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라, 주님과
창세기 5:21~24
서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미혼여성들의 결혼관을 발표했습니다(2019년). 서울과 북경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 에 그렇다 응답한 여성이 서울은 2.9%, 그러니까 결혼을 필수로 생각하는 미혼 여성이 서울은 100명 중 3명에 그쳤습니다. 이에 비해 베이징은 6배 많은 100명 중 19명입니다.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응답은 서울은 66.7%입니다.
젊은 여성들이 결혼에 대해 왜 이렇게 소극적일까요? 사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확신이 없는 것이지요! 어떤 남자와 만나 평생을 산다는 것! 시댁 가족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평생을 산다는 것! 그러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다가 요즘에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남성들보다 훨씬 더 활발하고 유리하고 경제적인 여유까지 있기에 굳이 결혼을 인생 필수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혼은 구두와 같은 것입니다! 새구두라고 하지만 내 발에 잘 맞으면 좋지만 구두가 내게 맞지 않으면 상처투성입니다. 걷지도 못합니다. 버릴 수도 없고 신고 갈 수도 없고…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내 인생에 보물단지 동행이 될지 애물단지 동행이 될지… 결혼이라는 예식을 통해 누구와 평생 동행한다는 것이 모험이기에 좋은 사람이 있으면 하지만 굳이 짝 맞추기 위한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새로운 결혼관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혼은 평생을 이 사람과 동행하겠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성향과 취미와 시댁이나 처가댁과 동행하겠다! 이게 전통적인 결혼입니다. 1부1처제인 시대에 한 사람 이상과의 결혼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는 사람은 당연히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배필로 삼아 평생을 일편단심! 죽어도 죽은 사람과 동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결혼이기에 결혼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도 많고 행복한 이들도 많습니다. 동행이라는 그 인연이 가져온 행복이요 불행입니다.
오늘의 설교주제는 동행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동행입니다. 신앙의 길에 입문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합,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같은 길을 가겠다는 것이 신앙입문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기에 신앙 입문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다가 지루하면 그만 두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일편단심보다는 이편양심(?)으로 적당히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니니 하나님과의 동행이 제대로 안 되고 종교생활로 만족합니다.
여기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나옵니다.
22절,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300년을 동행하다니…, 그것도 자녀들을 낳았으며…
혼자서 사막에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주님을 묵상하고 동행했다 해도 대단한 일이거늘 자녀들을 낳으면서 티격태격 부부생활을 하면서, 지지고 볶는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300년을 동행했다니 굉장하지 않습니까?
1부1처제 결혼생활에서 앞으로 인간의 수명이 300년 400면 장수무대가 되어 300년을 부부로 산다고 상상해보세요! 괜찮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고 김선도 목사님 아들)는 결혼의 위험 부담율을 낮추기 위해 농담 진담 삼아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결혼 3번’은 기본이라 합니다. 한번으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결혼 제도는 평균 수명이 채 40세도 안 될 때 만들어진 거랍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 단 한 번 결혼으로 오직 한 사람과만 70~80년을 동행하는 부부는 '천연기념물'이 될 확률이 높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김정운 교수의 결혼에 대한 대안! 100세 시대에는 ‘결혼 10년 단임제’입니다. 결혼하면 딱 10년 살고 졸혼! 정말 사랑하면 단 한 번 10년 연장전! 어떤가요? 마음에 드는 분 있나요?
그런데 에녹은 300년을 동행합니다. 동행은, 같이 길을 가는 것으로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을 동행인, 동반자라고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같은 길을 가고 같은 동반인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처음부터 신실한 사람은 아닙니다.
22절,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언제 무드셀라를 낳았는가?
21절,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았고…
그러니까 65동안 하나님을 믿고 살았으면서도 즐거운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억지로 나오고 모태신앙이라 나오고 부모 체면 때문에 나오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오고… 그 수준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동행은 ‘같은 길을 걸음’으로 나옵니다.
24절, 동행이라는 원어 ‘할라크’는 ‘걷다’(레 11:42), ‘산책하다’'(삼하 11:2)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와 동행했다고요? 하나님과! 누구와 산책했다고요?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산책은 사업적인 대화나 말동무 삼아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친밀한 교제이며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런 산책으로 ‘인격적 교제’를 나눕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할수록 더 거룩해지고 더 너그러워지고 더 정의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65세까지에는 인격적인 만남이 되지 못하고 즐거운 친교가 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인 신자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무니만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커트라인이 너무 높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너무 거룩하고 신성하고 하나님이 노는 물은 너무 깨끗했습니다. 그러니 깨끗한 물에 고기가 없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죄성으로 가득 찬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려 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이것이 어느 시대이건 동일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는 세대가 있기는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많은 이적들 체험하면서도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를 받으면서 왜 우상숭배에 중독되고 매를 맞으면서도 자기소견대로 사는 세속화의 길을 왜 걸었을까요?
세상과 노는 물은 너무 재미가 있고 하나님과 노는 물은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우상숭배는 네 멋대로 하라! 감정이 이끄는 대로 가고, 몸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들은 타락적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신전에 창기와 미동들을 들여놓고 종교예식의 형식으로 서로 간의 몸을 섞고 심지어 스와핑을 했습니다. 그게 즐겁고 편했습니다.
