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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야망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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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야망

고린도후서 5:8~10 

서론

일본에 나왔던 한 선교사가 빈민굴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교는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학생들에게 기대를 걸고 몇 명의 학생들에게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계속 사고를 쳤고 선교사를 속이며 괴롭혔습니다.

선교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을 상대로 하여 자기의 생애를 바치기에는 그들이 너무 악했습니다.

 

일본을 떠나기 전 날, 선교사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야망을 가져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은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선교사가 달구지를 끌고 항구로 가고 있는 데 다섯 학생이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선교사는 그 학생들에게서 진실을 보았습니다. 한번 더 그들을 위해 희생해 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나중에 일본에서 지도자가 됩니다. 그들 중의 하나는 농림부장관이 되고, 또 하나는 목사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이 불량배 학생들을 지도자로 살아나게 했습니까. 그것은 야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야망이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었던 야망이 이들에게 불붙어 피어오른 것입니다. 만약 이들에게 야망을 심어주는 이가 없었다면 그들은 전후 일본 세대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불량배 중의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야망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소시민이 되고 현실에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너무 소극적이 된다면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어항에 낚싯대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1. 주님의 제자들은 야망을 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것은 야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야망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이렇게 무미건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의대생 하나가 친구에게 자기는 조지왕의 검안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웃었습니다. 그러나 몇 십 년 후 그 학생은 조지왕의 검안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검안사가 되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혔고 그것은 그의 삶을 단 한가지 길로 이끌었고 결국 그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야망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안과의사로 끝났을 것입니다. 야망은 한 사람을 정상의 자리로 올려주는 계기가 되며 힘이 됩니다.

 

그러나 야망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야망은 자신의 생애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야망 때문에 인류는 너무도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야망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인기, 명성, 좋은 평판을 구축하려는 욕구

-권력, 동료에게 권위를 휘두르고 싶은 욕구

-부, 재산이 가져다주는 권력

 

이런 야망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다니 야망 있는 젊은이들이 그 야망 때문에 파멸되기도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야망의 근저에는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너무도 자신을 즐겁게 하려다보니 타인에게 피해를 많이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야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의 형제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야망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만약 제자 그룹에 야망이 없었다면 어떻게 위대한 왕국이 세워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두 형제의 야망은 순전히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선생님이신 예수님조차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야망, 아니 어머니 살로메의 야망을 이루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야망은 주님에게 제지당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야망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야망은 오히려 왕국 건설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야망 때문에 교회는 이천 년 동안 수없이 마귀에게 유린당했으며 싸움터를 제공해 왔습니다. 잘못된 야망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일꾼들을 세웁니다. 이분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야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는 야망입니다.

 

바울은 야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지나치리만큼 야망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의 야망은 양상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타올랐습니다.

바울의 야망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는 바로 그 열망으로 불타듯 살다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잖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빛이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죽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러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죽음보다 더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야망으로 살다갔습니다.

 

그 결과, 그가 남긴 사람들은 얼마이며 교회는 얼마이며 성경은 얼마입니까?

키가 작았던 볼품없는 사람, 안질 때문에 마음껏 책도 못 읽었던 사람,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갔던 사람, 동족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사람, 그가 가는 곳마다 염병이라며 학대당했던 사람, 그러나 그는 결국 세상을 뒤집어 놓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라비아 교회의 창시자 진젠돌프는 그는 돈이 많은 젊은 귀족이었습니다. 하루는 작은 예배당 앞에서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 라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선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의 교회는 기도의 증기, 선교의 증기가 계속 뿜어 올랐습니다. 전 세계에 수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열정이 있다! 그것은 그분, 오직 그분이다!"

 

이런 열정으로 그는 모라비아교회의 창시자가 된 것입니다.

3.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주님은 더 많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무정한 독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무조건의 충성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때로는 지도자들이 거룩한 열망으로 자신들을 감싸지만 그 배후에는 인간적인 야망이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남을 희생케 하는 폭군적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의 야망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1) 주님의 야망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야망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한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보람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2) 주님은 우리를 넉넉히 기쁘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바울을 넉넉히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그에게 3층 천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보상해주셨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3) 상(賞) 받을 야망입니다.

세상적인 야망은 세상에서 끝나버립니다.

 

야고보 형제는 이런 인간들의 거짓 영광, 거짓 야망을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야망이란 결국 꽃과 같은 것, 들의 풀과 같은 것,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야망은 내세에서 더욱 빛이 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야망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번 주에 임직식을 갖습니다.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새로운 야망으로 불타오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야망에 불꽃이 지피어지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야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 아닙니까?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은 물론, 모든 교우들 역시 참석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각오를 다짐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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