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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겨울이 오고 있다!(디모데후서 4:9~1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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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고 있다!

디모데후서 4장 9~15절

 

서론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계절상으로는 마지막 가을로 모래이면 겨울입니다. 2020년 금년 겨울은 여느 때보다 춥습니다. 코로나로 마음이 움츠려 있고 경기가 바닥이어서 움츠려 있고 수능생과 부모들은 목요일에 있을 수능시험으로 움츠려 있습니다. 인생을 4계절로 나누어 볼 때 인생의 겨울은 인생의 끝자락입니다. 그래서 겨울은 늘 춥고 쓸쓸하게 합니다.

겨울이 왔다!

바울은 21절에,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바울에게 인생의 겨울은 벌써 와 있습니다. 죽음의 목전, 인생의 종점 한 정거장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6,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떠난다라는 헬라어는, 천막의 로프를 푼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구라파 각지에 걸쳐 많은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최후이면서도 가장 위대한 여행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여행까지도 산보가 아닙니다. 제대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노병이지만 마지막 전투에 부름을 받습니다. 그 전투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건 순교의 죽음입니다.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전제는 제단 위에 오른 제물위에 붓는 포도주입니다(15:1-10). 희생 제사의 마지막 의식으로서 바울 자신의 희생적 순교를 상징합니다. 순교제단에 목숨을 바치는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생의 겨울에서 의연합니다. 순교라는 죽음이지만 바울은 죽는다는 행위를 떠난다로 승화시킵니다. 이는 동물을 달구지나 쟁기에서 벗긴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바울에게 죽음은 인생의 노고에서 그를 쉬도록 하기 위해 멍에를 벗겨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히려 인생의 추운 계절, 죽음을 반기고 있습니다.

 

죽음이 준비된 사람과 준비되지 않는 사람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옛날 겨울나기는 김장과 연탄입니다. 이것만 충분히 준비되면 든든했습니다. 그게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겨울이 오는 것이 불안합니다.

 

바울은 충분히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로프를 푸는 일이고 동물을 달구지나 쟁기에서 벗겨주는 일입니다. 그날만을 기다려왔기에 순교를 앞에 두고서도 의연합니다. 왜냐?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기에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규칙 하에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니 죽음 앞에서 의연하고 오히려 죽음을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35세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답니다. 35세 이전의 삶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전혀 의식치 않고 무엇엔가 끌려 살았다는 것입니다. 35세 중년부터 슬슬 죽음을 시작하다가 인생의 겨울에서는 죽음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 병동 환자들을 보살폈던 간호사는 임종을 맞은 이들의 후회를 5개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남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추느라 내 뜻대로 살지 못한 걸 후회한다.

둘째, 일중독에 자식의 어린시절, 아내와 따뜻한 가정생활을 누릴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

셋째, 감정표현을 좀 더 하며 살 걸 후회한다.

넷째, 친구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후회한다.

다섯째, 게으르고 현실에 안주하느라 모험적이고 변화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길선주 목사는 임종 때 빛나는 얼굴을 한 후에 하늘에서 전보가 왔으니 이제 그만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이미 인생의 겨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반드시 찾아올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겨울이 오고 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하늘나라 가는 것이 소원이라 했습니다. 그는 3층천을 보았기에 하늘나라에 대한 열망이 더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계절인 겨울채비를 하는 그의 마음은 쓸쓸합니다.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년이라는 인생의 겨울 앞에서 그는 여러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사명을 위해 떠나간 사람. 본문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가 갔고입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그의 주변에서 사랑을 나누고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모두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를 배신하고 떠났고 어떤 이들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떠나갔습니다. 홀로된 외로움을 보여줍니다.

 

-보고 싶은 사람:디모데입니다. 믿음으로 낳은 아들, 친자식 못지않게 사랑했던 사람, 부모의 정을 주었던 디모데가 못 견디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이 오면 지중해가 얼어버리고 배가 다닐 수 없기에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만날 것이기는 해도 마지막으로 그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격려해주고 싶은 사람. 마가입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에서 도중하차했기에 바울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그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결별합니다. 물론 화해는 했지만 마가에게 지난번처럼 따뜻한 마음과 신뢰를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그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바울 앞에 서기만 하면 과거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바울이 그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것은 마가에 대한 최고의 신뢰입니다. 마가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노사도의 따뜻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노쇠함으로 오는 자연사 죽음, 질병으로 오는 불가항력의 죽음, 자살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교제물로 순교제단에서 피를 흘리며 죽습니다. 그래서 제물이 개끗한 것처럼 바울 자신의 생애도 정결함으로 올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내 용서하고 괜찮다하고 고맙다 하고 그렇게 내면을 정리하면서 정결한 제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이 되는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각이 있습니다. 법을 집행하고 감시하는 기관이 이렇게 초법위에서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똘똘 뭉치자고 휴전을 제안해야할 사령탑이 무너져 버리니 이 겨울은 유독 추울 것 같습니다.

