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회
누가복음 10장 30~37절
서론
본문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30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 고지대며 여리고성읍은 해면하(海面下) 250m 저지대로 서로의 거리는 약 36km, 길이 가파르고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지역을 지내다 강도에게 돈을 뺏기고 엄청 두들겨 맞아 거반 죽게 됩니다. 위험지역인 줄 알면서 왜 혼자 나섰을까요? 꼭 가야할 사정이 있던지, 아니면 설마~ 방심하다 일을 당했겠지요! 그러기에 이 사람의 사고는 예측불허가 아니라 예측 가능했던 길이기에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한 그의 부주의도 있습니다.
요즘 산다는 것이 참 무서워요. 전에는 사고현장이 예고가 되었습니다. 해수욕이나 등산하다, 홍수를 만나, 아니면 군대서 훈련 받다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사고였습니다.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이 안 됩니다. 이런 사건 사고 앞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처(傷處)는 ‘피해를 입은 흔적’입니다. 상처는 육체만 아니라 마음에서 생각에서 과거에서 영원히 남을 상처, 심리학에서는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 트라우마까지 포함합니다. 그 사람은 살아나도 평생을 트라우마에서 살 것입니다. 사실은 그 상처가 더 무섭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암석바위 길에서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 그의 상처는 엄청 컸습니다. 참 억울한 일입니다. 내가 왜 강도를 만났나?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인생길이 그래요!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사람에 걸려 넘어지고 말 한 마디에 넘어지고⋯ 돈 때문에 휘청이고⋯ 때로는 내 말에 걸려 누군가 강도 만난 것처럼 거반 죽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간에 상처를 주는 강도가 되고 상처를 받는 피해자가 됩니다.
인생길에서 강도 만나 상처를 당한 사람은 누가 치료해 줄까요? 본문의 이 사람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을 만나 구원 받고 상처를 치료받는 행운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도피성이 되고 교인들이 상처 받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 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행세를 해야 하는데 교회가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항시장을 지낸 정아무개 장로의 자살은 쇼크였어요! 대표적인 성시화운동의 리더이고 자살은 죄가 된다, 공개적으로 비판하던 이가 자기 넥타이로 목맸습니다. 국회의원 출마했다 낙선하자 우울증이 왔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낙선이라는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교인들이 강도를 만났다고 자기 손으로 자기를 죽여 버리면 강도를 만나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은 누가 싸매주며 누가 그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교회로 인도합니까?
강도를 만나 죽을 만큼의 상처를 당했던 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자기의 삶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안 앞에 두 사람이 먼저 지나갑니다.
31절, 한 제사장이⋯.
제사장의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성전에서의 제사장 의무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까요? 당시 여리고성읍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합니다. 제사장은 강도 피해자를 발견했어요. 그러나 31절,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왜 피했을까요?
-강도떼에 대한 두려움이겠지요. 분명 혼자만은 아니고 일행이 있었을 텐데 도망간 것입니다.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준수의 정신 때문입니다(레 21:1~3).
그러나 생사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제사장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도의적 책임과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민 18:1-32)를 외면한 것입니다.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32절, 한 레위인도⋯. 레위인도 제사장과 함께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별된 지파입니다(민 18:1-32).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인 만큼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32절, ⋯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 버립니다. 같은 동족임에도 외면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는 오늘날의 종교와 종교인을 말합니다. 우리 식이라면, 교회와 교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은 잘 합니다. 우리는 사역에 충실한다는 것 때문에 정작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냉정하고 때로는 가해자가 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잘 하고 있으니 나 괜찮은 거지? 하면서 자기를 두둔합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잘하고 있으니 평일에 교회 밖에서는 관심을 보이고 배려를 해야 할 많은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려버립니다.
제3의 인물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그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못 본채 달아나도 누구도, 특히 유대인들은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
-평소 유대인들이 그들을 개로 취급하고 차별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33절, 여행 중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업무를 마치고 내려가는 중이기에 특별한 스케줄도 없고 자기들의 가르침에 맞게 예배에 맞게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 중입니다. 섣부른 간섭은 여행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래도 33절, 거기 이르러⋯
제사장은 아예 외면했습니다. 레위인은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고 외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도 가까이 다가가 그를 보고⋯ 여기까지는 레위인과 같은데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33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메시지성경>은 그 처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종교의 기본이 이런 마음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보고 어떤 바램도 조건도 없이 도와주려는 마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보니 사정이 딱합니다. 34절, 가까이 가서⋯ 피해자와 입장에 선 것입니다. 유대인은 나를 개 취급했지만 나는 사람으로 대접하겠다, 저가 강도당한 것처럼 나 역시 강도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 저가 피를 흘린 것처럼 나도 피를 흘리겠다, 저가 거반 죽게 된 것처럼 그 위험까지도 내가 감수하겠다, 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비용이 지출되고⋯ 스케줄에 차질이 왔다 해도 측은지심의 마음이 너무 큰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 없는 선행을 이어갑니다.
34절,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 역할도 했습니다. 기름은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른 후 싸매줍니다. 붕대가 없었다면 옷이라도 찢어 싸맸겠지요! 자기는 여행객입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를 보호해 줄 약이고 피곤을 풀어줄 기름과 포도주입니다. 급할 때 자산이자 보호제입니다. 그걸 과감히 적대적 관계에 있던 유대인에게 사용한 것입니다. 대단한 선행입니다. 사마리안 선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34절,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자기 짐승은 나귀였을 것입니다. 나귀에는 여행객의 짐이 있었고 피곤할 때 자기가 타고 갈 운송기관입니다. 그걸 제공했으니 암석들 투성이 도로에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이어 그를 데리고 주막으로 가서 거기서도 돌보아 주니라⋯ 밤새도록 도운 것입니다. 씻기고 주물러주고 걱정해주고 돌봐준 것입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35절,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 이튿날에⋯. ‘그 날 새벽에’ 일찍 떠났다는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할 일이 없거나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위해 바쁜 시간과 물질을 희생합니다.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노동자 이틀 값이지만 약 2개월의 숙박비에 해당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넉넉히 주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완전한 이웃 사랑의 전형입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되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동기에 의한 선행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을 지는 선행입니다. 이것이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입니다(요 13:1).
