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주일]
영적 다이얼을 재정립하라!
룻기 1장 15~18절
서론
2023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국민일보가 ‘올 한해 목사님의 생활 중 지우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414명 목사님들에게 물었습니다. 1위가 ‘나태한 모습’(29.5%)을 휴지통에 넣고 싶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어 ‘가족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14%), ‘경제적 어려움’(11.4%) ‘육체적 질병’(10.4%) ‘신앙적 슬럼프’(8.9%) ‘악화된 인간관계’(7.5%) ‘불평·불만’(6.3%) ‘감사하지 못한 것’(5.8%)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기타’ 응답에서 목회자들은 ‘번아웃’ ‘설교를 더 잘했어야 하는 마음’ ‘말실수’ ‘전도하지 못한 것’ ‘성도들과 부딪힌 일’… 등을2023년의 무대에서 삭제하고픈 목록으로 꼽았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한 해의 뿌듯한 일은 무엇이며 아쉬운 일, 더 나아가서 2023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윤정은의 힐링 판타지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의 문장처럼“마음의 얼룩을 마법처럼 지워드립니다,” 그런 뭔가가 있다면 어느 것부터 지워버리고 싶은가요?우리는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섰습니다.
대한민국 교수들은 2023년을 마감하는 사자성어를 ‘견리망의(見利忘義)’로 정했습니다. (눈앞의)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라는 뜻의 ‘견리망의’를 선정한 교수들은 “정치란 본래 국민들을 '바르게(政=正) 다스려 이끈다'는 뜻인데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바르게 이끌기보다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 같다”며 그러다보니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된 것 같다”며 고 비판했습니다. 교수들은 “견리망의 하면 우선은 풍요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공멸하게 된다”며 “견리망의”가 아니라 “견리사의”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견리사의는 논어에서 유래된 말로 “이익을 보면 올바름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제 소견대로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가 제 살길을 도모함’)의 길을 걷다 망한 사람이 나옵니다. 신앙에서 각자도생은 주파수를 각자가 임의대로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은 상황 주파수에 맞춥니다.
엘리멜렉은 2절,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엘리멜렉은 유대 땅 베들레헴출신입니다. 베들레헴은 옛적부터 왕들의 탄생지로 예고되었으니 엘리멜렉은 약속의 땅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엘리멜릭 집사님인지 장로님인지… 요즘이었다면 분명 중직자들일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 ‘멜렉’은 ‘왕’…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왕이시다’ 뜻입니다. 왕은 주인이여 통치자요 결정권자요 생사를 주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왕이어야 하지만 그는 선택권과 주재권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자신이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위기였습니다. 룻기는 바로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앞 장 사사기 21장 25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면서 신신당부, 부탁을 합니다.
신명기 12: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지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자기 소견대로 행했고 엘리멜렉도 그런 분위기를 따른 것입니다. 부인 나오미의 이름이 ‘희락’인 것으로 보아 집안이 무척이나 행복하고 먹고 살만한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1절 흉년을 맞았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시험을 주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기근을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창12:10). 그가 부르심을 받은 땅은 가나안이지 애굽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근이 얼마나 심하게 들었는지 대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여쭤보지도 않고 부름을 받지 않는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견이 아니라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그리 한 것입니다. 자기 소견은 자기 결정권을 말합니다. 모압행을 결정하는 데 하나님이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믿음생활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영적인 각자도생으로 신앙 포기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이지요.
모압은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곳입니다(신23:3).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흐리게 했던 곳입니다. 여기로 이주했다는 것은 믿음의 계기판에 고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얻은 것은 요즘말로, 장로님 권사님 부부(?)의 영적계기판의 낮은 수치를 보여줍니다.
윌로우크릭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는 삶을 통제하는 운전석엔 세 계기판이 놓여 있다 합니다.
*육체적 계기판-과로나 무리는 육체의 계기판을 계속 올라가게 하다 터져 버립니다.
*영적 계기판-믿음이 떨어지다 영적인 면이 부실하게 되면 믿음이 파산됩니다.
*감정적 계기판-감정은 어느 정도까지 가면 터져 버리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착한 사람이 한번 화났다 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엘리멜렉의 영적 계기판은 계속 낮은 수치를 가리켰지만 이를 무시하면서 살자 결국은…
3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5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베들레헴의 신자라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 다이얼을 맞추며 인내하며 견디어야 했는데 모압에 다이얼을 맞추고 말았습니다. 왕되신 하나님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데 세상에 맞추었으니 인생 파탄입니다. 영적계기판의 고장으로 인생의 주파수가 하나님과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멸입니다.
엘리멜렉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우상신들과 상황이라는 주파수에 다이얼을 맞추었기에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내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행복했던 가정이 왜 이리 불행의 소리로 가득 찬 환경이 되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야 하는데 상황이라는 줖차수! 애굽방송이 주는 주파수에 다이얼을 맞추었다가 인생을 망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상황주파수에 맞추었다면 나오미는 남편 주파수에 맞춥니다.
엘리멜렉은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부양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만 가득 찼지, 그래서 처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만 했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의 대상에 놓지 않았습니다. 모압 땅에서 살려면 처가덕분도 보아야 하고… 그래서 모압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나오미 역시 처음에는 남편에게 주파수를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아들들이 죽어가는 데에도 남편 다이얼을 고집했습니다. 모두 죽게 되었을 때야 나오미는 바른 진단을 내리게 됩니다.
“아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구나! 이 상황을 주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구나!”
