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장 1,2절
서론
코로나19가 발병된 지 10개월째입니다. ‘긴 병에 용사 없고 효자가 없다’고 오랜 마스크 생활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간관계가 약해지다 보니 모두 지쳐 있습니다. 거기다 생업까지 무너지면 막막하고 짜증이 나고 ‘코로나블루’(corona blue), 우울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코로나 우울감이 왜 생길까요,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실내에 머무르면서 생기는 답답함, 코로나에 감염에 대한 불안감, 작은 증상에도 코로나가 아닐까 걱정하는 두려움, 활동이 계속 제약 받으면서 느끼는 무기력증, 감염병 관련 정보와 뉴스에 대한 과도한 집착,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증가… 등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우울감을 겪게 됩니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는 노년층도 10년 새 81% 증가했습니다.
이런 때는 위로가 필요한데 지금 정치권은 위로는커녕 편을 가르는 발언으로 화병이 날 판국입니다. 정치가들이 머리는 좋은데 생각은 참 못 났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유튜브에 빠져들고 트로트에 열광합니다. 유튜브에는 내 편을 들어주어 내 속을 후련하게 해 주는 이야기들이 있고 트로트에는 마음을 쨘~ 하게 하는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게 일시적이지 우리를 오래도록 위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절,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가 두 번을 반복합니다. ‘내 백성’은 어떤 형편이기에 위로하고 또 위로하라 합니까? 한 번의 위로는 안 되기에, 그냥 하는 위로는 안 되기에 두 번 씩이나 위로를 강조합니까? 이스라엘이 받아야 할 위로는 장차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에 대한 참상입니다. 바벨론 유수(幽囚)는 풀무불 시련이 될 겁니다. 우리가 36년 일본의 포로생활만도 굴욕적이고 자주와 자유를 잃어버린 감옥 생활 자체였을 텐데 70년을 끌려가서 산다면 얼마나 모질고 힘든 세월이겠어요? 그들에 비하면 요즘 우리는 고생한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어디 그래요? 남의 수술상처보다 내 손톱 상처가 더 아픈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떻든 이제 이스라엘은 망할 것이고 이런 상황을 앞에 두고 위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불행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해결책보다는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위로라고 전부 공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의 위로가 내게는 위로가 못되는 일들도 종종 일어납니다. 죽음에서, 부도에서, 중병이 선고될 때… 위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입관할 때 울고 있는 유족들을 누가 위로하려면 말립니다. 그때 울지 않고 언제 웁니까? 그때는 위로의 시간이 아니라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때 눈물을 다 쏟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됩니다. 울도록 놔두고 위로는 나중에 하면 됩니다. 그걸 모르고 억지로 위로를 하다보면 위로해 준 그 사람이 도리어 섭섭해집니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시각 장애로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사는 여자 오영(송혜교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처음 뇌종양에 걸렸을 때, 내가 바란 것도 위로였어. 근데 사람들은 …위로는커녕 여섯 살 아이에게 용기를 강요했어. 잔인하게. 괜찮아, 영이야. 수술은 안 무서울 거야. 괜찮아. 넌 이길 수 있어. 항암 치료? 그까짓 거 별거 아니야. 만약 사람들이,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그렇게 말했다면 난 하루 이틀 울다가 괜찮아졌을 거야. 근데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여섯 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성인이 되었지만 여섯 살의 그때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도록 만든 사람들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어린 소녀를 위로해 주려고 했던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자들이 왜 지금까지 눈물의 끈이 되고 있을까. 어설픈 위로가 만들어 낸 상처입니다.
위로가 되지 않을 영역을 말로 위로하려다 친구지간에 의(義)만 상한 사람이 욥의 친구들입니다. 욥은 아들 일곱 딸 셋, 열 자녀가 동시에 죽었습니다, 재산이 폭삭 망했습니다. 몸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여기에 무슨 위로가 있겠어요? 그래도 욥의 친구들은 위로하려 듭니다(5장).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7절)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8절)
그야말로 염장을 지르는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니 얼마나 아파요? 위로한답시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이지요!
욥의 입장에서 자식들이 죽고 재산이 망가지고… 죽을 맛인데 친구들이라고 찾아와서 사람은 고생을 위해 태어났다,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교과서적 말을 해대니 속이 뒤집히고 결국, 웬수 사이가 되고 맙니다. 사람이 위로할 고통이 있고 위로할 수 없는 범주가 있는데 내가 위로하려 들었다가 상처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주는 <언어의 온도>에서 위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있는 위로는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는 너희가 위로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위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공감적인 위로입니다.
2절,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마음에 닿는 것이 공감입니다. 그 위로의 내용이….
2절,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외치라… 위로하라! 힘차게 내 백성을 위로하라, 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바벨론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노역의 기간이 끝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값은 이제 지불되었다”, 죄값이 지불되어 너희 죄가 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죗값을 누가 지불해 주었는가? 하나님께서 지불해 주셨다, 유다가 우상숭배의 죗값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징벌을 받았기에 응분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탕감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죄를 탕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루살렘 귀향길에 함께 하시겠다 합니다.
