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십자가 영성
빌립보서 3장 4~9절
서론
여름에 영성인물시리즈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시리즈 설교를 마감하면서 옛날 목사님과 지금 목사님들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옛날 목사님들은 3방(房)목회였습니다.
심방(房)-열심히 집집마다 심방했습니다. 교인들도 심방을 사모했기에 정스런 목회였습니다.
책방(房)-신문을 읽고 주석 펼쳐놓고 설교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니 진국설교가 나왔습니다.
골방(房)-목사님들, 기도 참 많이 했습니다. 기도 통해 담금질된 인격이 삶에 묻어나왔습니다.
지금 목사님도 변함없이 3방(房)은 있어요! 3방(房)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인터넷방(房)입니다. 요즘 목회자들 인터넷 선수들입니다, 젊은 목회자일수록 성경보다는 인터넷 정보 의존율이 높습니다. 설교도 그래요! 묵상보다 모든 설교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습니다.
족방(房), 족구(足球)입니다. 승려들에게 소림사 축구가 있다면 목사님들에게는 군대족구가 있습니다. 세상에~ 노회 교역자 겨울수련회에서 새벽 4시까지 헤드라이트 켜놓고 족구합디다.
노래방(房). 평생 찬송가만 부르던 목사님들도 노래방을 찾고 찜질방, PC방을 찾습니다.
달라진 3방(房) 목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목사님들 학벌이 화려해졌습니다. 성직자들 중에서 목사님들 학벌이 가장 화려합니다. 우리노회만 해도 박사학위 목사님들이 여럿 됩니다. 학벌이 좋고 실력이 좋고 집안배경이 좋으니 당연히 설교를 잘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기업경영 마인드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타목사, 대형교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잃었을까요? 영성을 잃었습니다. 인물도 학벌도 배경도, 스킬(skill. 기량, 기술)⋯ 기능적인 능력은 많은데 영성이 옛날 같지 않습니다. 가볍고 계산적이고 지나치게 똑똑해요! 목사님들은 똑똑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에요! 한 발작 앞서가는 똑똑한 목회자들보다 차라리 시대보다 한 발작 늦게 가는 진실된 목사님들에게서 영성을 더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영성이 마르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일곱 차례에 걸쳐 인물영성 설교를 했습니다. 물에 색깔이 있듯 영성에도 색깔이 있습니다.
압살롬. 외모는 매력적이지만 거짓된 영성, 위장된 영성으로 칙칙한 회색깔입니다.
사울왕. 거룩한 영성으로 시작하지만 인본주위로 흐르면서 고름 색깔의 영성입니다.
다윗의 영성. 생활에 뿌리를 내린 영성, 회개하는 순수한 영성으로 노란색 영성입니다.
아브라함의 동심영성.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을 받은 영성이기에 하늘색 영성입니다.
모세의 하나님영광 영성.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여 얼굴이 빛났기에 붉은색 영성입니다.
세례요한의 빈들의 영성.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영성으로 검정색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영성.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순교로 표현한 영성이기에 흰색깔의 영성입니다.
여러분의 영성은 어떤 색깔입니까? 자기 색깔의 영성을 상상해 보세요!
오늘은 마지막 시간! 바울의 십자가 영성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영성. 오직 십자가만을 앞세웠기에 피의 영성, 빨간 색깔의 영성입니다. 기독교신학은 바울신학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과 유대 전승을 통해 예언되어진 메시아개념을 예수님이 우리 조상들이 기대하던 그 메시아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바라보았던 그 분이다! 라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했기에 기독교신학을 바울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신학의 중심은 한마디로, 십자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예수님의 부활로 의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血)! 이것이 바울의 영성색깔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한마디로, 성골(聖骨)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혈통은 출생 8일 만에 할례 받고(창17) 이스마멜은 13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방인은 유대교로 개종 시에 할례 받습니다(행16:3). 바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도 달리 율법에 정한대로 팔 일만에 할례 받은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으로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이스라엘 태생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권리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베냐민의 지파요⋯.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입니다. 사울.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베냐민지파입니다. 베냐민지파는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다윗 왕조에 신실하게 충성했으며 바벨론 포로 때에는 성전건축을 위해 유다와 레위지파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느 11:7-9). 바울은 베냐민지파임을 매우 자랑하며(롬 11:1) 순수한 유대인임을 밝힙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씨’로서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인이다, 혈통-히브리말-관습을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이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파는 가장 엄격한 유대종파로 구약율법은 물론 구전이나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을 연구하며 따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집안에 태어나 바리새파에 입문했고 가장 존경받는 선생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했습니다(행 22:3). 스스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참 바리새인으로 자신합니다. 그래서 성골(聖骨)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교회 핍박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이렇게 자랑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과 기준을 지켰기에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합니다. 왕족되기에 조금도 흠이 없는 성골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4절,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혈통이나 족보나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종교인! 유대율법에 박식하고 흠 없이 지켰던 사람!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적이 있었나요? 그렇게 하나님 일에 열심 내었으면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 적이 있나요? 다윗처럼 자기의 죄로 밤새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회개하며 울어보았던 적이 있나요? 그는 종교심은 있었지만 진정한 영성은 없습니다. 가말리엘 대박사의 수제자였지만 종교성과 영성의 차이를 몰랐습니다.
종교성은 사람이 출생하면서 타고 나온 종교적 성정(性情)이나 감정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종교인은 이걸 강하게 인식하는 이들이고 무종교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차이만 있을 뿐, 종교성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아도 개인에게 자리 잡은 종교 DNA입니다.
