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가 많이 아프다!
사도행전 2:43~47
서론
성도님들! 어떻게 지내십니까? 인디언 속담에 “가장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부모님 살아계실 때 그 소중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정작 세상 떠나 옆에 없을 때에야 내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었는가를 알고 눈물을 흘립니다.
주일도 그래요! 그동안 주일이 소중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소중한 것인 줄을 실감하는 데는 두 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 안절부절입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말입니다. 두 주간을 보지 못하니 여러분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내 목회의 기쁨이었구나, 행복이었구나, 목표였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지난주일, 예배드리고 나니, 어느 분이 그래요! 예배를 인도하면서 목사님이 울컥~ 할까봐 마음 졸였다고요! 마음으로야 열 번 스무 번 울컥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 최고의 지성(知性)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강할 때입니다” 지금은 강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감성이 움직일 때가 아니라 이성이 음직일 때입니다.
종교개혁가이면서 최고의 신학자 칼빈은, 대작 <기독교강요>에서 “신자에게 교회란 어머니와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교회를 어머니 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어머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공공의 적’이 되고 대통령은 교회를 겨냥해서 쓴소리를 합니다.
물론 코로나19 예방을 최대의 통치업적으로 홍보하고 있고 코로나 확진에 불씨가 된 몇몇 교회가 밉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의 입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 세상 사람들은 언론에 나온 그 몇 줄만을 가지고 6만 한국교회를 그리 바라보고, 한국교회 역시 우리는 열심히 잘 해왔는데… 하는 말로 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죽했으면 소강석 목사님이 대통령에게 좀 더 ‘따뜻한 언어로 교회를 아우를 것’ 건의했겠습니까?
그래요~ 지금 한국교회라는 어머니는 세상의 비난이 되고 있습니다. 확진자가 많이 나온 교회 주변의 식당에 <당분간 기독교인은 안 받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정말 자존심이 상합니다.
어머니와 같은 한국교회가 지금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상처투성이입니다. 자식들의 잘못으로 어머니가 되는 교회가 돌맹이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니 자식들이 직장에서 사무실에서 눈치 보고 자식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니 교회가 공격을 받고 어머니는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교회를 버려야 합니까? 교회를 떠나 교회의 자식이 아닌 것처럼 행세해야 합니까? 시편 1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세월은 다르지만 다윗이 당했던 현실이나 교회가 비난의 대상! 공격의 대상이 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럴 때 교인들은 어찌해야 할까?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각자가 제 살길을 도모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찌했습니까? 그들이 당한 상황은 오늘의 시련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파괴하는 이단이라 정죄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신자가 되면 유대교에서 추방당하고 호적에서 제명하고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당시 죄인은, 매국노로 치부되는 세리들과 창기들입니다. 세리들은 혼을 팔았고 창기들은 순결을 파는 죄인들입니다.
로마정부에 신흥종교 기독교는 불순 종교세력입니다.
로마제국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면 깨끗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추종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외쳤고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많아져 갔습니다. 이들은,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함께 했습니다.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면 정체가 들통 납니다. 이름과 직업과 고향… 모든 신상이 털렸지만 로마제국도 두려워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파문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맛보았기 때문이지요!
43절,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공동체 모임에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체험신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개인에게 임하는 것보다는 공동체에 임합니다. 성령의 강림도 120여명이 모여 있는 곳이고 부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도 10번 이상이 되는데 초창기에는 개인에게 나타나시지만 대부분 여러 명이 있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입니다. 성령이 뜨겁게 임하기 때문이지요!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런 사람들이 목숨이 그리 아깝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당함에 기뻤습니다.
46절,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박해의 대상이 되어도 신분을 노출하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혼자 있으면 성전은 되어도 교회의 구성원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총회’(總會), ‘여호와의 총회’(신 23:3)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불러주신 민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그 회중이 ‘총회’였습니다. 여기에서의 총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지, 그 의미에 건물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온 민족 중에서 빼낸 회중이며, 성도이며 총회원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진실하게 따르며,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무리들을 ‘교회’라 부른 이후에, 교회는 신앙고백을 하는 무리들의 모임을 뜻하게 됩니다. 바울이 교회라 부를 때에는 언제나 사람들입니다. 지역권에 있는 무리들(갈 1:2), 가정에 모여 정기적으로, 수시로 예배드리는 무리들(고전 16:19),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우들이 바로 교회 자체였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교회란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을 받은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건물이 없을지라도 구원받은 성도가 있는 곳이면 성도 자체가 교회요, 성도들이 여럿 모여 예배드릴 때 역시 교회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총회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고 신약에서 교회는 믿음의 한 가족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가족이 자주 모이고 모임을 가질 구성원들은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기본 교회관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생각합니다. 친정집 어머니 말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0집사님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내용인즉, 친구 0권사가 “주일만 바라보고 사는데 나는 어디로 가냐?” 해서 “너는 받은 은혜로 일주일을 살지만 나는 하루하루 사는데 어쩌냐…” 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런 분들은 교회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분들입니다. 남들이 교회를 욕해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을 일을 해도 교회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친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아픔을 내 탓으로 알고 더 회개합니다.
