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9~43절
서론
본문은 예수님 십자가 처형 장면인데, 양쪽에 달린 두 강도 중에 하나는 버림 받고 하나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받은 강도는 십자가에 달린 여섯 시간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는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천국에 입성했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강도는 참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뭔가 손해를 보는 느낌을 갖습니다. 저는 60년 이상을 예수님을 믿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오면서 주일을 지키느라 수고도 했고 십일조생활도 꼬박꼬박 해왔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참석했고 교회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60년이 넘는 믿음생활을 하고 천국에 왔는데 여기 강도출신은 여섯 시간도 제대로 믿지 않아 구원 받았으니 그 점만을 생각하면 좀 억울하다는 생각 듭니다. 강도는 로또가 당첨되었고 우리는 적금을 불입해서 얻어낸 값비싼 구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천국에 들어간 강도가 어떤 질문을 받게 될까, 상상해 보는 것도 우리 믿음을 든든히, 그리고 바로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1. “네가 왜 천국에 오게 되었냐?”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하지요? 천국에 꼭 와야 할 사람이 못 온 것에 놀라고, 저런 인간이 어떻게 천국에 왔을까 놀라고,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천국에 올 수 있음에 또 한 번 놀란답니다. 그만큼 천국은 거룩한 곳이고 영광스런 곳입니다.
“너 같은 사람이 왜 천국에 오게 되었냐?”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네가 거기서 왜 나와?”입니다.
천국에 들어와 얼떨떨해 있는(?) 강도는 이런 질문에 얼마나 놀라고 민망하겠어요? 예수님 잘 믿어서? 잘 믿은 적도 없습니다. 착하게 살아서? 착하게 살았으면 십자가에 박혔겠어요? 율법을 잘 지켜?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물론 선한 일을 찾으라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40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도 조금 전까지 예수님을 비방하다가 지금은 예수님 편에 섭니다. 그래서 함께 달린 강도를 책망합니다. 그래요, 우리도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 교인이면서도 교회 편을 들지 않고 세상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권보다는 인권을 지지하며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교회에 맞서 오히려 세상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죽음 이후를 부탁했습니다. 나를 기억하소서! 기억해 달라, 하니 예수님이 천국에서 기억해 주셨습니다. 좋은 부탁을 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기억되는 여러분이 되세요!
-그는 주어진 챤스를 잘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빠 챤스’가 아니라 십자가 챤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천국 입성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딱 한 가지 답밖에 없습니다.
“죽어서 눈을 떠보니 여기 하늘나라입니다. 그동안 천국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알았어도 믿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제 힘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천국에 올만한 의(義)가 없습니다. 제가 천국에 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용서의 기도 덕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셨고 그것이 내게 효력이 되어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기도 덕분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림 덕분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 피를 내가 보았습니다. 그 피가 나를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덕분에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믿게 해주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입니다.”
강도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는 예수님의 흘리신 십자가의 피를 보았고 용서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영혼을 받아주소서~ 마지막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천국에 오니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가 됩니다. 자기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천국으로 오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입고 입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의 주체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입니다.
18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의 구원은 어떤 노력이나 선행이 가미(加味)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해주신 대속함의 은혜로 우리도 천국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왜 천국에 오게 되었냐?” 물으신다면 우리 대답도 같은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아버지의 긍휼입니다!”
질문2. “내가 왜 너를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첫 질문을 통과하면 주님께서는 다시 물으십니다.
“내가 왜 너를 구원했다고 생각하느냐?”
대학이나 회사에 취업하려면 면접을 봅니다. 이런 면접도 있습니다.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하는지 당신이 우리를 이해시켜 보세요!”