기독교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성됩니다. 바울은 종교성도, 영성도 있었지만 하나님으로 오는 영성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자기의(義)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으로 오는 영성이 흘러나오지 못했습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살리는 종교가 아니라 죽이는 종교의 선봉장이 됩니다. 바울은 믿음이 큰 것만큼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종교인이 무서우면 안 됩니다. 남들에게 무서운 감정 들게 하면 그건 종교가이지 거룩한 하나님의 영성이 아닙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직설>이라는 대담집에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부작용 중의 하나는 예수를 믿는 게 무섭다는 것이다, 교회 안의 신앙 좋은 사람은 대부분 무섭고 아량이 없다!”
왜 그런가요? 영성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 유교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유교인들 보세요! <삼강오륜>으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평생 배우고 가르치지만 겸손하거나 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른 말만 하지만 독해요. 따뜻하지 않습니다. 한국 유교의 무서움은 옳다는 사람들이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옳음이 오히려 무서움의 대상입니다.
유대교회 율법이 유(대)교의 <삼강오륜> 가르침과 흡사한 부분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믿음이 좋은 것은 확실해요! 하루에 세 번 기도생활! 일주일에 두 번 금식! 안식일-십일조생활 철저히 준수! 얼마나 훌륭해요! 그런데 존경은 받지 못했어요!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에요!
나하고 다르면 무조건 정죄해요! 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어찌 사람이 완벽할 수 있나요? 내 눈에 거슬리면 나쁜 사람을 만들어 정죄합니다. 집단 이지메입니다! 좋은 종교인이라면 측은지심을 가져야 해요! 비판하다가도 불쌍한 생각 들면 가르치고 위로하고 힘을 내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틀리면 꼴을 못 봐요! 무자비하게 정죄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요!
거기서 멈추지를 않아요! 죄인으로 정죄된 그들과 자신을 우위비교하면서 비참하게 만들고 자기를 높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목격했던 바리새인과 세리 모습이 그렇잖아요? 바리새파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나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광고합니다. 남을 비참하게 만들어 자기의 의(義)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장 못난 짓을 한 것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이기에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율법으로 비판과 정죄만을 일삼습니다. 스스로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었다고 하지만 그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아니라 자기 율법의 만족을 위한 자기 열심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영성이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던 종교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가장 악랄한 죄인들을 처형하는, ‘뽄때’를 보여주는 형틀입니다. 전기고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인간이 만든 가장 처절한 형틀입니다. 육체적-정신적-영적인 고통의 ‘모듬’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지독한가, 를 인간 스스로 보여준 자기 고발도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심판을 보여줍니다. 사람에 대한 죄를 범하면 십자가의 형틀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의 영원한 심판 불길로! 십자가는 그걸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죄의 다른 말은 ‘나’입니다. 인생의 결정권을 내가 갖고 내가 하나님 노릇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결국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타인의 이익이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도 무시해 버리는 ‘에고이즘’이 죄입니다.
도둑질이나 살인⋯ 등은 이차적인 죄입니다. 근본적인 죄는 인본주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본성이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 상태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대로 자기를 알았습니다.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에 비해서만 상대적으로 의인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 하면서도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압니다. 내 속에 죄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랴~
이것이 십자가 영성입니다. 십자가 영성은 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던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전에는 험담하는 재미로 살았지만 지금은 부끄럽습니다. 영성이 작동되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영성입니다.
또한 십자가 영성은 죽는 것입니다. 누군가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면 대번에 들어오는 마음이 죽음입니다. 저 사람 죽겠구나~ 십자가에서 살아서 내려오는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납니다.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죄를 인식하게 되면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죄에 대해 죽고⋯ 자아에 대해 죽고 혈기가 죽고⋯ 교만과 자만심이 죽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영성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성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전의 자랑거리들에 대해⋯
8절,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배설물’은 ‘음식 찌꺼기’ ‘쓰레기’ 원본문의 뜻은 ‘개의 똥’을 말합니다. 개똥같이 여겼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성경>은 “내가 명예로이 여겼던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바울이 왜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쓰레기로 버립니까?
8절, “⋯그리스도를 얻고”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이전의 삶 전체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자랑거리를 버렸는가, 자기자랑은 인간수준의 자랑거리요 자기만족의 하찮은 의(義)였음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찬란한 의로움의 옷 앞에서 자기 의(義)는 누더기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아이가 자랑거리였던 풍선이나 장난감, 딱지⋯ 등을 버리는 것처럼 내 의의 옷을 벗어던져버린다! 자랑거리만 배설물이 아니라 자아와 혈기⋯ 종교성을 버리고 예수님 십자가의 의(義)로 갈아입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부터 바울신학은 율법종교가 아니라 십자가 영성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섬김⋯ 등이 흘러나오며 이후부터 나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영성은 이제까지 전했던 일곱 명 영성가들의 영성을 모아놓은 영성의 묶음채입니다. 영성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의 영성이 없는 영성은 위장된 영성, 거짓된 영성, 뒤틀린 영성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론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가는 중간, 교회사적으로 4세기~5세기경을 사막의 교부시대라 합니다. 세속주의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오자 영적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사막으로 들어가 영성을 정화시키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세상을 정화시키는 불꽃운동을 했습니다.
사막 영성의 3대정신이 고독, 침묵, 기도입니다. 힘든 사람들이 사막의 영성가들에게 찾아와 괴로움을 토로하면 저들은 딱 한 마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합니다! 그러면 저들도 침묵과 고독과 기도를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정화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돌아와 새롭게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외에 더 많은 것들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다 하나님을 놓치고 사람들의 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지 비움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예수 정신! 예수 영성으로 새로워질 때 한국교회는 다시 세상을 정화시키는 불빛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만한 대안세력이 대한민국에 어디에 있습니까? 이번 설교가 교회의 제도와 직분, 사역으로 복잡했던 우리의 영성을 깨끗하게 하는 설교가 되기를 부탁드리면서 시리즈 설교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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