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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야곱열전(11) 야곱성화의 열매(창세기 49:1, 2, 28~33)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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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성화(神手聖化) 야곱(11)

야곱 성화의 열매

창세기 49장 1, 2, 28~33절

  

서론

오늘 신수성화(神手聖化) 야곱, 열한 번째 시간으로 막을 내립니다. 다음주일이 우리교회 창립 29주년 감사예배입니다. 거기에 맞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아쉽지만 끝냅니다.

 

저는 성화설교를 해오면서, 내가 기대하는 성화들을 교우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성화의 여러 모양들… 교리성화, 관념성화, 영성성화, 인격성화… 제가 기대했던 것은 생활성화입니다. 뜬구름 잡는 성화처럼 더 열심 해야지… 인격이 더 변해야지… 기도의 깊이로 들어가야지… 전도해야지… 이런 등등으로 성화를 규정합니다.

 

물론 성화의 단면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염두에 둔 성화는, 생활로서의 성화입니다. 생활 속에 정직한 시민의식, 친절과 상냥함, 남에 대한 배려… 제가 기대하는 성화는 하나님을 향한 내면의 성화는 성령님께 맡기고 생활로 드러내는 인간관계 속의 행동성화입니다.

 

오늘 제가 새 양복을 입었습니다. 강남의 호텔에서 <파리양복점>을 운영하는 박집사님이 교회 창립 29주년 축하로, 그동안 수고했다며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훈아 단골양복점이라는 것은 잘 아시지요? 집사님이 새벽기도회를 나오는데 화곡동에서 걸어 30분~40분 정도 걸립니다. 여름에 걸어오려면 땀이 나는데 양복을 입고 옵니다. 더운데 웬 양복이냐? 하면 양복쟁이가 양복을 입지 않으면 어떻게 양복을 권하겠어요, 해요.

 

집사님은 맞춤 출장을 나갈 때도 꼭 정장이랍니다. 양복을 권하면서 본인은 가벼운 티셔츠 차림으로 가면 신뢰가 가겠느냐는 거예요. 양복을 입어야 양복 맞추려는 사람이 아, 이 분이 만든 양복이 이거구나, 이 분에게 맞추면 이렇게 나도 내 몸에 맞는, 내 분위기에 맞는 양복을 입는구나… 확인합니다. 아무리, 양복을 만드는 내 솜씨가 뛰어나다, 좋은 양복 만들어 주겠다, 내가 만드는 양복을 입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말해도 내가 양복을 사랑하고 내가 만든 양복을 보여주지 않으면 손님은 신뢰감이 덜 간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요! 내가 성화되었다고… 교리적으로 성화를 잘 안다고… 예배당에서 분위기 거룩하게 잡아도 성화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어우러진 교회생활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성화의 양복을 보여주지 않으면 누가 내 성화를 배우려 하겠습니까?

 

생활에서 나타나는 행동 성화를 통해 인격적 성화로 나가도록 서로 도와야 합니다. 내가 입은 생활성화의 옷을 보면서 저렇게 살고 저렇고 행동하니, 모두들 좋아하고 주변에 사람들도 많고 존경 받는구나… 그걸 배워야 합니다. 이런 게 성화입니다. 이런 생활성화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인격성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이끌리심을 받는 성화성도가 됩니다. 

 

야곱은 성화학교에 들어올 때는 부진아였습니다. 오랜 세월 성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완행성화입니다. 열차로 비유하면, 비둘기호나 무궁화호 열차, 느리게 거북이성화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외동딸이 성폭행 당하고… 라헬 아내, 두 손자, 며느리가 죽어 떠나보내고… 장남이 서모(庶母)와 통간하고… 더 이상 살 수 없으니까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넘어집니다. 나 좀 살려주세요….

그 날 이후부터 야곱의 성화는 완행열차가 아니라 고속행 KTX를 탑니다. 17년 만에 엄청난 속도로 성화를 이루며 147세 죽기 직전에 성화의 에베레스트 최고봉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성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욕심에서의 성화

야곱은 한 마디로 움켜쥐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기 위해 빼앗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 다음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도망 다닙니다. 빼앗고 도망 다니고… 그렇게 사니까 객지생활 20년에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성화가 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 손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왜 가까이 가겠습니까?     

