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고린도후서 13장 5~9절
오늘 설교제목을 “당신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로 정했습니다. 안녕(安寧)이란 말은 ‘아무 탈 없이 편안함’입니다. 편한 사람끼리 인사말로 대부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인사입니다.
수렵시대의 “안녕하세요?” 인사법은 이 길을 가면 여우와 호랑이가 있어 위험하고 저 길을 가면 산돼지와 노루가 많고 그쪽 길로 가면 산삼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수렵, 약초 채집사회의 인사법입니다. 제주도는 지금도 이런 인사법을 씁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잡수셨어요?”로 바뀝니다. 굶어 죽지 않고 살았느냐, 라는 생사 안부보다는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건강하냐? 는 건강 안부를 묻는 인사법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밤사이 편안했느냐?” “별고 없이 편안하게 잘 지내었느냐?” 인사말입니다. 특히 전쟁을 겪으면서 생겨난 인사법입니다. 안녕하세요?, 는 “탈 없이 잘 지냈느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믿음에 탈이 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탈이 나고 회를 먹고 탈을 납니다. 회사에서 탈이 난 사람들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탈이 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가 우리 믿음에 탈을 나게 합니다. 어떤 분들은 스스로 알아요, 내 믿음에 탈이 났다는 것을! 주일 성수를 하지 않아도 너무 편하고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편합니다. 이게 믿음에 탈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에 탈이 나지 않았다면, 믿음이 안녕하고 있다면 우리 믿음은 지난날처럼 믿음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시험해 왔습니다. 그것도 외부적이고 가시적인 것들인 외모, 언변(言辯)입니다. 이것으로 사도의 권위를 의심하면 안 되는데 고린도교인들은 자기들의 방종된 교회생활을 꾸짖으니 외적인 것으로 바울을 공격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 점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시정토록 촉구합니다.
첫째는, 시험의 대상을 내가 아니라 고린도교인들 너희 자신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험을 함에 있어 외적인 요소-외모나 언변 등에 하지 말고 내적인 것 곧 ‘믿음’ 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겨 그것을 철저히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5절입니다.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믿음 안에 있는가? 믿음이 안녕한가? 믿음을 테스트 하고 탈이 있는 믿음이 아니라 편안한 믿음! 건강한 믿음인가? 그걸 증명해 보이라, 는 것입니다.
믿음의 안녕! 무엇으로 시험해 볼까요? 성경으로, 주일성수로, 예배참석으로, 헌금생활로, 봉사생활로… 믿음을 시험해 볼 믿음의 과목들이 많습니다. 그 과목에서 안녕하신가요?
오늘은 고린도교회를 대상로 네 가지로 시험해 봅니다.
테스트1. 믿음의 열성 & 믿음의 진실성
“얼마나 열렬한가?” 믿음의 열성보다 “얼마나 진실한가?” 믿음의 진실성을 테스트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충만했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책망을 가장 많이 들었던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열심은 있는데 진실이 없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 열심인가? 즉 진실한 믿음인가, 테스트해보라고 합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지적보다는 감정적이어서 뜨겁습니다. 광화문에 모이는 것 보세요? 무슨 집회로 모이는 거 보세요.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의 종교관은 열광적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열심은 세상이 다 알아줍니다. 참 열렬합니다.
문제는, 열심은 있는데 그 열심이 진실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열심’은 부글부글 끓은 엔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추진력이지요. 엔진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방향을 잘못 잡고 열심을 내면 잘못으로 나아가는 것도 열심을 내는 것처럼 빠릅니다. 무서운 열정입니다.
광화문에 나가 정의를 외치고 공정을 외치지만 그 열정이 바르게 된 것인가요? 그러면 그 잣대를 모두에게 공정하게 들이대야지요! 진실함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는 처칠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정직입니다. 미국인들이 리더십의 필수요소로 꼽는 것도 정직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직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감정을 문제 삼을 뿐입니다.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해도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니 정치가들이 밥 먹듯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적인 지지가 거짓말을 부흥시킵니다. 결국 국민들이 그들에게 숙주(宿主)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생활도 테스트 해봅시다. 열심이 있나요? 천지창조를 믿는 사람답게, 구세주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답게 뜨거움이 있나요, 부글거림이 있나요? 합격? 좋습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봅시다. 열심에 진실함이 있나요? 진실-진리 앞에 서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의 깨끗한 순도가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자신을 테스트해보았습니다. 열심한가? 펄펄 뛰는 열심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진실한가? 어줍잖은 진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100% 순도를 내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위선의 성직자보다 진실한 창기가 우리 주님에게는 더 귀중한 존재였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보여야 합니다. 아울러 그 열심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 하는 분들에게서 결여되는 진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 열심히 아까워서! 열심도 중요하지만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열심도 좋지만 진실, 정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정화됩니다.
