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불, 다른 제사
레위기 10장 1~7절
서론
우리교회에서 믿음이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교회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교회에서 늘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저를 지목한다면, 그건 예배가 주는 축복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제가 예배를 가장 많이 드리고 꼬박꼬박 예배에 참석하되 늦는 일도 없고 조는 일도 없고 바쁜 일이라고 중간에 나가는 일도 없습니다. 예배만큼은 제가 우리교회에서 1등(?)입니다. 예배가 주는 선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귀한 축복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늘로 오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임재 안에서 머물며 기뻐하고 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배가 끝나고 하강할 때면 이제까지 내가 땅에 두고 왔던 문제들이 정말 작고 제한적인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영광이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의 힘이요 유익입니다.
토미 테니는 이런 예배를 사모하고 “하나님 당신을 예배합니다!” 라는 책을 씁니다. 이런 예배를 갈망하며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공중부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하고 힘을 얻는 약(藥)이 되기도 하지만 독(毒)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예배는 믿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불평과 불만으로 채웁니다. 설교를 듣다가 걸리는 구절에 분노합니다. 교회 분쟁이 일어났을 때 예배당에서 교육관에서 각각 예배합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사실 하나님없는 예배를 드립니다. 상대편을 저주하고 조롱하고 증오합니다. 이런 예배들은 독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들에게 제사, 예배는 독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 아들이고 장남차남 대제사장 세습 순위 0순위요 1위 자리입니다. 그 제사가 얼마나 힘이 되며 영광입니까? 그러나 두 제사장은 향불을 올리다 그 자리에서 즉사(卽死)합니다. 2절, 불이… 그들을 삼키매… 즉사합니다.
6절, 치신 불로…
그들의 예배 행위에서 임한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천(天)불이요, 천벌(天罰)이 됩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런 불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제사장은 예배의 유익은커녕 예배 때문에 즉사했고 부모는 슬퍼합니다. 예배가 그들을 망친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려오는 좋은 불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설립될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은 예배를 통해 성령의 불을 받습니다. 성령의 불이 달아오르게 했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고 하찮게 보였습니다. 예배를 통해 눈은 달라졌고 큰 사람이 됩니다. 크면 어릴 때의 운동장도 작게 보이듯이 큰 사람이 되니 크게 보였던 세상의 문제도 권력도 핍박도 작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연했고 담대해졌습니다.
예배는 불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성령의 불을 받으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시선의 고도를 높여줍니다. 그래서 세상이 작게 보이고 나 자신이 죽어지는 포기의 체험이 일어나는 시점에 예배는 은혜의 창공으로 비상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배가 우리들을 창공으로 띄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창공, 환희의 창공으로 오르지 못하고 오히려 뜨자마자 공중에서 폭발해 버립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기쁨이 죽고 은혜가 죽고 열정이 죽습니다. 아니면, 활주로에서만 빙빙 돌다가 가거나 공항에 그냥 정지해 있는 믿음의 비행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우리의 예배가 불을 받는 예배가 되지 못하고 활주로에 정지되어 있는, 아니면 불을 받기는 해도 엉금엉금 활주로를 기어 다니는 비행기의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까? 왜 그럴까요?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예배 제사가 하나님께서 솟아오르지 못하고 오히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폭발해 버리듯이 제사를 드리다 불에 삼키운바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1절,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사역 중의 하나가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에서 아침과 저녁마다 새로이 향을 사르며 기도를 합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불씨는 번제단에서 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 불똥 그릇(출 25:38)입니다. 꼭 번제단의 불로만 분향단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냥으로 그어대거나 아무 불이라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꼭 번제단에 피어오르는 불로 여호와께 분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번제단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불로 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제사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론의 제사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름으로 명명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불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드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예배했습니다. 다른 불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게르심산에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정열적이고 뜨거웠습니다. 그야말로 불로! 불로! 불로 충만한, 감정으로 충만한, 열정으로 충만한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제단은 무너졌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게르심산에서 예배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그런가요? 불로! 불로! 뜨거웠는데요! 불과 같은 뜨거운 예배였는데요! 그들은 다른 불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지 않는 다른 불입니다. 원칙에서 벗어난 뜨거움은 반칙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불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하십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진리의 예배라 번역합니다. 진리의 예배! 그것은 다른 분이 불이 아니라 바른 불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가 무엇이며 진정한 제사장이 누구며 어떤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인가, 그것을 제대로 알고 드리는 것이 진정의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고 대제사장의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불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사역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 그것은 바른 불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라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의 그 어떤 중매자도 바른 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다른 불입니다. 이를 바울은 ‘다른 복음’으로 표현합니다.
한국교회에 다른 불들이 너무 많습니다. 뜨겁다고 그걸 하나님께로부터 온 불이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서 오신 성령의 뜨거운 불입니다, 죄를 사하는 불이 됩니다. 이런 불로 드릴 때 그 예배는 우리를 창공으로 날아오르게 합니다. 세상 문제가 하찮게 보이고 세상 영광이 하찮게 보입니다. 그것이 예배의 약(藥)이요 유익입니다.