3절,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건 본국으로 귀향하는 광야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돌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진정한 위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고후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위로’는 ‘곁으로’+‘부른다’ 헬라어 합성어입니다. 위로는 나를 위로해 주실 분을 내 곁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부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불러내십니다. 그래서 따듯하게 안아주십니다.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은 넉넉히 위로해 줄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보혜사, 위로자라고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위로해도 위로가 되는 영역이 있고 위로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인간 위로의 한계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위로를 대신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위로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시기와 기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참된 위로자 될까요? 바울은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라 합니다.
자비(慈悲), 혹은 긍휼(矜恤)이라는 히브리어는 여자의 자궁(子宮)에서 유래합니다. 자궁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아이가 잘났다 받아들이고 아기가 못났다고 거절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강간범의 씨조차 받아들입니다. 내 정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치욕적이고 분하고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궁은 자비롭습니다. 내 심리는 거절해도 자궁은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아기씨에게 체온을, 양식을, 감성…을 정성껏 공급합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런 자비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궁처럼 받아주시고 품어주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이 제대로 된 위로이며 그러기에 슬픔과 실패한 사람들이 하나님 곁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 쪽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그럴 때에 제대로 된 위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만능 위로자입니다.
고후1:4,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모든 환난은 하나님의 위로가 미치지 못할 고통과 슬픔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위로가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위로의 능력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모든 슬픔을 당장에 위로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픔에는 그냥 슬퍼하게 두는 것이 오히려 위로입니다.
친정집의 위로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친정어머니가 좋은 말로 위로해서 시댁에서 받은 상처가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다시 살아납니까? 친정어머니는 심리학자도 아닙니다. 딸의 속상한 사연을 들으면서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엄마는 그보다 더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또박또박 가르쳐 들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감당 못하냐고 자식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친정어머니는 그냥 들어줍니다. 들으면서 울어줍니다. 그러면 그 분노, 슬픔 원한이 눈이 녹듯 사라집니다. 친정어머니 없는 사람이 왜 서러운지 아시지요? 내 심정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친정어머니는 언니가 다르고 동생과 다르고 내 딸과 다릅니다. 친정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자궁(子宮)입니다. 자비로움입니다. 그 앞에서 딸들이 눈물을 쏟고 분노를 터트리고… 그래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묵묵히 들어주고 함께 울어준 것밖에 없는데 딸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런 것입니다.
최근 위로산업이 뜬다고 합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전화로 말벗을 해주는 유료 서비스도 있고, 팔베개 모양의 베개, 사람 소리에 움직이는 도리도리 인형, 강아지가 방석 위에서 잠자는 모양의 ‘슬리핑 독(sleeping dog)’… 위로산업의 대표적 주자는 반려동물이겠지요.오죽 외롭고 힘들면 이런 게 인기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위로는 짧습니다. 인간의 위로들은 대부분 진통제에 불과할 뿐입니다. 약효가 조금 오래 가고 금세 끝나는 차이일 뿐 진정한 위로는 될 수 없습니다. 위로산업의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병원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가 너무 긴장이 되어 의사 선생님에게 사정합니다.
“선생님, 제가 처음 수술을 하는데요, 너무 긴장이 되어서 죽겠어요. 잘 좀 부탁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환자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의사이지만 수술이 처음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잘 해드릴게요!”
의사가 처음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니까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편히 가지려고 하는데 “저도 처음입니다” 하는 말에 벌떡 일어나고 싶습니다. 뒤에 “제가 최선을 다해 잘 해드릴게요!”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전혀 위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환난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 소개합니다. 겉치레의 위로가 아니라 완전한 위로입니다. 당장 당당은 위로해 주지 않도라도 살아가면서 계속적으로 위로의 마일리지를 쌓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대부분이 위로를 받게됩니다. 늦게 위로가 되는 경우만 제외하고는 완벽한 위로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지는 않고 허구헌날 위로받지 못했다, 주저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27절,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29절,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하나님은 힘을 더해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 힘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위로가 점차 나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게됩니까?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사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고후1:4)라고 합니다. 위로 받은 것을 넘어 위로자가 되라는 거지요! 그래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결론
누구나 살다보면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변곡점(變曲點)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안 좋은 쪽이라면 사는 게 힘들어 집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의 청년 제레미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농부할아버지는 인생이 사는 게 힘든 이유를 소박하게 설명합니다.
“인생이란 커다란 여행이다. 양지(陽地)를 걸을 때도 있고 음지(陰地)를 걸을 때도 있지. 넘어져 봐야 언제 일어설지 알 수 있고, 굶주려 보지 않으면 풍요로움에 감사할 줄 모른단다. 한번씩, 한순간씩 이겨내다 보면 강해진다. 영웅들도 갈림길에서 갈등을 하지.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추는 일은 없단다. 그러니, 사는 게 힘들어도 계속 가라”
사는 게 힘들더라도 계속 가라! 할아버지는 그 말은 제리미에게 사는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위로이자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힘을 공급해 줄테니 계속 가라! 하십니다.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힘들어도 기(氣) 죽지 말고 힘을 내라! 내가 힘을 줄테니 매일 공급되는 새 힘으로 남들을 위로하면서 계속 가라! 하나님은 너무 멋진 위로이며 완벽한 '위로사'입니다. 그 위로사가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대한민국 가운데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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