 

이 가을 막바지에 우리들은 지나온 날들을 한번은 되돌아보는 게 좋습니다.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말 한마디라도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과오를 심히 뉘우치고 있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용서의 말 한마디로 지나간 날들의 부끄러움을 깨끗이 지워버릴 사람들이 당신의 전화 한 통, 문자 하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용서만 아니라 격려까지 해주는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을 봅니다. 이 겨울에 우리들도 용서하고 격려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나섭시다.

겨울을 보냈다!

이제 바울은 죽음을 맞을 것이고 인생의 추운 겨울도 지날 것입니다. 그는 천국에 입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지났지만 뒤에 남아 추운 겨울을 보낼 사람을 생각합니다.

 

20,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드로비모는 에베소교회가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한 신실한 신자입니다( 20:4). 병이 들어 거동할 수 없어 밀레도에 남겨 두고 떠나왔는데, 어찌 되고 있나? 그게 걱정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던 사람이 병으로 고생하고 나는 순교를 앞두고 안쓰러워하면서 드로비모의 이름을 상기시킴으로 그를 잊지 말고 내가 없더라도 잘 돌봐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울을 맞으면서 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병든 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금년에는 유독 암환자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우리가 더욱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주변을 정리합니다. 떠돌이 전도자로 살았기에 정리할 가족이나 세간이 없습니다. 정리해야 할 리스트는 사람들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은 어서 오라! 하고, 용서해 줄 사람은 데려 오라! 고 합니다. 병든 사람은 챙기라고 합니다.

 

그때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떠오릅니다. 바울만 아니라 교회에 심히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알렉산더는 매우 흔한 이름이므로 '구리 장색'이라는 신분을 밝힙니다. '구리 장색' '구리 세공'보다 '대장장이'입니다. 딤전 1:20에 나타나는 '알렉산더'와 동일 인물입니다. 초대교회 교인이었다가 배교한 이단자로 바울이 재판받을 때에 불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알렉산더에게 당한 배신을 생각하면 저주라도 퍼붓고 싶지만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정리를 합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시편 62:12의 인용입니다. 바울은 직접 보복하지 않고 심판을 그리스도께 맡깁니다. 다만 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은 시킵니다.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바울이 괘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알렉산더만이 아닙니다.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1차 투옥 때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죄수가 재판 받으면 동료들이 동반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 재판에 신상에 손해가 올까봐 모두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섭섭한 일입니다. 그러나 재판받을 때 도와주지 않았어도 이제 와서 허물을 돌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성숙된 믿음을 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 힘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최소한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에게 맡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격이 보존되며 교회가 삽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힘은 예수님에게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용서를 받은 적이 있었기에 알렉산더를 하나님에게 맡겨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벤치마킹을 해야 합니다.

 

결론

어느 무덤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죽음이 올 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중국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죽을 사)를 씁니다. 이 글자는 위에 한 일(), 밑에 저녁 석()자와 칼을 가리키는 비()자로 구성됩니다. 중국인들에게 죽음은 어느 날 밤에 느닷없이 날아오는 비수와 같은 것입니다. 한낮에 비수가 날아오면 피할 수라도 있지만 밤중에 날아오는 비수는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요즘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 프로그램이 성행합니다.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을 정리한 목록을 말합니다. 한글로는 소망 목록이라고 합니다. 버킷(bucket)은 양동이입니다. 양동이가 왜 죽음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중세시대에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할 때 올가미를 목에 두르고 뒤집어 놓은 양동이(bucket)에 올라간 다음 양동이를 걷어참으로써 숨을 끊습니다. 죽음의 양동이입니다. 교도관들이 직전에 죄수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에서 유래했답니다.

 

이제 겨울이 닥칩니다. 금년에는 교회 월동준비도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도 준비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가버리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들의 버킷 리스트! 그 어떤 것보다 사람들의 명단으로 채워졌으면 합니다! 코로나의 긴 겨울을 지나고 있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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