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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누구에게 붙잡혔는가?(사도행전 26:24~29)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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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누구에게 붙잡혔는가?

사도행전 26장 24~29절

서론

한 주간 전쯤에 문학단체의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보이면 괜히 종교적인 대화로 분위기를 몰아가려 합니다. 나도 그런 곳에 나가서 목사입네, 티를 내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술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교나 교회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가 보이면 꼭 교회가 어쩌구 누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날도 여자 한 분이 말을 꺼내었습니다. 자기 동생이 서울대학을 나와 박사과정을 하려고 미국에 갔는데 그곳에서 예수쟁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믿는지 집안 식구들은 광신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날보고 광신자인지 아닌지 분간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오며 혼자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광신(狂信)과 헌신(獻身).   

 

광신과 헌신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꼭 같은 열심인데도 어떤 이는 광신으로 나타나 다른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어떤 이들은 헌신적인 종교의 삶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신앙적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은 광신과 헌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도덕적인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의적인 의미로 광신(狂信)은 이런 뜻이겠지요.

"미친 믿음"

"광적인 믿음"

"정상적이지 못한 믿음"

 

사전적인 해석으로는 광신은 이런 뜻이겠지요.

"도를 넘어 지나치게 믿는 것"

"자기의 신념을 지나치게 믿어 관용과 이성을 잃은 태도"

 

그러면 지나치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새벽제단을 쌓으며 뜨겁게 박수 치고 큰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도를 넘어 지나친 것일까요? 그리고 광신자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열심을 낸다고 광신이 아닙니다.

광신은 선악을 구별하는 일반적인 기준을 무시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교적인 행위에 열정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난번에 함께 생각한 거라사의 광인-그에게는 도덕적인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짐승처럼 생활했고 짐승의 본능으로 살았습니다.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 할 도덕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광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열심입니다. 유대의 랍비로서 좋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결혼도 포기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추방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입니다. 그가 너무도 열심이었기에 베스도 총독은 그를 향해  24절, "네가 미쳤도다!" 고 했습니다.

광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참은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그의 삶이 진실이요, 그의 인격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광신은 진실이 아닙니다. 도덕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담대히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내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잘못된 것을 보았는가?"

 

베스도 역시 그의 말을 수용했습니다. 바울은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광신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이단들은 대부분 광신입니다. 지난 날, 휴거 소동이 있을 때에 어느 교회에서는 임신중절이 있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가출을 하고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헌납해 버리고… 그들은 인간의 질서와 도덕 체계를 무너 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광신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심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그들의 열심을 흉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만약 정신 차린 말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또박또박 말한다면 아무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비록 신앙을 갖지는 않아도 그들의 그 열심에 탄복을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만히 보면 도무지 도덕심이라고는 없습니다. 선악(善惡)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들만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벙어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누가 반박을 하면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려 대듭니다. 그들은 광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도덕적인 체계를 무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윤리 체계, 도덕적인 체계를 무시하지 말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2. 종교적 이기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광신의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모든 관심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 취해있습니다. 자기가 최고인 것 같고 남들이 하는 것은 시원치 않게 보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은 자라날 수록 자아가 점점 더 축소되어져 가지만 광적인 신앙은 자라갈 수록 더욱 자아가 강해집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라갈 수록 더 온유해지지만 광신자들은 갈수록 더 배타적이 되어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단적인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한결 같이 자기만이 옳고 자기 교회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기복신앙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좇아서 살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을 받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좋은 대학가라고 열심을 내며 기도회를 엽니다.

바울이 변증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전하고 있는 교리에 충실합니다. 그것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 지 베스도가 보기에는 뭐에 씌운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외친 것입니다.

 

"네가 미쳤구나!"

 

그러나 바울의 의식은 극히 정상적이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교리를 변호하기 위해 입에 거품을 물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차분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그의 인격이 그의 신념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간다는 것은 자기에게로 향하던 지금까지의 시선을 이웃과 나아가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속한 자아가 점점 그리스도로 대치되는 것이 성숙이요, 성숙된 사람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헌신된 사람은 자기의 이익과 평안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둡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합니다.

 

광신은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신의 방법만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젊잖아도 그는 광신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광신자입니다. 그 열정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라면 그것은 광신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헌신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삶을 양도해 드리는 것입니다. 결정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격에 취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프리카 선교사로 훌쩍 떠날 때 사람들은 광신자라고 할 것입니다.

수능시험의 성적이 충분함에도 서울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광신자라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무엇인지, 왜 그러한 결단을 내렸는지 그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정열이라면,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기 위한 거룩한 열심이라면 그것을 헌신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3. 말씀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광신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환상, 계시, 투시, 꿈 등 초자연적인 현상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신이시기에 이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역사하며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섭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매력을 느낍니다.

 

한국인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투사를 한다거나 투시를 한다면 꾸뻑 죽습니다. 이런 것들 좇아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우리는 광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늘 비교해 가면서 말씀과 함께 행동하고 처신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태도를 보이고 바른 정신으로 진실을 말하고 그리고 열심을 내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광신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귀신들에게 "나사렛 예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라는 외침을 들을 때 입닥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광인으로 오해받기 싫어서입니다.

 

주님은 광신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미적지근한 사람들을 또한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믿음의 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분은 열심이셨습니다. 그 열심이 교회를 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열심이십니다. 그 분은 미적지근한 사람들,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믿음이 있는 양 점잖게 가장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그들이 곧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열심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이었던 지 아그립바는 바울더러 28절 " 네가 적은 말로…"라고 손을 저었겠습니까? 그 짧은 시간에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보기 위해 애쓰는 바울의 열심을 보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결론

미국의 스텐벅이라는 세계적인 요식업자가 임종할 때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세계적인 스테이크 회장이 자식들에게 어떤 유언을 남길까?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말은 "돼지고기 얇게 썰어라!" 였습니다.

코카콜라 사장은 "내 몸 속의 피가 온통 코카콜라였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열심과 열정이 그들을 세계적인 기업가로 만들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지도체계를 갖추고 있는 집단은 아무래도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50여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장기 복역수들이 있습니다.

공산당은 당원들에게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공산당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공산주의에는 방관자가 없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레닌은 "적극적이고 훈련된 사람만이 당원이 될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돌프 헤스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히틀러의 오른팔로 살다 죽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이념과 조직을 위하여도 충성을 각오하고 훈련받고 열심을 내는 것이거늘 어찌 우리가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있으랴! 헌신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기독교 2천 년은 점잖기만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가로운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화형터에서 순교한 이들, 우리들은 이 사람들을 광신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점잖은 일본 기독교는 4백 여 년이 지났으나 지금도 그 모양이지만 열심인 한국교회는 1백 여 년 만에 세계 20대 교회 중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큰 교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세상은 열심인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조직이 열심원들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열정적인 사람들, 결박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라는 바울의 열심을 세상은 기다리며 그런 열심 앞에 세상은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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