테스트2. 내 행위 의존 믿음 & 하나님의 의존신앙
“내 행위가 얼마나 선한가?” 당당한 자기 과신의 믿음에 앞서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그걸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믿음의 토양은 윤리적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자꾸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러다 보니, 술 담배 안 하면 큰 믿음이라 인정합니다. 자꾸 선과 악으로 나누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가, 악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신뢰하는가? 선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은 상대적입니다. 10촉 전구와 20촉 전구가 서로 밝다하지만 100촉 전기가 들어오면 꼼짝 못합니다. 100촉도 동천에 해가 떠오르면 어떻게 됩니까? 무색해집니다.
다윗은 큰 범죄를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사울은 종교적인 범죄를 했습니다. 누가 용서를 받았습니까? 다윗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가 작아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의를 자랑하는 자들은 “저럴 수가 있나?” 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저럴 수가 있구나!”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내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그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으로 나왔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義)를 자랑했습니다. 세리는 얼굴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義)를 의지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의 믿음을 더 칭찬했나요?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단순한 윤리교실, 도덕교실, 상류층 사람들 회합의 차원을 넘어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나요? 내 행위를 과신하는 믿음인가요? 비록 흠이 많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고 있나요?
테스트3. 대인(對人) 관계 & 대신(對神)관계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그걸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성형천국입니다. 그만큼 외모 지향시대입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조류가 믿음의 세계에도 들어왔습니다. 신앙이 자꾸 사람들 중심이 되어버리고 신본주의는 인본주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거기에 진정 용기가 있고 도덕적인 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보다 바로를 의식했을 때 잘못된 행동이 나왔고 다윗은 하나님의 의중(意中)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기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요셉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했기에 죄의 환경에서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죄된 형편에 처했을 때 그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사실 그 죄는 상관인 보디발과 관계됩니다. 보디발은 없습니다. 여주인은 죄에 대해 적극적입니다. 하인이기에 여주인에게 끌려 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떨쳐버리는 도덕적 용기는 어디에서 왔나요? 신전의식! 칼빈주의 핵심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사람들의 말에, 표정에 너무 신경을 쓰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사울은 초창기에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기를 얻게되자 자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의 칭찬의 소리를 듣자고 하다가 결국에는 망하게 된 것입니다.
평가라는 것이 그래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세례요한-백성들은 선지자, 헤롯왕은 백성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로
김정일-미국과 맞서는 대단한 지도자다! 핵으로 세상을 공갈하는 철부지다!
인간적 평가는 이처럼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런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머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관심이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이런 자세로 나가게 된다면 사람들 인기에 연연하지도 않고 내가 욕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테스트4. 환경의존 & 환경주도
내가 “환경에 끌려 다니나” 내가 “환경을 끌고 다니나?” 그걸 시험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시험장소입니다.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믿음이 있는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으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환경에게 굴복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나발과의 관계에서는 자신 속에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지 않았기에 자칫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스트라는 사람은 베트남 전쟁 당시 날마다 백악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반전 시위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도 했으나 때로는 혼자서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머스트씨. 당신이 밤에 혼자 촛불을 들고 이곳 백악관 앞에 서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고 이 나라의 정책이 변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예요. 난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스트라는 사람이 미국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물들지 않기 위해 홀로 외로운 투쟁을 벌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환경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주도하는 사람, 적어도 환경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ㅅ하도록 우리 자신을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내 안에 있어야 그 예수님의 능력이 환경을 주도하게 합니다.
바울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했습니다. 버리운 자들은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믿음의 세계를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보다는 환경을 주장하는 하나님을 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환경자체만 봅니다. 눈의 차이입니다. 환경을 보는가? 환경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보는가? 이것은 결국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가 될 것입니다.
결론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인들에게, 나보다 너희 자신부터 먼저 면밀히 시험하고 그 믿음이 진짜인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인지 현재의 영적 소속지를 확증하라! 합니다. 확증(確證)은 ‘확실한 증명’ 제련소에서 금과 불순물을 선별하는 행동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스스로에게 엄격한 시험을 적용하여 그리스도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믿음인지 확증해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 안에 계시면 바울의 약함과 강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5절 하반절,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결코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으며 그래서 이리 말합니다.
9절,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물을 고치는 것(막 1:19), 잘못 놓여 있는 것을 제자리에 바로놓는 것, 잘못된 성도를 바로잡는 것(갈6:1), 개선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에는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믿음을 바로 세워서 죄악으로 벗어나고, 영적으로 온전해지고, 바울 자신이 진정한 사도로 인정받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원합니다.
11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여러분들도 코로나시대에, 소위 비(非)대면예배 시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믿음에 탈이 나지 않았나, 점검해 보세요! 그래서 탈이 났다면 바로잡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믿음에 더 이상은 탈이 생기지 않았다고 확증해 보이며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코로나시대의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여러분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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