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왕을 보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
서론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현재의 느낌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토록 긴 과거에 대한 평가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내려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문장은, 인간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미래학자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 지도자들은 다음세대가 위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에서 한국교회는 ‘교회주일학교 몰락→젊은세대 이탈→고령자만 존재’ 순서로 붕괴한다고 전망했습니다. 백석대 김남일 교수도 “2050년 이후에는 전국 대부분 교회에서 교회주일학교 아이들의 분포가 5~10% 미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장년의 60~70%는 55세 이상 은퇴자와 노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경고음(音)을 들을 때마다 어떤 이들은 “설마”하며 ‘무심’했고, 누구는 다음세대 폭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붕괴까지는 족히 30년은 걸리니 대책을 세우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목소리도 컸습니다. 하지만 그건 코로나19 이전에나 해당하는 말입니다. 코로나19는 주일학교를 하루아침에 주저앉혔습니다. 30년간 서서히 무너지면 대책을 세워갈 텐데 이건 미래학자를 포함한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예측불허의 재앙입니다.
대면공동체인 교회는 코로나19로 가장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장년 성도들이야 나름대로 믿음을 유지하고 예배드리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지만 비대면예배라는 돌출 상황 앞에서 주일학교는 속수무책입니다. 특히 코로나19로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1년 넘게 연출되면서 주일학교 교사들의 무기력감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기에 오늘 교회교육주일을 맞이하지만 학생들이 없는 상태에서 교사주일을 맞습니다. 일반학교교사는 정신적 스승이요, 주일학교교사는 영적인 스승입니다. 정신적인 스승과 영적인 스승으로 균형을 이룰 때에 바른 인격체로 성장합니다.
“스승은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핼렌캘러가 세계적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셜리반이라는 전직 간호사 출신의 보모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셜리반을 만남으로 핼렌의 운명은 바뀌었고, 그래서 스승은 운명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피겨여왕’ 김연아는 자신을 이끈 3명의 은인으로 유종현 코치와 일본의 피겨 선수 아사다 마오, 그리고 어머니를 꼽았습니다. 가르쳐 준 사람, 라이벌, 가족을 꼽은 것입니다. 그중에서 유종현 코치를 으뜸으로 꼽습니다. 어린 시절, 고모의 낡은 스케이트를 신고 놀고 있는데 세계적인 선수로 클 수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피겨스케이트를 권유한 것입니다. 만약 유종현 코치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김연아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유종현 코치는 어린 김연아에게서 세계적인 피겨여왕을 본 것입니다. 교사는 결국 그 사람의 미래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1대 왕을 세운 사무엘은 사울 왕이 제멋대로 행동하자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왕 선정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절,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개역성경에는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으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원하는 왕을 찾았다"라고 번역합니다.
폐위되는 왕을 이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갈 왕을 점찍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막내입니다. 다윗은 자연을 좋아했고 음악과 시와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가장 왕의 자질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에게서 왕의 자질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띄었을까요?
영성 수업에서 왕을 보았다!
다윗은 사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목동입니다. 부모에게서도 관심과 기대를 갖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서열(장자) 중심의 사회였기에 막내인 그는 별로 부모들의 기대를 받지 못했습니다(11절).
사무엘도 6절, 외모적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도 정하지 않고 통과~ 통과를 시켰습니다. 사무엘은 아들의 서열 순에서 왕을 보고, 외모적인 모습에서 왕을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너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다가 내실을 다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짱, 얼짱… 등을 찾다가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너무 외적인 조건으로만 결혼 대상을 고르다가 결혼생활에 실패합니다.
그 사람의 왕이 될 모습, 위인이 될 자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마음 중심에 있고 비전에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왕의 재목감으로 보였을까요? 다윗이 양을 치며 찬양하며 수금을 타는 일로 영성(靈性)을 키워냅니다. 영성은 영음을 듣는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시편 150편중에 다윗의 저작이 절반에 이릅니다. 다윗은 어떤 시간보다 어떤 프로그램보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교를 나누는 일이 기뻐했습니다. 장차 사울에게 쫓겨 망명생활로 살아왔던 광야의 고난을 통해 그는 영성을 다지게 됩니다.
영성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명력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성화되어 가는 마음이 바로 영성입니다.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영력이 영성입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였고 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무너지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사울은 사람의 소리(여론, 민심)에 너무 귀를 기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놓칩니다. 그래서 여인들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여론에만 연연하면서 다윗에 너무 집착하다 잡음만 들었고 결국에는 귀신접속자에게 기울어져 패가망신하고 맙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 장수가 한 칼에 베어 왕위에 오르자고 했을 때 어찌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을 죽이려 하느냐? 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달콤한 사람의 소리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사울은 영성이 없었기에 골리앗과 사울 왕 자신과의 구도로 만들었고 다윗은 골리앗과 하나님과의 대진표를 짰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영성이 그런 구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영성이 있다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딛고 일어나는 데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다윗은 영성의 사람이었기에 밧세바와의 범죄 중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외모 중심, 실력 중심의 사회에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입니다.
