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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내가 놀라야 남도 놀란다!(누가복음 5:1~1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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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놀라야 남도 놀란다!

누가복음 5장 1~11절

 

서론

본문은 갈릴리바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고기를 엄청 많이 잡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충격적어서 9 놀라고 베드로와 뱃사람들이 놀랍니다. 10 놀라고 야고보와 요한도 놀랍니다. 한문으로는 경악(驚愕), 영어는 서프라이즈(surprise)입니다.

택시 승객이 뒤에서 운전사의 어깨를 두드리자 운전기사가 깜짝 놀라 화를 냅니다.

그렇게 뒤에서 치면 어떻게 해요? 너무 놀랐잖아요!”

승객도 놀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뭐 좀 물어보려고 어깨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 제가 그렇게 잘못했나요?”

그러자 운전사 하시는 말씀(),

오늘이 택시운전 처음인데, 이제까지 30년 동안 장의사 차만 몰았단 말이에요!”

장의사차 30년 경력 운전사, 다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운전하는데 뒤에서 죽은 사람이 일어나 등을 툭툭 치는 것으로 착각했으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주님과의 만남 이후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애는 서프라이즈 그 자체였습니다. 본문은 서프라이즈 생애가 시작되는 서막(序幕)입니다. 제자들이 경악하고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된 것은 4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도 놀라운 인생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생각의 바다로 그물을 던집니다(예수님의 생각으로)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불만 불안 상태입니다. 예수님 찾아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다. 해가 뜨면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봐야 소용없습니다. 어두워야 고기가 몰려옵니다. 전문성이 있는 어부 베드로는 생각합니다.

저 분은 목수여서 바다에 대해서는 통 모르시는구나!’

그러다 조금 깊은 생각으로 노를 젓습니다.

아니야! 저 분의 인격으로 보아 헛말을 하실 분이 아니야.’

 

첫 생각에는 예수님에 대해 웃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깊은 데로 갑니다. 다음부터는 내 생각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 대어(大魚)들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시늉만 내느라 얕은 곳에서 그물을 내렸다면 깊은 데로 갔지만 내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놀람의 축복도 성공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으로 갔고 다음은 예수님 생각으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기에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生角), 두뇌와 마음의 중심입니다. 생각이 바로서야 바르게 선택하고 생각이 바르게 가야 성공의 길을 갑니다. 생각이 바로 되려면 생각을 깊이’, ‘오래’, ‘다양하게 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생각의 깊이가 없습니다. 독서를 통해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고 망설이고 뜸을 들이고 이런 게 없습니다. 인스턴트 문화는 3분 즉석문화입니다. 텔레비전은 수백 개의 채널 문화입니다. 쉽게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려버립니다. 음악프로그램은 20대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는 율동문화입니다. 인터넷문화는 더 빠르고 연령이 낮을수록 더 빠른 것을 선호합니다.

이런 문화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침투합니다. 예배시간도 짧아야 하고 설교가 20분 정도 지나면 일부러 하품을 합니다. 빨리 끝내달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니 깊은 맛이 없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한마디로 생각이 없다’, 생각은 있어도 생각이 얕다 입니다. 생각은 지식과 경험과 논리적 사고로 깊어집니다. 그러면 정답이 나오고 바른 선택! 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이것이 인품이 됩니다. 생각 없이 살면 반대 현상이 나타납니다.

 

장경동 목사님은 설교에서 생각 사각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생각(生角)은 살릴 생-사는 마음이고 사각(死角)은 죽을 사()-죽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사각은 사탄에게서 옵니다. 자살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오는 사각입니다. 사람이 사는 생각을 해야지 죽을 사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얕은 사각이 자기만 생각하고 자살로 인생을 종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열정적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행동합니다. 남의 주장이나 선동에 금방 휩쓸려버립니다. 남이 좋다하면 무조건 삽니다. 남이 과외를 하면 덩달아 합니다. 오죽했으면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나올까요?

 

그리스도인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능력있는 사람들이 종종 쓰임 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전문가라는 생각에 남의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전문 생각에서 깨어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할 때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심사숙고이지만 때로는 즉시가 됩니다. 너무 오래 생각하다보면 사단에게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헌신할 때는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 생각이고 두 번째 생각은 내 생각이고 세 번째 생각은 사단의 생각이 됩니다. 헌물과 헌신을 이리재고 저리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생각을 우선에 둡니다. 예수님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죽일 생각을 하지 않고 살려낼 생각을 하십니다.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2)고 말씀합니다. 위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깊은 곳에 깊은 사상이 나오고 깊은 생각에 신중한 행동이 나옵니다. 깊은 생각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생각으로 훈련을 받은 유대인이 명철과 지혜를 얻어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없는 말, 깊이 없는 행동을 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숙성된 행동으로 살아가야 인생에서 놀라운 환희를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깊은 책임감의 바다로 그물을 던집니다(성령님의 도움으로).

