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까?
예레미야애가 3:24~29
서론
요즘 대중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희망가’라는 노래입니다. 일제 때부터 부르던 노래였고 몇몇 가수들도 종종 불렀는데 요즘에 와서 미스터트롯 김호중씨, 초등학교 6학년 정동원이 불러 더욱 유명해진 노래입니다.
(노래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사실 ‘희망가’의 원곡은 미국인 제레미아 잉갈스(Jeremiah Ingalls)가 영국의 춤곡을 바탕으로 1835년 만든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When we arrive at home)’라는 찬송가입니다. 이게 일본으로 넘어오면서 진혼곡(鎭魂曲), 위령곡으로 개사됩니다. 1910년 1월 23일 일본에서 강을 건너던 배가 뒤집혀 여학생 12명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여교사 미스미 스즈코(三角錫子)가 미국 찬송가를 개사하여 위령곡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걸 일제치하에 임학천이 부흥성가로 개사하고 유명한 성결교 부흥사 이성봉 목사가 애창합니다.
(노래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부흥성가는 이성봉 목사가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래요! 제가 부흥성가는 흥겹게 불렀지만 성도님들이 없는 공간을 보며 설교하려니 마음이 그래요!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지요? 살다보니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난 겁니다. <네이버>에 누가 물어요! 이풍진 세상을 만났다는데 이풍진씨가 누군데요? 이렇게라도 웃읍시다!
오늘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이런 날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예배를 사수했는데 결국은 예배를 지켜내지 못하고 소위 비대면예배로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비대면 예배는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단어입니다. 비대면예배로 여러분들은 영상 예배로, 장로님들은 저와 함께 예배당에서 대면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냥 낭독)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인가…”
요즘 우리 상황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부흥성가 같아요!
풍진((風塵)은 바람 풍(風), 티끌 진(塵), 바람에 나는 티끌이라는 말입니다. 풍진(風塵)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의학적 의미-풍진은 풍진 바이러스(Rubella virus) 감염에 의한 급성 발열성 질환입니다. 요즘 바이러스와 꼭 같은 것입니다.
군사적 의미-전쟁터에서 화살이 날아가고 창과 창이 칼과 칼이 부딪치고 요즘에는 총알과 대포가 날아나가는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분위기가 풍진입니다. 병진(兵塵)인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 의미로는 바람 풍(風), 티끌 진(塵), 바람에 티끌이 날린다, 그 말은 뭐가 되겠어요! 한마디로,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의 희망이 뭐냐, 이 풍진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라는 말은 어수선한 이 세상에 티끌이 바람에 불 듯이 우리의 희망이 티끌이 되어버리고 삶이 흔들리고 티끌이 되어 정처 없이 날아가 버리는 때에 과연 희망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분위기를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한 단어에 담아낼 수 있을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이런 날을 맞을 줄 몰랐습니다. 한국교회 역사 135년에 예배 중단, 소위 대면예배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일제치하에서, 6.25전쟁의 와중에서 어떤 교회는 자발적으로 예배를 중단하고 어떤 교회는 강압적으로 예배당 문을 닫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한국교회 전체가 이렇게 공권력에 의해 문을 닫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예배를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조심하고 몸부림쳤습니까? 예배의 선택권이 있을 때 다수의 교회가 예배를 포기했을 때도 우리는 예배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는 우리의 생명이고 영혼의 젖줄이었기에 다른 어떤 것들은 다 희생하고 포기해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는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예배를 사수해 왔습니다.
예배를 중단하지 않으려고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이 얼마나 애썼습니까? 장로님들은 토요일에, 안수집사님들은 2부예배 후에 소독방역을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짧은 헌신보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헌신, 얼마나 힘든 봉사입니까? 왜 우리 장로님들이 토요일마다 방역하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안수집사님들이 소독을 하고 방역을 하고 왜 그렇겠어요? 우리 자신들의 청결을 위해서? 예배당을 잘 보존하려고?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모두가 예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방역에 실패해서 확진자가 생겼을 때에 우리교회 예배가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힘들어도 예배를 지키기 위해 불편을 감수했고 마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오늘까지 예배를 지켜왔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예배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권력에 의해 서울시내에 있는 교회들, 수도권의 교회들은 전부 다 예배를 중단하게 된 것입니다.