이제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다 놓쳤습니다. 아내 요셉 아들… 애굽에 인질로 잡혀있는 시므온… 이제는 베냐민까지 데려오라고 합니다. 인생 발버둥 쳐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43:2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조금… 야곱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는 말입니다. 야곱 생애는 ‘몽땅’이라는 단어로 채워졌습니다. 이랬던 사람이 ‘조금’ 사와라… 합니다.

야곱의 욕심 주머니가 많이 작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뺏어버리니까 주머니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머니가 작으면 채워놓는 욕심도 작고 욕심도 작으면 경쟁도 작아집니다. 그러면 남을 돌아보게 되고 상생하게 되고 그만큼 성화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사와라… 욕심을 내려놓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웨슬레는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돈주머니가 성화되어야 진짜 성화입니다. 야곱은 지갑에서 성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돈이 성화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함

성화가 안 되는 것은 욕심주머니도 문제지만 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자아, 아집, 기질이 강하면 성령님이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내 구원을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실 때 성령님은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거절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화사역만큼은 안 그래요! 성령님은 단시간에 얼마든지 나를 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일방적으로 성화시키면 나는 로봇입니다. 성화의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얻어터지는 성화는 성화의 상처가 큽니다. 그러면 존경받는 성화가 아니라 안됐다, 측은하게 생각합니다. 거룩한 성화의 모습을 우러러보며 존경해야지 엄청 맞았구나, 불신의 흔적을 보여주면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내게 맡깁니다. 섭섭하고 괘씸해도 성화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스스로 뉘우치면서 성화를 해나갈 때… 무너지고 넘어지고 내려놓으면서 성화가 될 때 그 성화는 타인들에게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 매사에 남을 탓하며 살아왔습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인질로 잡혀 있는 시므온 도 살고 양식도 얻을 수 있다는 아들들의 말에 야곱은 펄펄 뜁니다.

 

42:36,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피해의식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성화가 나타납니까? 집안에서 이런 사람이 밖에서 남에게는 잘하고, 이해심이 많아요. 인자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부인들 자식들 입장에서 보면 이건 성화도, 성화의 단계도 아닙니다. 밖에 나갈 때 성화의 옷을 걸치고 나갈 뿐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성화의 옷을 벗어 버립니다. 다시 너희들 탓이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인격생활 이전에 생활성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사와라… 욕심을 버립니다. 욕심을 비움은 마음을 비움입니다. 비신자들에게 마음을 비웠다는 것은 운명이나 팔자에 맡기는 일이지만 신자들에게 마음을 비우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일입니다.

 

43: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성화가 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고백입니다.

 

14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이삭-야곱 족장들에게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특별한 명칭으로(출 6:3) 천지(天地)의 주재이시며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야곱이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난관을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감동시키사, 오해를 풀게 하사, 혹시 죄가 있었다면 죄까지도 용서하게 하시는 전능하시는 하나님… 자식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절대적 신뢰입니다. 불상사가 일어나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모든 결과를 수용할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던 사람이 하나님 절대주권에 맡기는 생활의 성화! 야곱은 이걸 이룬 것입니다. 자식들이 그 성화에 은혜를 받습니다.

영안이 흐려지지 않음

야곱이 애굽에 들어와서 산지 17년! 130세에 입(入)애굽 했으니 147세가 된 셈입니다.

 

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이거 유전입니다. 아버지 이삭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의 살았던 130년 험악한 세월에는 눈이 먼 아버지 이삭의 허물도 있어요! 이삭이 눈멀지 않았어도 야곱은 형으로 가장해서 아버지를 속일 엄두를 못 냈을 것입니다. 이삭이 눈이 멀어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장남에게 갈 복을 차남에게 줘버림으로 그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안수축복기도를 받게 합니다. 아버지가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오른손은 장남 므낫세에게, 왼손은 차남 에브라임에게 올리게 했습니다. 장남은 장남의 복을, 차남은 차남의 복을 받는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했더니, 웬일입니까?