책임감(責任感)과 부담감은 같이 옵니다. 결혼한 남자들은 가장으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낍니다. 교회 중직자가 되면 책임도 있고 부담감도 있습니다. 부담감이 없는 책임감은 없습니다. 만약 부담이 없다면 그것은 책임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어제 밤에 다녀왔던 곳입니다. 베드로는 그곳으로 갑니다. 명령도 있지만 5,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는 자기 말에 대한 책임입니다. 책임감은 부담감입니다. 이번에도 잡지 못하면 젊은 목수에게 휘둘린 사람이 되고 두 번 비웃음을 삽니다. 부담감을 가졌습니다. 부담감 때문에 깊은 데로 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까요? 책임감은 없어지겠지만 그만큼 만선의 행운과 기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성공은 책임감이 주는 부담감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부담을 갖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맡겨도 책임감이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약속했으면 어떤 순서를 맡았으면 무슨 일이든 나와서 담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안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기에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러니 축복도 믿음의 기쁨도 큰일을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킵니다. 정직하고 솔직하고 예의바릅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성실하기에 신뢰감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내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부모에게, 사회에 책임을 돌립니다. 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김유신이 한국인의 기질입니다. 이런 기질이 내가 할 일은 하지 않고 세상이 어떻고 불평하면서 책임감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편없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감은 무엇입니까?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은 목격자입니다. 내가 목격한 것을 책임지고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이 부담감으로 나를 짓누르지 않게 하려면 부담감이 사명감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감은 성령충만으로 감당합니다. 고기는 말씀에 의지하여 잡았지만 책임감은 성령에 의지해야 성공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으로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 책임완수를 위해 성령은 밤낮으로 일합니다.

 

우리가 책임감을 다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감당이 안 됩니다. 성령님과 함께 은 책임감 속으로 들어가고 성실함을 인정받아 믿음 안에서 성공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놀라고 남들도 놀라게 합시다!

베드로는 깊은 신앙의 바다로 그물을 던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처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4, “선생님”, 랍비입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예의 정도를 갖춘 것입니다. 이제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갑니다. 사실 깊은 데는 바다의 깊음이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님을 향해 깊은 데로 가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았을 때 처음에는 잡힌 고기에 놀랐습니다. 이어 고기 잡는 예수님의 실력에 놀랐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 자체에 놀랍니다. 8 주여 구원자입니다. 선생님에게서 주님으로 나사렛 목수와 갈릴리바다 어부의 입장에서 죄인과 구세주의 관계로, 안드레의 선생님에게서 나의 구세주로 바뀌어 갑니다.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훗날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어디까지 계속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으며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기독교전설에서는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게 해다오!” 그렇게 죽었답니다. 믿음의 깊은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 아이작 뉴턴은 수많은 발견을 했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잘 큰 과학적 발견은 무엇입니까? 뉴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심의 깊이입니다. 이런 깊은 믿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국교회 교인은 1천만 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갈수록 신앙심이 얕아지고 있습니다. 깊은 데로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깊은 곳으로 갔던 분들도 점점 얕은 곳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와 공산당의 학정에 반대했고 주일성수, 기도회, 부흥회 등으로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었습니다.

 

지금은 믿음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억지이며 흥미를 못 느낍니다. 믿음의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분들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믿음으로 완고해지고 있습니다. 이러면 완고한 신앙심으로 죄인 만드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면 성공의 축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탤런트 이유리는 10여 년 전에 무명의 전도사님과 결혼했습니다. 화려한 연예계생활을 내려놓고 목회자 아내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유리는 "결혼에 대해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한다면 탤런트 직업을 내려놓고 선교사로 떠날 수 있는지, 전 재산도 다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 같았다. 그 질문에 ''라고 대답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라고 대답했다"고 간증한 바 있습니다. 이유리는 깊은 신앙의 세계로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그녀가 건져낼 영혼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결론

그날 아침, 베드로의 배는 빈 배였습니다. 배만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도 비어있고 이런 식이면 그의 인생도 비어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손질하며 허()한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 생각은 자꾸 나쁘게 나가고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마음은 무겁고 하나님에 대한 유대종교심은 바닥입니다. 그래서 인생 자체가 비어있는 빈 배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배는 만선(滿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놀랐습니다.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서프라이즈였습니다. 어느 한 날도 찬란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없는 서프라이즈입니다. 깊은 생각으로 그물을 던지고, 깊은 책임감에 그물을 던지고, 깊은 신앙심으로 그물을 던지는 시간들은 매일 서프라이즈,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코로나라는 골리앗을 너무 쳐다보지 마세요! 사자굴 속의 코로나라는 사자에 너무 눈을 주지 마세요! 풀무불 속의 불들에게 너무 흔들리지 마세요! 우리 인생의 빈 배에 너무 주목하지 마세요! 베드로처럼 주님처럼 생각하고 말씀에 책임을 지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겨 빈 배를 드리고 노를 드리고 그물을 드린다면 우리 인생도 행복의 만선, 자족(自足)이라는 만선,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의 만선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인생에 나도 놀라고 내 만선의 축복에 남들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서프라이즈! 날마다 우리 인생은 놀람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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