제 목회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문득문득 공산화가 된다면 끝까지 신앙을 사수할 각오를 해오지 않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이 풍신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어지럽고 어수선한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우리 믿음을 지켜내야 합니까?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풍진 세상을 만났습니다. 바벨론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읍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읍 주민들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레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읍을 바라보면서 비통한 마음으로 슬피 노래한 것이 바로 애가입니다. 슬픈 노래 탄식의 노래입니다.
1: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종교의 중심, 정치의 중심이었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예루살렘이 이제 적막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이런 적막함 가운데 있습니다.
4절,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도로가 한산하고 예배당 마당이 적막해요. 그러니 제사장들이 탄식합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하는데 기도가 안 나와요! 가슴이 답답한게 눈물도 나오지 않아요. 기도로 한다는 말이 하나님 어째 이런 일이…? 오늘 주일인데… 오늘 성도님들을 만나는 날인데… 한 주간 내내 기다리던 성도님들 만나 예배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는 날인데 예배가 없고 성도님들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 울적한 거예요! 내 마음의 행복충전소가 우리 늘빛교회이고 성도님인데 만날 수가 없으니… 너무 답답한 겁니다.
6절,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가 당하고 있는 ‘이 풍진’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 풍진 세상’을 만났습니다. 3장입니다.
1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
3절,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절,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절,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8절,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우리가 예배를 지켜 달라, 예배가 단절되지 않도록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기가 막힌 현실 앞에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고 빌미를 제공한 전아무개 목사님을 탓해야 합니까? 탓해야 되겠지요. 빌미는 그분에게서 비롯되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를 빌미로 모든 교회의 예배를 중단시키는 정부에 대해서 우리가 좋은 마음만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한국교회가 그동안 애쓰고 수고했던 것들을 정부는 너무 몰라주는 것입니다. 확진자가 나오면 그 교회만 문을 닫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몇몇 한정식 음식점에서 대량 확진자가 나왔다 해서 서울시내의 모든 한정식을 문 닫게 하지는 않습니다. 몇 개의 중국집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왔다고 중국집을 모두 문 닫게 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학교에 확진자가 나왔다고 해서 서울 시내의 모든 학교를 문을 닫을 겁니까?
왜 교회만 그럽니까? 물론 사랑제일교회는 엄청난, 신천지보다 다 많은 확진자가 나온 것만은 틀림없어요! 비난도 받아야 하지요! 그러나 그건 그 교회의 특수상황이지 나머지 교회는 방역방침에 얼마나 수고했고 손해를 감수했습니까? 우리가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우리는 교회들에서 확진자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고 미안하고 그래서 우리만큼이라도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또한 예배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한 가운데 예배를 지켜왔고 정부의 방침에 순응해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부는 교회도 선별할 수는 없었을까요. 확진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그 교회는 예배를 중지하는 행정명령을 통해 교회는 교회대로 조심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교회와 각(角)을 세우지 말고 교회도 좀 세워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가 대한민국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해왔고 또 하고 있는데…. 그러나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 칼에 예배를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신천지집단으로 매도해 버리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부를 원망하고 탓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우리가 빌미를 주었으니까 할 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고 우리 마음에 아쉬움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 한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 원망과 탄식이고 호소이고 독백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상황에 티끌에 앉은 심정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하나님께서는 입을 다물라 하십니다. 누가 잘못이냐, 누구 때문이냐? 원인을 찾느라 기진맥진하지 말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내라는 것입니다.
28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지금은 입을 열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은 누구 책임이다, 누가 이런 일들을 일어나게 했는가, 아무개 목사 아무개 교회… 정부의 공권력에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라! 한국교회에 입을 다물라, 하십니다. 왜냐?
