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의인인가?
누가복음 18:9~14
서론
사람은 자기 평가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감사와 원망은 잘 살고 못 살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작게 보는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작게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보다 작게 보았습니다. 죄인의 괴수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이 자기를 평가했기에 그는 어떤 고생도 핍박도 감내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를 크게 보는 이들은 매사가 늘 불평입니다. 자기는 죄가 없으며 자기는 잘 났으며 자기만이 진실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불평을 하게되고 하나님은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항변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높은 데로 올려놓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평을 하고 조금 높이 보아주면 자기의 부족한 점이 폭로될까봐 불안해합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평가를 허물어 뜨려야 합니다. 평가 기준을 사람에게가 아니고 늘 하나님에게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부족한 점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남들을 대하며 선한 감정을 가지며 살 수 있습니다.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평가기준을 두려는 자들은 한 시도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엉뚱한 것에 자기를 맞추려 하다보니 진실도 잊고 행복도 놓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은 자신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몇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헤롯당-친 로마주의자들. 로마와 야합.
사두개당-자유주의자들이기에 자유분방했습니다.
바리새당-대단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바리새"는 “구별하다”, “분리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거리에 서서 기도하고 구제하며 천천히 걷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지 않고 음식도 가려먹었습니다.
금식을 한 주간에 두 차례씩 했습니다. 성경은 대속죄일 하루를 명령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 사회에서는 최고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겨버렸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떨어져서 따로 기도합니다.
왜 따로 기도합니까? 자기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중남미의 엘살바도로의 인권운동을 주제로 만든 영화 <로메로>에 한 귀부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로메르주교에게 와서 자기 아들에게 영세를 주기를 원합니다.
그때 주교는 주일날 공식예배시간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받도록 권면합니다. 그러자 귀부인은 자기의 귀한 아들이 천박한 민중들의 자녀들과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분노하며 성당 밖을 나갑니다. 그녀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가진 여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던 처음의 순수한 마음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꾸 외식이 나왔습니다.
외식이 뭡니까? 사람들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에 능한 것입니다.
돼지고기는 먹지 않고 소세지는 먹는다? 늘상 이 모양이었습니다.
그만큼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내면에 진실이 사라지니 겉의 거룩함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허한 사람들이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겉모양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만드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야 그들의 의가 더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은 전형적인 바리새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까?
*따로 떨어져서 기도합니다-잘 보이라고.
*서서 기도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을 멸시합니다.
이들이 왜 이러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들의 의(義)를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늦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미안합니다. 그러나 잠시 누가 들어오면 반갑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를 무디게 하고 자기의에 빠지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평가자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게 신앙생활인 줄로 알아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히 서야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마음속까지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을 쏟다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우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정은 자연히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걸리기는 합니다만. 진실은 언젠가는 인정을 받게됩니다.
2. 세리는 자신을 죄인으로 평가했습니다.
여기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비민족주의자, 친로마파, 악랄한 사람들. 동족들에게 철저히 멸시당함. 거지들조차 그들의 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은 그 누구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며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 그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가에 앞서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늘 부끄럽게 괴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말밖에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세리로서의 공개된 죄만이 아니라 자기 양심 속에 숨겨진 죄들을 내어놓고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조금도 변명하거나 발뺌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그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진실 앞에 녹아지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칭 의인들은 자기를 여러 가지 의의 옷으로 포장을 하고 그것이 자기인줄로 착각을 합니다. 마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자기인 줄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을 보십니다. 그분은 내면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보셨을 때 세리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두 수도사가 순례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냇가에서 여인이 건너가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수도사들은 여인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고민하던 한 수도사가 여인을 업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수도사가 비난을 합니다. 여인을 업었다고!
그때 수도사는 대답합니다.
"나는 이미 여인을 등에서 내려놓았는데 너는 왜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속에 숨겨진 악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나타난 악만을 문제 삼으며 그런 사람들일 수록 의인인 체 합니다.
현진건은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 이런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3. 누가 의인입니까?
바리새인과 세리는 둘 다 돌 제단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제단 앞에 나가는 그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나갔고 세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외형적으로 바리새인은 제단을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나가는 복장도 거룩했고 걸음걸이도 의젓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마음은 변화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단에 나갔지만 상한 마음이 드러날까 봐 속마음을 억누르고 숨겨 놓습니다. 자신의 좋고 거룩한 것으로만 단에 나가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건강하고 의롭다고 생각할 때만 교회에 나가려고 합니다. 이때만 주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정작 죄를 짓고 마음이 아플 때 주님의 단을 찾아야 하는 데 나가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는 자랑할 것이 있을 때에만 일거리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일감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일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문제가 더 중요했고 일 자체보다는 주님을 만나고 싶었고 사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의인인가?"
이런 질문 앞에 서면 우리들은 자신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진실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까? 세리였습니다. 그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 그 애통하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높은 점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며 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우쭐거리다 가면 마음의 평안이 없습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면 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는 의인으로 행세했지만 하나님은 죄인으로 평가했습니다. 세리는 그 반대였습니다.
결론
임금이 감옥을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죄수 모두가 잘못이 없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모두들 누명을 썼고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만이 자기는 죄인이며 마땅히 이곳에 있어야 한다며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그때 임금이 말했습니다.
"이곳은 온통 의인만이 있는 데 너는 뻔뻔하게도 죄인의 몸으로서 의인들 사이에 끼었느냐? 죄인들이 사는 곳으로 옮겨라!"
그 사람이 나온 곳은 세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하나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과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나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하는 자"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마르틴 루터는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늘 받게 하며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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