참으로 사람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선행입니다. 제사장보다 레위인보다 유대인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기뻐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 곳곳에 있어 대한민국이 번영하고 한국교회가 힘을 냅니다. 목회자들보다 더 헌신하고 사랑을 베푸는 무명의 사마리아인 평신도 교인들이 있어 아직까지도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상처당한 자를 돌봐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막주인입니다. 유대인이었을까요? 사마리안에게 돈을 받은 주막주인이 이 남자를 어떻게 회복시켰나? 결과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주막주인도 상처를 받은 한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주막 주인은 넘겨받은 환자를 무엇으로 회복시켰을까요?
우선 밥입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에나 주막집은 전문병원이 아니기에 치료법이 단순합니다. 약이 있습니까? 치료기구가 있습니까? 간단한 민간요법과 음식뿐입니다. 특히 병든 환자의 치료는 음식을 잘 먹이는 일입니다. 잘 먹으면 병이 낫습니다.
환자들은 병원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없다 합니다. 저는 병원 밥이 맛있는데 왜 맛없다 합니까?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에게 신라호텔음식 배달해 주세요! 맛없습니다! 아프니까 밥맛없고 밥맛없으니까 체력을 얻지 못하고 체력이 약하니 약효도 늦고 더딥니다. 체력 도움을 받아야 약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힘을 내고 회복이 빠를 텐데 체력이 약하니 회복이 늦습니다. 암환자들이 암 때문에 죽지만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로 죽는 환자들도 많답니다.
주막주인은 좋은 밥으로, 음식으로 기력을 돋우었습니다.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치유는 밥이었습니다.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먹이므로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 강도 만나 상한 사람들을 돕습니까? 밥입니다. 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우리가 상처에서 치유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근본부터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부활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었다는 확신!”(롬 4:25)
그 말씀으로 원기가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먹고 죽지 않는 떡이요, 먹는 자마다 주리지 않는 떡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떡집)에서 나셨고 밥이 되어 주시려 구유(밥통)에 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막에서 드러누운 심정으로 하나님말씀을 먹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별놈의 강도를 만났다 해도 말씀 먹고 상처받은 영혼이 시간마다 소생되어야 합니다.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환자는 ‘자신이 의사인척 병명부터 처방까지 모두 정해오는 환자’. “저는 A로 인한 증상이니까 B약을 처방해 주세요”라는 환자입니다. 인터넷 등을 통해 대충 알아온 지식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않고 먹으라는 약도 먹지 않은 채 낫지 않는다고 의사가 실력 없다는 환자는 낫기도 힘들지만 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환자들입니다.
목회자들이 좋아하는 환자는 어떤 환자일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를 신뢰하고 아무거나 주는 대로 아멘! 아멘! 입을 쫙쫙 벌리며 받아먹고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일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래야 치료를 받습니다. 손바닥에서 나오는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말씀이 보약이 됩니다. 지금 고개 숙인 심정! 드러누운 심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숙인 고개들이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우리가 먼저 경험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치료를 받아야 남도 주막으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
주막주인이 환자를 치료하는 또 하나는 상처자의 심정을 편하게 하고 들어주었어요! 두 달 동안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거예요. 강도에 대한 분노! 제사장과 레위인의 무정함과 비겁함에 대한 섭섭함과 실망⋯. 주막주인과 술잔이라도 나누며 속사정 털어놓았겠지요. 그러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몸의 상처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이게 소위 친정집 치유법입니다. 요즘은 시어머니 잔소리를 듣기 싫어 SNS에서도 탈퇴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달라진 거예요! 옛날에야 시댁이 얼마나 무서웠어요! 그래서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친정을 갑니다. 병이 들었다가도 친정에만 가면 낫습니다. 왜냐?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괴로운 심정을 들어 주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가 있는 중년여인과 없는 중년여인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다르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성령은 어머니영입니다. 교회는 친정입니다. 하소연은 기도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쉼을 얻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응어리를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이때 치료가 됩니다. 교인들이 교회 올 때의 얼굴과 나갈 때의 얼굴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영적인 친정에서 영적인 시댁세상을 향해 나갈 때 얼굴이 다릅니다. 치유가 된 얼굴입니다. 교회가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자연적인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왔는데 더 상처를 주면 어떻게 교회가 인생의 도피성이 되며 영성의 장소가 되겠습니까?
결론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을 율법사에게 들려주고 명령하셨습니다.
37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사는 25절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오만한 자세로 뽑냅니다. 27절, 율법을 잘 지켰다 자만합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알기는 잘 안다? 시험 보면 백점이겠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실천이 중요하다! 사마리안처럼 조건 없는 선행을 해라! 신학을 생활신앙으로 만들어 내라!
본문은 아주 유명한 예화이며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33년을 이 본문으로 설교하지 못했습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도무지 사마리안처럼 할 자신도 없고 그렇게 여러분에게 강요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심정에는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아직도 내게는 내 스케줄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편합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해야 할 때입니다. 왜? 우리 주변에 상처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안과 같은 선행을 기대하면 할 수 없지만 말 한마디로라도 건네주면, 손 한번 잡아주면 치유될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그런 선행을 하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선한 사마리안교회! 창립 32주년을 맞는 늘빛교회! 친정집을 넘어 그런 교회를 기대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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