 

48: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요셉이, 아버지! 손을 잘못 얹었습니다. 애가 장자이니 오른손을 머리에 얹으소서….

 

19절,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에브라임에게 장자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속아서 축복을 바꿨지만 야곱은 영민한 아들 지적에 오히려 영적 분별을 하는 거예요. 노안(老眼)으로 눈이 멀었지만 영안은 더 밝아졌습니다. 성화가 되니 밝아지고 축복의 물길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정확히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진정한 성화의 모습입니다. 

열두 아들을 향한 예언

야곱은 임종 직전에 12아들에게 예언합니다. 야곱의 유언이 위대한 것은 미래에 되어질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 야곱은 성화된 노년을 보냈습니다. 49장 1, 2절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후처를 얻어 6명의 자식을 낳으면서 비범했던 사람이 평범한 가장(家長)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으면서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처음부터 평범한 사람이었고 죽을 때도 평범했습니다. 180세를 살았지만 그 역시 기록된 유언은 없습니다.

 

야곱은 달랐습니다. 젊었을 때는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아들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자기중심적 생활을 했습니다. 애굽 이주 후에 요셉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면서 더 큰 언약의 성취를 기대하며 묵상을 계속했습니다. 마음대로 고집하며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회한과 참회, 기도와 순종이 삶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성숙해갔고 성화되어 갔습니다. 성화의 산물(産物)이 12아들 불러놓고 당당하게 축복의 예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지 않았지만 사실은 열두 아들의 내면을 모두 꿰뚫은 사람입니다.

 

49:28,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자식들 하나하나에 대해 기질과 특징을 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화된 사람은 각 사람의 분량과 내면을 압니다. 그래서 야곱의 기도는 능력이 있고 예언은 이후 모세 예언의 토대가 될 만큼 신령했습니다(신 33장).

레아 곁으로

야곱은 노년에 초고속으로 성화를 이루면서 최고봉에 오릅니다. 그러나 야곱 생활성화의 클라이맥스는 49:31입니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레아 옆에 묻어 달라! 그 말은 죽은 레아를 명실공이 본부인으로 인정하며 그동안 12자식을 내 아들처럼 키워주었던 레아에게 고맙다는, 나쁜 남편 야곱이 주는 최고의 착한 선물입니다. 

 

레아가 살았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레아의 여섯 아들들, 아버지에게 미움 받으며 살았습니다. 르으벤은 서모와 통간해서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고 시므온과 레위는 거짓말로 세겜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해서 몰살했고 기대주 4남 유다는 본의 아니게 며느리와의 사이에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스블론 잇사갈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레아의 아들들, 아버지에게 괄시받고 서글펐지만 어머니 레아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들었을 때 상처와 분노 싹 씻겨나갔습니다. 아무리 요셉이 12형제들을 통합시키려 해도 레아의 여섯 아들이 협조해 주지 않았다면 봉합은 되어도 결속은 힘듭니다. 12형제를 하나로 묶은 것은 요셉의 용서와 아버지의 성화였습니다. 이게 성화가 이루는 업적입니다. 이걸 인생 후반전에야 이룬 것입니다. 일찍 되었다면 본인은 물로 주변에 그렇게 매 맞지 않았겠지요. 그게 참 아쉬워요!

 

결론

아버지는 147세를 일기로 누웠습니다. 열두 아들이 누워있는 죽은 아버지를 보니 참 크신 분입니다. 사람도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커 보입니다. 사람도 죽으면 커 보이는 분들이 있어요! 그의 자리가 크고 앉았던 자리가 큽니다. 그래서 샌드버그는 "나무는 쓰러 뜨려보아야 그 크기를 알 수 있듯이 사람도 누운 후에야 그의 크기를 알 수 있다"고 한 거예요!

 

아버지가 12아들에게 하나씩 선포하는 예언적인 유언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대단한 영성이자 성화의 단계에 올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크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들에게 모두 영향력을 주었으면 그는 당연히 큰 사람이고 성화된 사람입니다.

 

야곱 성화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에게 맞아서 성화되었을까요? 야곱의 성화는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참고 기다리심이 있었기에 야곱은 성화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성화는 결국은 하나님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성화 작품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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