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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마음의 성소(고린도전서 3:16, 17)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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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성소

고린도전서 3장 16, 17절

서론

 

금요일, 장로님과 00교회의 신축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뼈대만 세워져 있는 성전 건물을 보면서 이게 교회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여러 모양으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십자가도 있고 성가대석이나 강단이 제자리에 잘 정돈이 되었을 때 교회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도 그 영적인 교회 상태를 들여다보면 가지각색일 것입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마음의 성전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아직도 "공사중!"인 사람, 쓰레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성전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삶을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주 창조 시에 성령의 역사는 수식하고 단장하고 생동하는 역사를 감당했습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오시면 인격이 아름다워지고 고상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갈구하면서도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 어느 곳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단지 능력으로만 알기에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지 못합니다.

1. 성령은 마음에 역사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장소에 임하셨습니다. 에덴에, 광야의 회막에, 솔로몬 시대에 비로소 성전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땅이 성지가 되고 회막에 임하시면 회막은 성막이 되고 전에 임하시면 성전이 됩니다. 성지나 성막이나 성전이 성전인 것은 그 자체가 신비롭거나 웅장하거나 호화로워서가 아닙니다.

에덴만치나 아름다운 자연이 왜 없겠어요? 지금도 유목민들의 회막은 그 어떤 고급주택보다도 아름답고 신비하답니다. 솔로몬의 궁궐은 그보다 더 호화로웠습니다.

 

그럼에도 성지, 성막, 성전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거룩하신 성신께서 거하시는 곳이기에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발하는 집은 이발소, 빵이 진열된 곳은 빵집,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영화관, 무당 집은 당집처럼, 성신 하나님께서 임재한 곳이기에 성전이 된 것입니다.

 

신약에 들어오면서 성전의 개념은 장소나 집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마음을 16절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모든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원래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곳입니까? 예레미야는 만물 중 가장 부패한 곳이 마음이라고 합니다(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거짓과 부패의 장소-마음.  

이런 마음을 성령께서 잡아놓지 않으면 아무리 외적으로 성령의 흉내를 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행한다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계속 거짓되고 부패한 것들이 흘러나온다면 그 성령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외적인 성령의 이적들을 욕심내기 전에 마음이 성소가 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건물만을 호화롭게 치장하고 있으니...

 

이것이 한국교회의 거품입니다. 이런 거품이 제거되지 않으면 몇 년 사이에 한국교회는 영적인 아이엠에프를 만나 추락할 것입니다. 

2. 마음은 성령과 육신의 전투장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마음에 모셔들이면 마음은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혼란을 일으킵니다.

왜일까요? 우리 마음의 장소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의 영은 육신의 본성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거짓되고 부패한 정신, 마음. 바울은 인간의 타락을 더 구체적으로 밝혀냅니다.

 

롬 1:29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함,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부모 거역, 우매, 배반, 냉정, 무자비" -

 

바울은 이 모든 악독이 사형에 해당되는 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쓰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쓰레기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좁은 마음에 말입니다.

 

이런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2천 년 전의 그 육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은 영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 영이 성령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역사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갈 6:22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은 이처럼 고상한 것들을 갖고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현상들이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존 세력인 부패한 마음의 불순물에 잡혀서 성령님이 오시지만 쉽게 자리를 내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자 사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 사이의 전투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의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양자의 전투는 우리가 어느 편을 들어주느냐에 달라집니다. 아무리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온 사람들도 순간적으로 육신의 소욕을 편들어주면 그에게서 육신이 강하게 흘러나와 쓰레기통이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참고 인내하면 우리의 마음은 성소가 됩니다.        

 

본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초대교회 중 가장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흘러나왔던 곳입니다. 방언과 예언, 병 고치는 능력들이 교회에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성도들의 신앙형태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흘러버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많이 나왔고 이단이 많이 발생한 곳이 고린도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먼저 마음을 정복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외적인 모양에만 열중하다가 사단에게 이용당한 것입니다.

 

3장만도 보세요.

1절.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

4절 이하 "나는 바울파요 나는 아볼로파요...."

 

이게 전부 다 육신의 소욕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주장했기에 "시기, 미움, 비방, 수군거림...."이 왕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하니 덕이 안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이 겉으로만 금식하고 모양만 내다가 예수님께 책망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시 17절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구약에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사형을 받거나 백성에게서 끊기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들어 경고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예수 공동체를 더럽히지 말라. 그러다가 그 영이 죽는다"

3. 하나님의 마음을 흘러 보내는 성소가 됩시다.

교회는 성소입니다. 성소로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개인이 성소가 되고 교회가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00교회가 지금은 기초만 서 있고 을씨년스럽지만 점점 아름다운 예배당의 모습으로 탈바꿈해 갈 것입니다. 지금은 "공사 중!"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소 건축은 빨리 공사를 마쳐야 합니다. 물론 계속해서 수리는 해야지만 한번의 공사는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산 신고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성령님을 존중하고 성령님의 통치를 받게 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성령님으로 참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대인관계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심한 중압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게 더 많은 인내심을 주십시오. 제게 더 큰 힘을 주십시오. 제게 더 큰사랑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녀에게는 승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 성도는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자신의 몸의 성전에 살아 계시고 안녕하시고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성도의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주님, 제게 더 많은 인내심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님, 주님의 인내심을 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주십시오, 주님의 용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 여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힘을 나타낼 때 그녀의 삶속에서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그 여 성도는 비로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랑과 인내와 그 밖의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게 됩니다.

 

육신의 소욕이 점점 삭으러 들것이고 성령의 소욕으로 모두를 이해하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성령의 소욕을 강하게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기도원운동을 일으켰고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만큼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결론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부패한 쓰레기장으로 방치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기쁘게 좌정하시고 활동하시는 생산적인 발전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의 발전소가 되고 평화의 발전소가 되고 힘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갖추고 살 때 성령의 역사는 더욱 고상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고상하게 이끌어 갈 것입니다. 아직도 육신의 정권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으면 더 주님께로 굴복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 발전소로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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