강도에게도 같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답하겠어요? 모르쇠 하겠습니까?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으로 내달라 간청하겠습니까? 강도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그것도 고백이라면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이후에 한 번도 선행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가 보지를 못했으니까요. 그러니
“내가 왜 너를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구원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고 이번에도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천국에는 장소를 채울 숫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다윗, 에녹… 등등 기라성 같은 사람들로 채워놓아도 되는데 왜 강도를 천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천국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열 가지 백 가지도 넘는데 자신이 천국에 입성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은혜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도에게는 드린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도가 그 자리에 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나’ 강도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런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구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는 무궁하시구나’
강도의 자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찬양하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게 자기가 이 자리에 와 있고 싶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답이 없습니다. 그게 천국 재판정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이걸 모르기에 우리가 초창기에는 은혜 중심으로 나가다 믿음생활이 오래될수록 행위 중심이 됩니다. 행위가 나를 구원하고 내게 구원 받을만한 조건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면 교만해지고 점차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가 할 일은 성장보다 은혜의 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집단이고 기독교 동아리에 불과합니다. 은혜만이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한국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의 티끌을 찾아내려는 현미경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허물을 알리려는 확성기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갈수록 냉랭하고 사랑이 없고… 이단들은 사랑으로 뭉치기에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이건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요, 은혜가 꺼져버리면서 생겨나는 교회의 역기능의 결과입니다.
질문3. “무엇하다 왔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우리가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해 상급을 주시려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물음 앞에 강도는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한 일이 있겠지요. 유대 독립운동을 위하다 십자가에 달렸다면 민족을 위해 내놓을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어놓을 일이 없습니다.
무엇하다 왔느냐, 우물쭈물…. 부끄러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놓을 말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지! 하시지만 그에게 줄 상급은 크지 않습니다.
천국은 논공행상이 있습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은 공적의 크고 작음을 가려서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특히 개국공신들을 위한 논공행상이 그렇지요!
천국은 가장 공평한 곳입니다. 천국에서는 영광의 차이가 각각 다릅니다. 지상에서의 믿음생활, 성화의 크기에 근거해서 영광의 상급이 다릅니다. 1년 믿은 사람과 평생 믿은 사람이 같다면 누가 헌신합니까? 교회건축을 위해 전재산을 바친 사람과 한 번도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 사람과 천국에서 같다면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연히 천국에서는 달라야 합니다. 달라야할 때의 그 기준이 바로, 믿음 이후의 행위를 근거로 합니다.
어떤 이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에서 삽니다. 구원은 얻었는데 오래전 대연각 화재가 났을 때 누구는 알몸으로, 누구는 빨간 팬티가 다 보이는 구조를 받았습니다. 자랑할 구원입니까, 부끄러운 구원입니까? 자기 십자가가 없는 구원, 성숙하지 못한 구원, 성화(聖化)되지 못한 구원은 천국에서 상급이 약합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 말해도 되겠습니까?
천국에서는 순교자의 상이 가장 큽니다. 그 다음에 선교사들의 상급입니다. 다음에는… 오래도록 헌신한 사람, 분에 넘치게 봉사한 사람… 등등, 그런 사람들일수록 같은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25:35, 36)
천국에서 상을 받을 이들은 오히려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공을 돌립니다. 그러니 상을 받을만 합니다.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상급을 믿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왜 오랜 훈련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날들을 기약하며 그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뛰는 것입니다. 바울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상(賞) 주시는 이가 계심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한다(히12:6) 합니다.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려면 이 세상의 운동장에서 어떻게 뛰어야 할까요?
미국 새들백교회 릭 웨렌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생애를 이끌어가는 5대 목적을 말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하나님과의 관계
㉡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교회공동체 정신
㉢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도덕적인 수준
㉣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타인을 섬기는 봉사의 삶
㉤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다.-선교적인 사명
이 중에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게 중요합니다. 강도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독립을 위하다 죽는 민족적 의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폭력적 방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지 못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자신을 희생하며 사셨던 예수님은 천국으로 귀환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 최고의 자리, 최고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땅에 사는 동안 항상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송 찬양)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그래요, 무엇하다 왔느냐? 물으실 때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했습니다, 답하면 천국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큰 영화의 상급을 누리며 영생하게 됩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도 3대 질문에 대한 답안지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질문하면 여러분들은 대답해 보시고 설교를 마칩니다.
질문1. “네가 왜 천국에 오게 되었냐?”(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질문2. “내가 왜 너를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질문3. “무엇하다 왔느냐?”(오직 하나님의 기쁨의 되려는 마음으로 살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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