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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여기서는 그랬어도 거기서는 말라!(신명기 12: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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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그랬어도 거기서는 말라!

신명기 12장 8절

서론  

올해(2018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곧 새해가 되고 한 살을 보탭니다. 일본은 연하장 문화가 남아있어 100~200통을 부칩니다. 연하장 인사가 없으면 무례한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예의가 반듯하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입니다. 일본 노인들의 임종 준비활동을 뜻하는 말에 에 슈카쓰(終活)’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 고독사() 문제로 노인들 사이에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정리하자는 개념입니다. 장례 절차, 연명 치료 여부, 재산 상속 등의 정리와 가족, 친구들에게 사후 남길 메시지 제작 등이 대표적인 슈카쓰입니다. 요즘 이런 문구가 인기랍니다.

 

<매년 나이가 들면서 심신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올해를 끝으로 새해마다 보내던 연하장을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올해로 연하장 보내는 걸 그만두겠다는 연하장 청산 선언입니다. 연하장 인사가 무의미하거나 번거로워서가 아니라 아직 총기가 있을 때 제대로 끝마무리 인사를 하고 싶다는, 일종의 임종인사, 작별인사인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쓸쓸한 일이요 어떻게 보면 지혜로움입니다.

 

연말연시.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한 살을 더 먹으면 젊은이들은 한 살 늘어났다는 희망에 부풀지만 어르신이라는 대접을 받게 될 나이에는 한 살을 먹는 것은 한 살을 보태는 일이요 수명이 그만큼 단축되는 것이기에 반갑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나이 듦은 늙어가거나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그만큼 무르익어간다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대학이 어느 연령대가 가장 행복할까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뜻밖에도 70~80대가 가장 행복한 연령대로 조사됐습니다. 미국심리학회에서도 같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노년은 공부 중압감, 취업, 결혼, 승진에 시달리지 않고, 시간도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모든 노인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잘 늙는 법, 늙어가지 말고 익어가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본문은 모세의 일종의 유언이자 마지막 연하장인 셈입니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면 광야생활도 청산됩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쉽지요. 그러나 모세는 항상 하나님 중심, 백성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자신이 죽어서라도 백성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기를 기도했던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가 작별하기 전에 마지막 고별설교가 신명기 전체이고, 가나안은 어떤 땅인가,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얼마나 꿈에 그리던 생활입니까? 11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새 땅에서의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조건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신신당부합니다.

 

8,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소견대로. ‘자기 눈에 옳은 대로’(KJV, RSV), ‘자기 생각에 알맞는 대로’(Living Bible)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네 마음대로 살았지만 거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네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곡하게 부탁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점잖게 꾸짖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는 물론이지만 모세에게도 참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광야에서 멋대로 마음대로 살았지만 여기까지다! 제발 그 땅에서는 그리 살지 말라! 당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만두라는 백성들의 행동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하나님으로 상향평준화, 나로 하향평준화

우선, 세속화입니다. 세속화는 하향평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거룩을 주문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9:20). 거룩은 순결과 성결, 성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거룩하라! 명령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위해 방편도 주셨습니다. 율법과 성막과 십계명입니다. 율법과 성막과 십계명은 구원이 아니라 거룩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세대는 자기 소견대로 해석했고 준수여부를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거룩으로 나아가는 성화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입맛에 내 기호에, 내 요구조건에 맞추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지렛대 내지는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다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많이 믿을수록 거룩이 아니라 전통과 형식에 공을 들였고 세속화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나팔꽃이 나무에 감겨 올라가듯이 여호와 중심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거룩은 사실 재미는 없습니다. 원래 죄 짓는 일이 스릴과 재미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없는 틈을 타서 아론에게 금송아지 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다오!”(32:1)

 

우리, 즉 내가 주어입니다. 하나님은 경배대상이 아니라 내 대신 일을 해줄 일꾼, 동사입니다. 내가 주도권을 갖습니다. 이것이 신자 고객중심의 기독교입니다. 리처드 핼버슨은 말합니다.


처음에 (초대)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교제모임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이 되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시스템(제도)이 되었다. 유럽으로 넘어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기업화된 교회는 말은 하나님을 상대한다지만 사실은 사람 상대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어떻게 살까? 오늘 설교에서 하나님은 내게 뭐라 하실까? 이걸 묻는 것이 아니라 설교가 나를 위로하는가, 찬양대 찬송이 은혜가 되는가, 교인들이 나에게 어떻게 대해줄까? 그런 교회들을 찾아 나서고 선택합니다.

 

교회 역시도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고객을 구합니다. 고객은 왕이다! 이런 슬로건이 교회도 기업화되다보니 교회의 왕은 교인이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설교를 판단하고 찬양을 판단하고 하나님 노릇하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소비자 중심의 짝퉁기독교입니다.

 

모세가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너네 중심으로 살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제발 그리하지 말거라~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살아가라! 그리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2019년 새 땅에서 모세의 당부를 들어야 합니다. 거기서는 제발 여기처럼 살지 말라!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를 나 중심의 기독교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을 주어로 삼고 따라야지 내가 하나님을 동사로 여겨서 조종하고 부리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과 나의 길

두 번째 당부는,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길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백성들은 만성적인 불평불만자입니다. 불평요인은 대부분 길로 인한 것입니다. 물 때문에 불평하고 고기 없다, 힘들다 불평하지만 사실은 모두 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길로 인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길로 인하여 낙심하게 된 것은 수 없지만 크게 세 번 정도입니다.