나오미는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에게 다이얼을 돌리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왔습니다. 꼴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하나님과 계속 다이얼을 맞추고 율법과 다이얼을 맞춥니다. 그러자 제대로 소리가 들려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땅을 버리다니… 율법은 이방인들과 결혼을 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특히 모압과는 함께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압에서 율법에 걸리는 조항으로 살았습니다. 세 남자들의 죽음은 틀림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징계의 막대기였을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어떤가요? 그제야 자신의 자리를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환경이 나빠서? 운이 나빠서? 모압의 경기가 나빠서?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이얼을 맞추지 못하면서 잡음(雜音)이 나오고 인생이 망가져 버렸음을 알았습니다.
나오미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합니다. 문제 해결에는 진단이 정확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병을 고치려면 우선 진단초기부터 정확해야 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데 감기약만 주고 위장약만 준다면 문제는 갈수록 심각합니다. 진단이 정확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비로소 모압에서의 환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로부터 왔기에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회개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고국으로 돌아간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다이얼을 동족에게로 맞추었습니다. 동족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그녀를 맞아주었지만 그 자체가 소망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교수들의 신문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매해 연말 사자성어를 선정합니다. 첫해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당동벌이(黨同伐異)… 등입니다. 특히 ‘당동벌이’는, ‘같은 파끼리 당(黨)을 만들고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다른 파는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2004년의 사자성어였고 10년이 지나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그릇된 끼리끼리가 국가 동력(動力)을 떨어뜨렸고 국가경쟁력을 추락시켰습니다. 당파끼리만 다이얼을 맞추니 결국 ‘당동벌이’가 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주파수를 찾아가며 서서히 다이얼을 이리도 돌리고 저리도 돌리면서 하나님과 율법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아니라 행복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을 세상에 전하는 축복 받은 여인이 됩니다. 다이얼을 제대로 돌려서 인생의 반전입니다!
여기 제대로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춘 사람이 있습니다.
모압 태생 룻은 세상과 다이얼을 맞춘 여인입니다. 하나님도 몰랐고 이스라엘도 몰랐다가 유대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불행하게 끝나자 자신의 운명도 불행하게 끝나고 불행의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룻은 시댁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여호와 종교, 복음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생애와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간섭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다이얼을 사람에게 맞추지 않았습니다. 동서 오르바는 시모에게 맞추었습니다. 시모가 떠나라 하자 울면서 떠났습니다. 오르바도 좋은 여인이었지만 사람 이상에게 다이얼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인정은 있었지만 복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룻기를 효도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그 이상의 책입니다. 룻이 시모를 떠나지 않는 것은 단지 며느리의 책임감, 신분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잘못된 상황에서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한 성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시모를 따라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하나님과 다이얼을 맞춘 것입니다. 그녀는 율법과 다이얼을 맞추었습니다. 율법에는 어떤 조항이 있었는가? 젊은 여인이 자식이 없이 남편을 일찍 잃게 되면 형제 중에 누가 대신 자식을 낳게 해줍니다. 만약에 형제가 없다면 근족 중의 누가 자식을 잇게 해줍니다. 이것이 계대법입니다.
이런 계대법의 절차를 밟아 가다보니 근족 중에 보아스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유력한 자’입니다. 부호, 지도자, 신앙인, 인격자…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남자가 라합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입니다. 이방인입니다. 기생이라는 것은 도덕적이지는 않습니다. 룻은 혈통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게 두 사람 처음 만나는 순간,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서로에게 다이얼을 맞추었습니다. 당연히 먼저 하나님에게 다이얼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연스럽게 법적으로 정당하게 맺어지고 아이가 생깁니다. 그 아이가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입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노래합니다. 룻이 노래합니다. 보아스가 노래합니다. 아름다운 음악들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에게 주파수를 맞춘 생애는 새드엔딩이지만 하나님에 맞추자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살아가는 힘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다이얼을 맞추느냐로 삶이 달라집니다. 음악방송을 맞추면 음악방송이 나옵니다. 교통방송에 다이얼을 맞추면 교통안내가 나오고 기독교방송에 맞추면 말씀과 찬양이 나옵니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불평의 방송 다이얼에 맞추면 불평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 다이얼을 어디에 맞추어 있습니까? 교회의 다이얼을 넘어서야 합니다. 목사라는 다이얼을 넘어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여러분이 알고 듣고 있는 것처럼, 아주 건강한 공동체는 아닙니다. 거기에 맞추지 마세요! 하나님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과 다이얼을 맞추니 사람들의 문제도, 인생의 문제도 해결되더라는 것입니다.
결론
고대 국가 중 하나인 미케네에 아가맴논 왕이 있었습니다. 왕비를 사랑했지만 왕비는 남매를 낳고 간부와 눈이 맞아서 남편을 살해합니다. 딸인 엘렉트라는 동생을 외국으로 피신시키고 자기는 모진 박해를 받아가며 살아갑니다. 괴로울 때 힘들 때 아버지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나올 때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지나간 슬픔에 새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
그런 각오로 결국 그는 아버지의 나라를 정부의 손에서 빼앗고 동생을 왕으로 세웁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작품 ‘엘렉트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되감기 버튼을 눌러서 자꾸만 과거를 되감으려 하지 말라. 이건 인생이지, 영화가 아니다.” 페기 토니 호튼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2023년도의 눈물은 이곳에 놓아두고 갑시다. 2024년에는 새로운 눈물이 필요합니다. 새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감동의 눈물이었으면 합니다. 불평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을 더 많이 흘렸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고 하나님방송에 다이얼을 돌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에도 멋진 방송! 아름다운 노래의 음악방송이 들릴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제 설교를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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