28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주님께서 이 상황을 만들어 냈던지 허용하셨든지 아무개교회가 너희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동기가 되었든 정부가 행정 명령을 내렸다 해도 오늘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라는 상황을 만들어 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23절, 새벽마다 묵상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런 멍에를 매게 하셨나, 왜 예배 중단을 내리게 하셨는지…’ 깊이 성찰들을 하면서 하나님의 본심을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
33절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가 그냥 예배를 못 드리게 하고 우리가 미워서 예배 중단이라는 무거운 짐을 매개하신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29절,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입을 다물고! 그 잘 난 입, 남을 비난하던 입, 험담하던 입, 너무 쉽게 거짓을 말하던 입, 스스로 자랑을 일삼던 그 입을 티끌에 대라! 그 입을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잘못이라는 탓을 하지 말고 그 입을 다물고 이제는 네가 당하고 있는 상황에 너희가 내게 어떻게 했는지, 예루살렘의 종교가 내게 어떻게 대했는지 그걸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본심, 메시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형식적인 예배, 교인들끼리 사랑하지 못했던 것, 신앙과 생활의 괴리,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삶은 아무리 열심을 내고 성전을 드나든다 해도 하나님 눈에, 하나님의 성에 안 찬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누가 제발 내 성전 문을 닫게 해달라고”는하나님의 심정을 대언한 바가 있습니다(말1:10). 솔로몬의 성전에 영광으로 임재하던 그 분이 이제는 왜 성전 문을 닫으라 하십니까?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누구의 죄를 탓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독이던 그 입술을 티끌에 대고 입을 다물어야합니다. 이 상황의 짐을 메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생각 앞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고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40절,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2절, “우리가 범죄함과…”
우리 속에 있는 부정함과 죄의 찌기들, 죄의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를 가혹하게 대하는 면도 있습니다. 지금 사방팔방으로 벌떼처럼 공격하고 있잖아요? 지금 어디 가서 교인이라면 이상한 눈짓으로 봅니다. 회사에서도 예배참석 체크한다지요? 학생들은 교회에 다녀왔는지 명단을 파악한답니다. 결혼식도 제대로 못하는 분들에게도 미안합니다. 교회승합차를 타고 음식점에 갔더니 ‘교회서 왔네!’ 수군거립니다. 다 들려요!
그런 말을 들으면 참 미안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교회를 떠날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으로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이 모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우리를 위해 멸시를 당했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이런 핍박을 보았나요?
우리 언제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아 보았나요? 믿음의 선진들처럼 핍박을 받아 보았나요? 공산치하에서 핍박을 당하는 그분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편하게 믿음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우리의 살아온 신앙생활은 유람선을 타고 교회를 다닌 것이지요!
이참에 우리도 주님을 위해 핍박을 좀 받으면 어때요! 이만큼이라도 핍박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인가료?
“주님!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평생 주님을 위해 핍박을 제대로 한번 받지 못했는데 이번에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겠습니다. 주를 위해 핍박을 받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입을 다물고 입술을 티끌에 대고 짐을 메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그 하나님의 본심이 인생으로 고생하게 아님을 알게 될 때에 :너희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오히려 이 바닥에서 희망이 옵니다. 바닥을 차고 튀어 오르는 이 믿음이 우리를 거룩하게 정결하게 새롭게 합니다. 한국교회가 코로나 이후에 더 정화되고 정결하게 된다면, 위기이면서도 기회가 된다는 기대감을 우리가 붙들고 예배를 사모하는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믿음의 선배였던 다윗이 인생의 고난 가운데 이렇게 주님을 갈망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다윗의 고백을 우리도 하면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세월, 이 풍진 세상을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 더 단단한 믿음으로 세워지고 더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한국교회로 일어나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희망과 대안이 되는 교회로 나아갑시다. 이제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그런 교회를 기대하면서 견디고 기도하고 서로 힘을 모으고 교회와 예배당을 사랑하며 함께 더 큰 믿음과 희망으로 나가도록 합시다.
여러분이 함께 있어 든든하고 마음에 크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설교 끝나고 나면 이성봉 목사님이 애창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들려주고 축도로 마칩니다. 노래는 유튜브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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