이에 비해, 무교회주의자들은 외적인 형태의 예배당이나 교회의 제도, 의식, 전례, 신조 등…, 교회의 모든 외적 형식을 거부합니다. 조직을 만들고 시스템을 작동하다보니 부패하게 되고 모임이 오염되더라는 것입니다. '퀘이커 파'가 무교회주의 교단입니다.
이런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를 공격만 했지 한 번도 기독교 역사에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고 겨우 간헐적으로 이어왔을 뿐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와 그의 문하생들. 한국에서는 김교신, 함석헌, 유달영…등이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개인들의 신앙은 좋았지만 교회개념을 약화시킴으로 기독교 신앙보다는 기독교 사상으로 빠져버리고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관이라면 왜 사라졌겠습니까?
이들과는 또 다르게 ‘가나안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마디로 교회가 싫다는 것입니다. 교회조직이 싫고 교회공동체가 싫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가견적 교회를 부정합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나름대로 조직과 모임을 갖는데 가나안교인들은 나 홀로 믿음생활입니다.
물론 교회는 결코 완전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성원이기에 교회는 늘 죄로 오염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완전(完全)한 교회만을 주장하며, 교회를 배격하려 한다면 이것은 오만일 뿐입니다.
“완전한 교회를 찾지 마라. 이 땅에서는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설령 찾아낸다 하여도 당신은 그 교회의 교인이 될 자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웰즈)
며칠 전 국민일보에 고양시의 아무개교회 기사가 나왔습니다. 네 명의 목사가 60여평 규모의 상가를 얻어 공동으로 목회해 왔는데 코로나가 시작된 2월부터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 이번에 임차계약이 마무리되는 대로 50여명 17가정의 성도에게 각 가정당 매달 30만원씩 기본소득을 나눌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당이 없이 온라인 교회화(化)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중요한 건 ‘어디서 예배드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드리는지’입니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상당히 신선해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는 사회복지단체가 아닙니다. 지난 세월, 한국교회 교인들은 한 시간씩 다섯 시간씩 걸어 예배당에 나갔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위해 한 시간, 돌아오며 또 한 시간 걸렸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도 옳지만 ‘어디서’ 예배드리는 지도 중요합니다. 공교육이 엉망이라고 학교를 부정하고 홈스쿨링만 하면 나라가 어찌되겠습니까? 주일학교가 제대로 제 임무를 못하니 안 보내겠다고요? 그렇다면 집에서 제대로 주일학교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울타리요 목사들을 비롯한 사역자들은 목자요 목동입니다. 들에 울타리가 없으면 어찌되겠습니까? 목자가 없으면 어찌되겠습니까? 같은 결손가정이라도 아버지 혼자 키우는 자녀들은 좀 힘들어요! 어머니 혼자 키우는 자식들은 잘 큽니다. 돌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이단에서! 세속에서! 잘못된 성경지식에서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목회자들이 있어 돌봐주고 영적 관리를 해줍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 중심의 믿음이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큰 나무를 죽이는 방법이 간단합니다. 도끼로 찍으면 힘듭니다. 사방으로 껍질을 벗겨 버리면 1년만 지나면 시들어 말라 죽습니다. 껍질을 통해 수액이 전달되는데 그게 안 되니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고 예배가 그렇습니다. 공적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믿음은 있으되 기쁨이 없고 성령 충만이 약화됩니다.
교회는 성령의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내 불이 꺼지고 있으면 예배에 참석해서 불이 붙은 사람들에게서 불을 붙입니다. 꺼진 사람들에게는 내가 나눠줍니다. 혼자 있으면 아무리 불붙어 있는 나무도 꺼져버립니다. 그러니 교회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믿음의 공동체요,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비대면예배, 온라인예배는 정상이 아닙니다. 자칫 사단에게 이용당합니다. 그러니 다시 예배당예배가 속개되기를 고대하고 공동체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비대면예배는 형식은 갖추지만 능력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공동체 예배만이 힘을 갖습니다. 이것이 어머니로서의 교회가 갖고 있는 힘입니다! 그 힘 밖으로 나가면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해도 시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 모여야 합니다. 서로 상처 받더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로 힘을 공급받고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지금 교회가 많이 아픕니다.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은 “교회가 미안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교회도 많이 아픕니다. 예배가 중지되어버린 교회가 얼마나 아픕니까? 어떤 건물도 한 달만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면 곰팡이냄새가 나고 거미줄이 쳐집니다. 예배가 없는 교회가 얼마나 처량하고 냄새가 나겠습니까?
우리는 아픈 교회를 포기하지 맙시다! 아픈 어머니와 같은 교회에 등을 돌리지 맙시다! 어머니로서의 교회가 갖고 있는 능력!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맙시다! 한국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었다 해도 교회만이 갖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기대하면서 비판과 실망보다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 위대한 곳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나의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내 어머니요 젖줄이요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개선해서 다시 시작한다면…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는 다시 한 번 더 대한민국의 희망이 되며 대안이 될 것입니다. 한 주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들을 두루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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