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히 기다리자
예레미야애가 3장 24~-28절
서론
황량한 사막 길을 단신으로 횡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살인적인 더위? 갈증? 고독?"
그 사람의 대답은 전혀 이외였습니다.
"그것은 신발 속에 들어온 작은 모래알이었소!"
이 여행자의 말이 사소하게 들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소하게 보이는 고통이 사람에 따라서는 무서운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고통처럼 보이는 일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를 업수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입장에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고통의 모래알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의 선배들의 충고는 한결같은 것입니다.
"참아 기다려라!"
다윗도,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예레미야도, 26절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고난을 이겨내는 최고의 약은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참아 기다리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지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누가 잘못이냐, 누구 때문이냐? 원인을 찾느라 기진맥진하지 말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임한 고난을 보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그는 하루 종일 괴로워하며 신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옳은 말이라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원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침묵입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침묵입니다.
소는 왜 멍에를 매게 합니까? 성숙시키기 위합니다. 송아지가 조금 커지면 멍에를 메우고 그 위에 잔득 짐들을 실어서 이리 저리 끌고 다닙니다. 짐을 실기 전에는 까불어서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멍에를 메우고 나면 의젓해지고 황소가 됩니다.
*자신을 낮춥니다.
*남의 곤경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계획자요 인도자라는 것을 압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
곤경을 통하여 선지자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기업이시니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의 침묵 속에서 훈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어둠은 훈련장으로서는 최고입니다. 이 어둠에서 훈련이 되려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며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며 성숙해지는 배움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영국의 조지 왕이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을 때 두 개의 꽃병이 특별히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꽃병들은 같은 원료로 만들어졌고 같은 스타일과 무늬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 있는 예술품의 모습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흐릿한 빛을 낸 체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또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전시한 것입니다"
고난의 불은 성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빛나게 합니다.
저는 아이엠에프가 성도들의 인생을 굽고 인격을 다듬는 "고난의 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불에 아름답게 구어지기 위해서는 입다물고 침묵의 훈련을 받는 게 좋습니다.
2. 믿음의 순전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내 믿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사람이 고난이 없으면 세속적이 됩니다. 요령을 피웁니다. 적당주의자가 됩니다. 믿음이 순수하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면 고난은 찌꺼기를 제거합니다. 불이 불순물들을 제거하듯이 고난의 불은 신앙의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이 빛나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사람의 인격을 빛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잠잠하지 않으면 오히려 고난으로 사람은 더욱 강팍해지고 믿음이 더 혼탁합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심을 알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합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변명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털 깎는 자 앞에 선 순한 양과 같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지자는 고난에 앉은 자들에게 입을 티끌에 대라고 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남편과 아내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면 두고두고 섭섭해 합니다. 입으로 믿음의 순전함을 지키십시오. 입으로라도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좋은 날을 주실 것이라는 순전한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십시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믿음 안에서 허둥댑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안수기도 받고 예언 받고 그렇다보면 사람의 꼴만 우습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의 방법으로 믿음을 굳게 붙들고 있으면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습니다. 믿음이 독수리처럼 막 올라갑니다. 아주 신앙적이 됩니다.
독수리는 멀리서 폭풍이 접근하면 본능적으로 금방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폭풍이 몰려오는 방향을 향해 날개의 각도를 조종하고 기다립니다. 세찬 바람은 독수리를 높은 고공으로 치솟게 만듭니다. 힘 있게 나는 날개를 준비한 독수리에게는 폭풍우란 전화위복을 가져다주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믿음의 날개가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몰려온다고 합시다. 30도 각도로 믿음의 날개를 조정합니다. 육체의 질병이 엄습합니다. 60도 날개로 조정합니다. 높은 경지로 솟아오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믿음의 날개를 펴십시오. 날개를 튼튼히 세우십시오. 믿음은 바로 이런 때 써먹으려고 준비해 둔 비장의 무기입니다. 아이엠에프는 우리 믿음의 날개를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3.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그냥 입을 다물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알고 허구한 날 땅값 오르기만 기다립니다. 이것은 성경의 뜻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고 잠잠하라는 것은, 사람을 향해서는 입을 다물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입을 크게 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해결사가 됨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히 구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며 평소보다 더 수고하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아기를 안은 부인을 태운 마차가 겨울 벌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온이 급강하했고 부인은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아이까지 모두 죽을 판이었습니다.
`어떻게 둘 다 살릴 수 있을까?'
마부는 부인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렸습니다. 부인은 울부짖으며 미친 듯 마차를 뒤쫓아 갔습니다. 얼마 후 마차가 섰을 때 부인의 체온은 뜨거워져 있었습니다. 그 열기(熱氣)로 아이의 체온도 뜨거워졌습니다. 모두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을 이렇게 연단시키십니다. 내가 더 뜨겁게 기도하고 힘을 내어 가정의 의욕을 살려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뭔가를 주시기 위해 멍에를 매게 하시는 것입니다. 멍에가 크면 클수록 고통도 크지만 그 위에 올려놓는 것도 큽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고생시키려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고통의 바구니에 뭔가 채우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이 크면 담는 것도 큽니다. 작은 고통은 작게 성숙시키고 큰 고통은 크게 성숙시킨다면 우리의 고통이 큰 것을 기대하고 고통을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4. 자기를 자신이 위로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담자는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상담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왜 자신의 문제를 여러 사람들에게 흥밋거리, 까십거리를 만들까? 그것은 자신이 견디어야 할 문제이며 어두움 속에서 훈련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욥,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로다"(욥5:8)
그러려면 평소에 상담자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상담할만한 믿음의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상담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저의 인생은 끝장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끝장이라니요? 하나님은 계속 만들어 가시는 중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만드시는 가는, 우리들의 태도 여하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상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만들어 가는 중이야!"
결론
2차 대전, 유대인들은 6백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포로수용소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비록 태양 빛이 비춰오지 않지만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지금 사랑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나는 저기에 여전히 사랑이 존재함을 믿는다. 비록 지금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
손톱으로 긁어놓은 글씨였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들보다는 낫습니다. 그들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마음의 태도는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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