이에 비해, 여호와의 종교는 상당히 율법적입니다. 율법의 중심은 십계명이고 십계명을 분석하면 하라! 하지 말라!~ 로 나옵니다. 이것을 감사와 은혜로 지키면 쉬운데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벌벌 떨면서 지키려니 숨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다른 편으로 우상숭배, 그것도 성(性)을 강조하는 아스다롯 여신에게 열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는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고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감정과 육신은 바알과 아스다롯 부부신을 따릅니다. 그들은 다산의 신이요 풍요의 신, 농사에 유익한 비를 관장하는 신이라 생각했기에 자기들 수준과 처지에 딱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매를 벌면서도 꼭 바람난 사람처럼 불나방이 되어 우상숭배에 중독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래요! 우리 사회가 너무 편리하고 재미가 있습니다. 죄는 무서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동행은 인기가 없고 재미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은 주일에만 자꾸 한정시키려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교회는 점점 커져가고 대형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이 꼭 하나님과의 동행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의 정교회는 엄청 큽니다. 유럽은 대부분 기독교 중심이고 독일 같은 나라는 기독교가 국교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교회,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교회, 보혈의 피가 흐르지 않는 종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과의 동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세 가지 케이스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아들이 예루살렘에 남아 동행하지 않음에도 자각하지 못합니다(눅2:43,44).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동행하고 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눅24:15, 16).
-노아는 하나님과 늘 동행했습니다(창6:9)
에녹은 셋의 자손이지만 65년을 동행의 자각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65년의 믿음은 인본주의요 세속화된 믿음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다가 에녹의 생애 속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65세쯤 되었을 때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을 때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대홍수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당시는 죄가 관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에녹에게 대심판을 계시하셨습니다. 심판을 알게 되었을 때 에녹은 화들짝 놀랍니다. 그에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예화로 사용했던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의 간증입니다. 서울대학 음대를 나오고 미8군 무대 출신으로 인기 가도(街道)를 달리던 김씨, 부모님과 일찍 교회는 다녔지만 음악하다 보니 술로 찌들고 스트레스 받고… 흥청망청 엉망진창이었답니다.
여름비가 내리던 날 심수봉씨가 여전도사님(전몽월)과 찾아와 성경을 읽는데 자꾸 눈에 밝혀 찾아왔답니다. 몇 마디 후 전도사님이 불쑥 “단장님, 더 이상 죄 짓지 마세요!” 하더랍니다.
“예? 저 죄 많이 짓지 않는데요.”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어요.”
그 소리가 천둥번개처럼 머리를 치며 술자리 약속을 마다하고 집으로 가는데 눈물이 쏟아졌답니다. 운전이 힘들어 차를 길가에 세우고 그냥 울었습니다. 집에 가서도 피아노 밑으로 기어 들어가 성경을 보면서 한없이 떠오르는 죄 때문에 울며 기도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 내칠 수도 있었지만 안아주신 하나님… 허망한 생활을 그만두고 바르게 살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죽도록’ 감사했습니다. 그는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서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눈물에 온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의 BC가 마감되고 AD가 열리는 시점이었다. 죄로 얼룩진 내 인생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는 때였다.”
여러분도 인생을 나눠보세요! 교회 다니기 이전과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제대로 몰랐던 B.C와 제대로 예수님을 믿게된 A.D를 나눠보세요!
에녹에게도 이런 회개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딱 한 마디! 심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무엇으로? 대홍수로! 그래서 후닥딱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버립니다.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노아에게도 같습니다.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리셋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심판! 입니다.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겠다! 그 엄중한 말씀에 그때부터 동행을 시작합니다.
동행하려면 세 가지가 맞아야 합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이건 목적지입니다.
-누구와 가고 있는 것인가? 이건 동행자입니다.
-어떻게 갈 것인가? 이건 동행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굴복되어야 가능합니다. 에녹은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복종시켜 3백년을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동행은 ‘단짝’이 되는 것이요, ‘함께 발을 묶고 걷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같이 걸으면 힘들어요. 아버지는 걸음이 빠르십니다. 천천히 가자고 해도 그냥 가십니다. 내 걸움과 보조를 맞추시면 좋을텐데 내 사정은 봐주지 않습니다. 당신의 걸음과 보조를 맞추라 합니다.
하나님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실만도 한데 하나님은 자신의 수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만나 주시기 위해 자기 수준과 기준을 낮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기쁘게 포기하는 자들에게 교제를 허락하시며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 포기와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결혼 생활은 사랑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취미와 관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을 죽이고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행이 가능합니다.
마이어 박사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히말라야 산꼭대기의 공기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희박하고 숨쉬기가 힘이 든다. 잠깐만 있어도 인간의 발은 지쳐버린다. 지탱하기가 힘이 들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을 포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3백 년 동안 에녹도 위기가 있었겠지요. 그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해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에녹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동행했습니다. 하루는 죽을 둥 살 둥 동행하다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 홀로!” 변덕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주일은 동행하다가 평일 날은 “나 홀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으면 동행했다가 기분이 나쁘면 “나 홀로!” 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날씨만 궂어도 동행하지 않습니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주일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동행했습니다. 내 기분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동행합니다. 그는 그렇게 3백년 동행을 귀감으로 남깁니다.
결론
한 어린소녀가 주일학교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오늘 주일학교에서 굉장한 사람을 배웠어요!”
“누군데?”
“에녹이에요! 그 사람은 하나님과 오랫동안 산책을 했대요!”
“그거 대단하구나.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대?”
“하나님과 너무 오래 걸어서 멀리까지 가게 되었대.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이야기를 하다보니 집에서 너무 많이 와버렸구나! 차라리 우리 집에 가서 나와 함께 있도록 하자’ 그랬대”
그래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5장은 아담의 계보입니다. 낳았고 죽었고 낳았고 죽었고… 이것이 인간 운명의 고리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이 고리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금년 한해, 살면서…
24절, 세상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당장 승천이라는 축복은 누리지 못하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늘을 사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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