겠지만 욥의 믿음이 불순물의 믿음이냐 정금믿음이냐, 그걸 보여주는 믿음이었기에 그 믿음이 인정되니까 처음이 축복으로 돌아가면서 배가의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든 간증의 끝은 세상 축복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뭐가 잘 되었다! 축복의 결론, 성공의 축복을 했다! 이게 간증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게 아닙니다. 욥기의 중심은 여기 결론적인 물질축복, 세상축복에 있지 않습니다. 그거 없어도 욥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그의 소유들이 회복되지 못해도 욥은 일편단심의 믿음을 보였다! 그게 욥의 믿음입니다. 그걸 보여줍니다.

 

우리교회에 대령으로 예편하신 김집사님, 육사졸업생이 계급정년에 걸려 별을 따지 못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 간증들은 스타가 될 수 없는데 새벽기도회를 해서, 헌금을 열심히 드려서 여차저차한 이유로 스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공했다! 얼른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간증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이런 간증만 나오는 것입니까? 대령은 되지 못했지만 나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살았다! 병에서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는 살고 있다! 비록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 왜 이런 까닭없이 믿는 고백들은 훌륭한 간증이 되지 못합니까? 세상적인 성공자들만 간증이 되는 것은 번영신학이 주는 오물입니다. 

 

내 생애가 비록 슬픔으로 끝날지라도 나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변함없는 충성으로 살겠다! 변함없는 정금의 믿음을 보여준 것이 욥기입니다. 결론에서 또 한번 욥기가 번영신학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욥기 결론은 해피앤딩이 아닙니다. 고난을 견디었더니 큰 복을 받았대요! 욥기고난이 이처럼 해피앤딩으로만 본다면 욥기를 다시 읽고 욥을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우리 고난의 끝이 항상 해피앤딩으로 끝나기만 기대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거래믿음이고 순금이 아니라 불순물의 믿음입니다. KS마크의 정금신앙은 하박국 선지자가 대신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3:17~19)

 

이것이 욥의 정금믿음이고 욥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가운데 이런 믿음으로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고 비아브라함계통으로 선민만 아니라 비선민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수성득할 수 있다는 복음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욥에게서 비선민이방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았다면 한 여름의 설교는 나름대로 유익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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