 

홍해 도강직후, 지름길을 두고 광야로 인도되면서 길로 마음이 상해서 불평합니다(14:17)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들이 잘못된 정보를 믿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역사건을 일으키자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방황하게 만들었을 때도 길로 인해 화가 납니다(14:33)

길로 인해 마음이 무지무지 상한 것은, 광야 생활 40년을 끝내고 가나안을 목전에 둔 시점입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인데 에돔의 방해로(20:18-21) ‘왕의 대로가 있는 평탄한 에돔 동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홍해의 길 바란 광야로 인도하자 백성들은 분노를 터트립니다.

 

민수기 21:4,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마다 원망했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백성들 데리고 놀거나 장난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들은 보기에는 그래도 모두 좋은 길이요 이스라엘이 사는 길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광야로 인도하는 것은, 애굽의 국경수비대를 피하고 계속적으로 애굽의 추격을 받으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안전한 광야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광야 40년 방황의 길은 체질개선을 하는 훈련기간입니다. 400년 애굽생활은 모두 이방인체질로 만들었습니다. 400년을 살았기에 40년으로 애굽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씻어내서 온전한 히브리인의 혈통을 회복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입성시키려 하는데 몰랐기에 불평한 것입니다.

요단강 목전에서 직선 길을 두고 다시 광야로 돌린 것은 돌아가더라도 사촌혈육 에돔과 싸우지 말라, 두고두고 혈육전쟁이 되기에 조금 돌아가더라도 후환을 없애주려 한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몰라요. 자기들의 눈에는 자기들의 길이 좋은데 하나님께서는 꼭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착시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길을 갑니다.

제주도 도깨비도로는 착시현상입니다. 올라가는 길이 내려가는 길 같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로 보입니다. 그래서 물이 거꾸로 올라가며 흐릅니다. 도깨비장난이라고 유명한 관광코스가 되었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원주민들은 얼마나 우습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착시현상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합니다. 마음이 상하면 입으로 말로 나타나고 불평불만은 위로 아래로 옆으로 좌우로 그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길로 마음이 상할 때마다 하나님을 불평했고 이때마다 사달이 납니다. 하나님이 그 불평들을 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에 동요하며 불평을 터트리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입조심해야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성도의 말은 하나님이 듣습니다. 말에는 씨앗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스라엘이 뭐라고 불평합니까?

 

우리가 광야에서 ()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 다 죽었습니다. 말의 씨가 무서워요! 새 땅에서는 좋은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해서 좋은 열매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

모세의 세 번째 당부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으로 일편단심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전 애굽을 탈출할 때 얼마나 황홀하고 감격했습니까?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걸어왔던 광야에는 무엇만 남았습니까? 무덤들입니다. 20세 이상의 기성세대가 갈렙과 여호수아만을 제외하고는 다 죽었습니다. 상황판단을 잘못 하고만 불신의 결과입니다.

 

모세의 명령으로 12명이 가나안 현지 정탐을 나갔습니다.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말인즉, 가나안은 너무도 좋은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여기까지는 12명 정탐꾼 보고가 일치했습니다. 모두 눈이 있고 보는 것이 있는데 다를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모두 긍정평가를 하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평가와 이로 인한 정세진단은 달랐습니다. 열 명은 원주민들은 거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을 메뚜기로 봅니다(14:33). 두 명도 원주민이 거인들이라는 것에는 인정하지만 내가 누구냐? 거기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두 명은 그들이 바로 우리 밥이라고 합니다. 거인이 크면 밥덩이도 크니 오히려 더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관점의 차이이자 해석의 차이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의 문제, 안목의 문제입니다. 어떤 관점으로 상황을 보고 상대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열 명 정탐꾼들의 말은 사실, 즉 팩트입니다. 오히려 두 명의 보고가 팩트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팩트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팩트입니다. 내 눈으로 보면 원주민들은 거인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저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밥일 뿐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상황을 보지 않습니다. 거인이냐 소인이야 다수냐 소수냐 그걸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은 어떠신가? 그것만을 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가나안은 싸워서 얻을 쟁취의 땅이 아닙니다. 주시면 받을 약속의 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두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싸움의 전권을 하나님에 맡깁니다. 싸움의 구도를 나와 너로 본 열 명에게는 자신들이 메뚜기에 불과하지만 싸움의 구도를 하나님과 원주민들로 만든 두 명에게는 거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전리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면서 흔들리지 말고 건너가자고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갈렙을 향해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14:24)

항심(恒心), 일편단심(一片丹心)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너희 조상들은 열 명 정탐꾼의 부정적인 소리를 따르고 그들의 소견대로 행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제발 그리하지 말라! 두 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긍정적인 판단을 내린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리 살도록 하라! 내게 약속하라!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그리 살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서의 350여년의 세월을, 사사기 마지막 장 21 25절은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더라고 합니다. 모세의 당부를 버린 것입니다. 이런 시대는 계속해서 하향평준화를 하고 인간의 불신의 길로 가고 자기가 주어가 되어 생각에 옳은 데로 살아갑니다. 이걸 끊은 고리가 마리아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이런 고백으로 인류의 구속을 이룬 분이 예수님입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6

결론

이제 우리는 요단 강 이쪽에 있습니다. 내일모레이면 2018년 이 땅을 버리고 2019년 저 땅으로 들어갑니다. 놔두고 가야할 것! 버리고 가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버리십시오! 아쉽지만 털어버리고 내려놓으십시오! 그걸 갖고 가면 새 땅에서도 길로 인하여 불평하게 됩니다.

 

이 땅을 떠나면서 갖고 가야 할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칭찬받았던 것! 믿음의 성장을 가져왔던 것! 그걸 갖고 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우리 인생의 해를 누립시다!

 

여러분들로 행복한 이 땅이었습니다. 저 땅에서 행복한 여러분들과 동역하고 싶습니다. 한 해 동안 제 설교를 경청해 주신 모든 성도님에게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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