“내가 왕을 보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언, 내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그때 아이들의 운명이 바뀝니다. 여기에 인생 성공이 있습니다.
훈련영성에서 왕을 보았다!
다윗은 자연 속에서 양을 먹이며 찬양하며 수금을 켭니다. 영성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멀리 떠나서 시간을 보내는, 현실과 괴리(乖離)된, 예술로서의 영성이 아닙니다.
다윗의 영성은 단순히 도(道)를 닦는 묵상을 하거나 베짱이처럼 노래나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달려가는 사람, 행동하는 영성인입니다. 시편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라고 합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도 달려갔고 사울을 피할 때도 달려갔고 적들과 싸울 때도 달려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도 열정적이었고 회개하는 데도 빠르며 사력(死力)을 다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도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행동을 보입니다. 양을 불러 모으는데도 빠릿빠릿했고 물가와 풀들을 찾는데도 다른 목동보다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어슬렁거리거나 시간을 축내거나 빈둥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성은 현실적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물맷돌 연습을 했습니다. 물맷돌을 목표물에 정확하게 맞추는 실력은 그가 얼마나 현실적인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맹수와의 싸움은 살기 아니면 죽기! 입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백발백중의 명중만이 자기가 살아남고 양들이 살아남습니다. 그가 골리앗과의 대전에서 물맷돌을 다섯 개를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한 번의 기회밖에는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단 한 발로 상대를 물리는 실력을 쌓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이런 노력의 성적이 골리앗을 한 방에 물리친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입니다. 1만 시간은 매일 3시간씩 훈련할 경우 약 10년, 하루 10시간씩 투자할 경우 3년이 걸립니다. 이 말은 글래드웰의 말은 아닙니다. 1993년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이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 연주자 간 실력 차이는 대부분 연주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수한 집단은 연습 시간이 1만 시간 이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을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Outliers’에서 에릭슨의 연구를 인용하며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윗이 바로 피나는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왕의 자질을 터득한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현실적이지 못한 영성 때문이라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키우는 청년들이, 청소년들이 영성과 함께 실력을 키우는 노력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공부에만 열심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부를 하지 않고 교회 일만 열심 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믿음은 게으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현실에 열심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나는 한 예술가를 보았다” “한 대통령을 보았다!” “한 정치가를 보았다!” “한 목회자를 보았다!” 말하고 될 것이고 그 말과 함께 사무엘과 같은 스승들을 만나 성공의 길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인생의 요행을 바라보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학습하고 복습하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눈에 뜨이는 톱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양 영성에서 왕을 보았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양을 쳤습니다. 수금을 켜고 양들을 보호하는 돌팔매질에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전략(前略)이 있었습니다.
목동의 전략이 무엇입니까? 내가 맡은 양들이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탐스럽고 생산성이 높아질까? 노래는 잘 하는데… 돌팔매질은 잘 하는데… 정작 양들에게서 생산성이 낮아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목자의 자질은 생산성이 아닙니까? 그러려면 전략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목동을 하면서 전략이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양들을 데리고 풀밭으로 나가면 양을 세 무리로 분류합니다. 어린양, 늙은 양, 건강한 젊은 양… 어린양을 가장 먼저 풀밭으로 들여보냅니다. 새끼 양들이 먹고 나면 늙은 양들을 들여보냅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젊은 양들을 들여보냅니다. 젊은 양들은 식욕이 왕성하기에 아무 풀도 잘 먹고 소화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어린 양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양치는 전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나는 왕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왕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아줄 왕의 리더십을 본 것입니다.
오늘 모든 교사들은 우리 학생들에게서 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은 그 시대의 ‘탑(top)’입니다. 정치계의, 교육계의, 기술계의, 기독교계의 ‘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승이 할 일입니다.
결론
태권도학원 승합차에 <이 안에는 장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타고 계십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이고 다니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 시선의 목양을 통해 장래 대통령들은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바다의 조약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교회의 큰 바위를 보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반석을 보았다! 하시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주님의 손에 다듬어지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의 ‘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위대한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내가 한 왕을 보았다!” 성령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으로 일어섭니다. 세상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부름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은 세상에 목표를 두기에 그들의 성공은 다윗의 성공이 아니라 사울의 일시적 성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왕을 보았다!” 하나님에게서 온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에게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한 왕을 보았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에게 둔다면 그 아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진정한 성공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에게 목표를 두고 달리는 아이들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교회에 주신 교육적 책임입니다. 할 일이 많아 지쳐있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없어 지쳐있는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생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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