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 가득하더라
요한복음 12:1~8
서론
총회공과를 집필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팀은 다섯이었는데 저를 제외한 모두가 교수였습니다. 교수들이라면 모두 인격자인 줄 알았는데 총회에서 주어진 커리큘럼을 놓고 옥신각신 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여 교수 한 분이 성질을 부렸습니다.
저는 그런 속에서 두 부류의 이질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교수는 참지 못하고 그냥 자기의 성질을 다 부렸습니다. 팀장이 되는 교수는 모든 것을 다 참아내었습니다.
나이로 보나 모든 것으로 볼 때 남자 쪽의 교수 분이 훨씬 더 훌륭했는데도 그분은 매사에 참는 쪽이었고 듣는 쪽이었고 받아주는 쪽이었습니다. 그러나 여 교수는 얼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누가 교회에서 봉사를 더 많이 하고 있는가, 누가 기도를 더 오래 그리고 더 유창하게 잘 할 것인가, 누가 더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을 한 것일까....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한 사람은 예수가 보이고 한 사람에게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위한다고 하는 일을 하면서....'
저는 한 사람에게서는 예수를 보았지만 한 사람에게서는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에게서는 단지 예수에 대해 말하는 법만 보았고 다른 한 사람에게서는 예수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앞으로 여 교수에 대해서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생각할 적마다 먼저 얼굴을 찡그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 교수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를 맡게될 것입니다. 초면에 서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한번 만나서 헤어져 버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신 관리, 그리스도인의 관리를 하며 살아야 하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향 싼 종이에선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 비린내 난다”, 라는 이스라엘의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겉포장이 좋아도 결국은 속에 들어있는 것, 그 속에 들어있는 사상을 감출 수 없다는 의미의 속담일 것입니다.
1. 겉모양만 예수 냄새 풍기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열두 제자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을 함께 따라다녔던 사람입니다. 훈련도 받았습니다. 함께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예수의 인격과 모습이 풍겨오지 않습니다. 자기식이 아니라고, 헌신하고 있는 마리아를 비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누구를 싸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싸고 있는 종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싸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에게서 인간의 냄새, 이기적인 냄새, 아집의 냄새, 자기 방법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냄새만 풍기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들은 예수 주변에서 악취만 풍길 뿐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
*은혜를 받고 뭔가 교회에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을 뒤에서 쑤근거리며 낭비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향기는 멀리 가지 못합니다. 향기는 멀리 가는 향기가 진짜 향기입니다. 만약 향내음새가 너무 독하면 오히려 역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혼자 잘 믿는 척 하지만 그게 멀리 퍼져 나가는 향기가 아니라면 종교심으로 자신을 무장한 종교인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에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향기를 몸에 배는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인격적으로 그분과의 융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예수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만족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간 그 시간에는 냄새가 뱁니다. 모두들 신앙적인 얼굴들을 합니다. 미소를 띄며 경건의 모양을 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가면 예수의 향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향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시고 가야하는 데,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가득 흘러 들어와야 하는 데 예수만 말하다가 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일만 하다가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향기는 진짜 향기가 아닙니다.
18세기 프랑스에 그르누이라는 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천재이면서도 가장 혐오 적인 외모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는 냄새에 관해서는 천재였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채취가 없었습니다.
그는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최상의 향수, 즉 가장 좋은 체취를 얻기 위해 스물다섯 번에 걸친 살인도 마다하지 않은 집념의 일생을 살다가 발각이 되어 죽어갑니다. 그가 죽은 곳은 시체들이 썩어 가는 냄새로 코를 찌르는 묘지였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그가 만드는 향수는 진짜 향기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향수에 금방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나 진정 인간을 매혹시키는 것은 단순히 냄새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인품의 향기입니다.
2. 마음 중심에 예수가 들어와야 합니다.
마리아, 그녀는 예수의 곁에서 서성대었다 사라져 가는 여자가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 있을 때 그분의 능력과 교훈 앞에서 감동을 받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제자 훈련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아니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나와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예수가 전부입니다.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준 분, 마리아에게서 나신 죄 없으신 분, 고귀한 인격을 가지신 분, 인류의 구세주… 그녀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가장 소중한 분으로 모셨습니다.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을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진짜 마음으로 좋아했습니다.
"인간은 세 가지를 숨길 수 없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하고 있는 달을 집안에 붙잡아 두는 것은 백 마리의 벼룩을 우리 안에 가둬 두는 것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마리아에게도 그런 말은 해당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으로부터 은혜가 흘러나왔습니다. 은혜가 마음을 주장하니까 그분에게 뭔가를 드리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녀는 향유를 꺼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자연히 헌신이 나옵니다. 우리 교회는 크고 작은 헌신으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헌신을 할 때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그냥 헌금했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3년을 같이 있으면서도 자기의 것을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했기에 그녀의 헌신이 낭비로 생각되었습니다. 제자였지만 예수가 그 속에 흘러들어 녹아지지 않았기에 예수는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3. 예수의 향기가 있습니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작은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서 예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예수보다는 인간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머리 속으로만 집어넣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마음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제 예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가 흘러나오고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향기를 풍겼던 사람들은 모두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가득 채워 놓아야 예수가 흘러나옵니다.
이제 예수를 채우는 일에 주력을 합시다. 봉사도 해야하고 열심도 있어야 하지만 예수를 채우는 일에 열심할 때 봉사도 열심도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소양강 댐에 물을 채우는 데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7년 동안은 단 한 방울의 물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물을 쏟으니 생활용수, 공업용수, 농업용수가 되고 전기를 일으키고 큰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헌신이 흘러나오고 예수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흘러나와야 사람들이 우리들을 좋아하고 함께 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탈무드에 "좋은 손님은 올 때부터 기뻐하고 싫은 손님은 문을 나설 때부터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들어올 때부터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예수의 향기를 날리는 사람입니다.
인디언들은 자가에게 해를 기친 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 그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아, 이제야 원수를 갚았다!"고 한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풍겨야 할 향기입니다.
결론
마리아, 그녀는 초라한 여인입니다. 가난하고 쓸쓸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세 남매가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한 여인의 헌신과 사랑은 집안에 가득 향기를 가득 채웠고 기독교 2천 년 사에 아름다운 헌신으로 기억되며 그 사건이 전해지는 곳마다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죽기는 쉬우나 유대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렵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죽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색의 그리스도인입니까?
악취의 그리스도인입니까?
좋은 향기를 날리는 예수의 사람입니까?
그 향기에 이웃이 거룩하게 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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