2. 다른 마음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여기서 신령을, 개역개정 번역은, ‘영으로’라고 합니다.
예배의 대상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예배하는 자들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멋진 복장을 보고 화려한 찬양대의 기교를 보고 비싼 악기들을 보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봅니다. 대형교회들은 잘 짜여인 예배 매뉴얼로 그 자체가 완벽한 쇼프로그램입니다. 사람들은 잘 짜여진 예배 컨셉에 홀리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은 온갖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요 일편단심의 마음이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몰입하고 전심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전심(全心)의 마음, 성심(誠心)의 마음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불을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성심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제사장 직무를 감당했다면 어찌 바른 불인지 다른 불인지 분간을 못했겠어요?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 대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이어 대제사장의 반열에 오를 것이며 아비후는 수석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제사장직분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지 수없이 교육받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신정국가요 제사장나라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핵심은 종교이고 그 핵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번제단의 불을 놔두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적이 없는 다른 불로 드렸다가 즉사하는 그 사달을 당한 것입니까?
성경학자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합니다. 불상사가 있고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합니다.
9절,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죽음을 면하리라.
너희도… 그 말은 죽은 두 사람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고 취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독주는 독한 술로 완전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취하게 하는 술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때는 절대로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맑은 정신으로 사태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백성들을 잘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케 하여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추악한 육적 본성을 드러내게 하여 범죄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두 제사장 아들은 어디에서 독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불을 가지다 분향단에 불을 붙였습니다. 자기 기분에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전심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기대했던 그 마음이 아니라 다른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은 하셨는데 삼키고, 치시는 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다 오히려 죽은 것입니다. 예배가 독(毒)입니다.
가인. 그의 제사도 외면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절한 것은 가인의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은 감사도 없고 정성도 없고 번제의 희생도 없습니다. 오랜 습관으로, 부모를 따라 그렇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서 그의 마음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에 성심이 없고 뜨거운 열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가인은 다른 마음을 드렸습니다. 불만의 마음, 계속되는 짜증이 나는 마음, 오랜 진행되는 제사에 지루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지 않으시니 그의 제사도 제물도 거절당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예배는 바른 불로 드려진 정통 예배였습니다. 신학이 있었고 교리가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마음, 뜨거운 열정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싸늘한 자기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사람들이 더 무서워졌습니다. 더 영악해졌고 더 교만해졌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예배에 교리적으로 하자는 없었지만 예배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신들의 성(城)은 더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했다면 그렇게 자신들로 무장이 되는 인격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알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을 떨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영성은 말라갔습니다. 예배가 독입니다.
3. 다른 생활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를 드리는데 모든 외부조건은 다 갖추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 복장을 입고 나가면 그 찬란한 복장에 찬탄을 했고 그들에게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십니다. 그들이 어디에 살다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막에서의 그들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막 밖에서의 그들을 봅니다.
향단 불을 피우고 거룩한 기도를 드리는 것만 보지 않고 그들이 자기 장막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제사가 성령의 뜨거운 불로 응답받으려면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다 왔는가, 그 점이 중요합니다.
아쉽게도 그들의 생활은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술에 취해 이 사달이 난 것도 어제 성막 밖에서 취하도록 마셨을 것입니다. 제사장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성소가 아니라고 함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소에 들어와 거룩하게 처신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눈에는 가증하게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가증한 것을 혐오하십니다. 성소와 성소 밖의 이중적인 생활이 하나님의 눈에 가증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이는 불로 친 것입니다. 그들이 성소 밖에서 생활에서 제사를 드리는 생활제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결국에서 성소에서 죽이는 천불을 끌어당긴 것입니다.
연주자들은 당일 무대에서만 연주를 한다고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대 아래에서의 연습이 필요하고 연주가 필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계속 연습을 해야 무대 위에 올라가서도 제대로 연주를 하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예배도 그렇습니다. 주일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가 되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의 일상예배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서건 하나님의 전(殿)이라 생각하고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생활로 드리는 산제사라고 합니다. 평일에서의 산제사, 예배당 밖에서 헌신된 예배가 없는 주일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생활이기에 다른 불을 받지 않으신 것처럼 다른 생활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려 가다가 이웃과의 불화가 생각나거든 사화(私話)하고 다음에 예배를 드리라 하십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우호적이고 너그럽고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결론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라는 최고의 예배자이면서 왜 능력의 줄을 받지 못하고 천벌의 천불을 받았습니까?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마음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활로 드렸습니다.
그것은 업사이드였습니다. 수가성 여인. 그는 다섯 남자를 알았습니다. 골을 넣었는데 인정받지 못합니다. 지금 제6의 남자와 삽니다.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규정하십니다.
넌 업사이드야! 오프사이드(off-side). 축구경기에서의 반칙, 정한 자리를 벗어난 지점에서 넣은 골은 무효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는 업사이드 무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제사장의 자리에서 영원히 퇴장 당했습니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바른 예배로 돌아갑시다.
오직 바른 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배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정결하게 해주신 그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주중의 산제사로 예배합시다.
그럴 때에 우리 예배는 하늘을 나는 기쁨을 줄 것이며 날마다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는 약(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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