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순교 영성
사도행전 7장 54~60절
서론
요즘 한국교회 걱정되지요? 걱정도 하고 비판도 할 건 해야지만 아예 등을 돌리거나 낙심하지는 마세요! 사람이 사는 사회는 어디건 부패하고 타락하는 일정영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원형이라는 초대교회 보세요! 2장에서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가 5장에서 교회직분에 대한 욕심, 성령은사를 돈벌이로 생각하는 소비주의가 들어옵니다! 6장에는 파벌이 생깁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 여인들 간의 불평은 히브리파과 헬라파 지도자 간의 대리전입니다.
지상교회는 죄와 무관하게 성별된 곳이 아니라 항상 죄와 혼재합니다! 거룩성이 강하면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가 되고 죄성이 강하면 타락한 중세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이 세운 종교교단이 아니라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다른 종교에는 없는 특성이 있는데 그게 예수의 피(血)라는 자정능력입니다
.
바다에 온갖 쓰레기가 흘러오고 오염물질이 모이지만 소금이라는 자정능력이 있어요. 바닷물의 3% 염분이 바다의 오염을 막아줍니다. 교회자체에 오염을 막아내는 자정능력이 있습니다.
교회의 자정능력! 아나니아 부부의 속임의 죄에는 베드로의 권위로 막아냈고 정화시켰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속였느냐?”
그 한 마디에 부부가 즉사했습니다.
그러자 초대교회는 겁을 먹었습니다. 죄성은 잠시 들어갔지만 대신에 전도문이 좁아졌습니다. 6장에서 다시 죄의 쓴뿌리가 돋아나요! 이번에는 파벌입니다. 이번에도 한 쪽을 즉사하게 했을까요? 아니에요! 이번에는 시스템으로 막았습니다. 그 시스템이 집사제도입니다. 집사제도는 사역 분담입니다. 재정은 평신도들이 하고 목사는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하겠다! 그랬더니, 이후에는 별다른 죄성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권위로 징벌하고 시스템이 잘 운영된다고 문제가 없고 죄가 없나요? 사회문제가 생기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매뉴얼이 없어 그런다고 해요! 그래서 ‘김영란법’이라는게 나왔어요! 때늦은 감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법을 제정한 나라꼴이 유치합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시스템이 좋고 매뉴얼이 좋아도 사람이 매뉴얼대로 하지 않으면 사고는 납니다. 교회 안에도 김영란법 들먹일 때가 올까요? 도서비는 얼마 이상 안 된다, 주레비는 얼마 이하다…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없는 로봇 세상이 됩니다.
초대교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죽음, 교회 파벌 이후에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지요? 물론 나중에는 교리문제 율법해석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지만 이건 죄와는 다릅니다. 초대교회가 순수하게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권위도 있고 시스템도 있었지만 이보다 더 나은 뭔가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이자 순교자의 피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구원공동체 거룩공동체 예배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피가 흘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거룩성을 유지하려면 예수님의 피가 전승되어야 하는데 그 전승은 순교, 즉 교인들의 희생이라는 핏줄을 통해 교회 안에 흘러 다니고 그 피가 교회를 교회답게 신자를 신자답게 성결하게 합니다.
1. 스데반의 영성은 사도급(級) 순교영성입니다.
원래 스데반은 믿음이 좋았습니다.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니골라를 택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사도급입니다. 스데반은 안수집사지만 장로급 안수집사요, 사도급 안수집사입니다. 자기직분보다 훨씬 크게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안수집사지만 장로님들보다 더 열심하고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집사인데도 권사보다 더 열심하는 분들이 있고 권사님인데 장로급 권사님들이 있어요! 그게 제대로 된 교회직분입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것! 아나니아가 직분 자체를 계급으로 탐내다 아웃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어찌 장로급 안수집사, 사도급 안수집사일까요?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7장 전체, 성경을 꿰고 있어요! 베드로의 설교수준입니다. 그러니 청중들의 반응도 같아요!
베드로.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스데반.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은 어쩌다 붙잡혀 순교한 것이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은 어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가는 것을 구경하다 시쳇말로 재수가 없어 억지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스데반은 어쩌다가, 그게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그는 구제와 재정 담당의 7인위원회 소속집사입니다. 말씀 전파는 사도들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굳이 밖에 나가 전도하고 말씀을 증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실에서 재정 관리하는 ‘산수집사’로 믿음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직분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습니다.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그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것이 순교의 길입니다. 처음부터 순교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재정을 담당하고 구제를 하는 업무의 7인집사가 되지 말아야지요. 스데반은 일과 함께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사랑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순교를 한 겁니다. 그건 사도들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러니 장로급 집사이고 사도급 안수집사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본받지 말라! 합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려면 죄에 대해 저항해야 하고 그 어려운 길이 순교입니다. 일도 좋지만 예수 사랑에 더 열심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그런 순교 피가 초대교회를 자정시킨 것입니다. 이런 피가 한국교회에 수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많은 직분자들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2. 스데반의 영성은 예수님급(級) 순교영성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종교심이 아닙니다. 종교심이었다면 자기 믿음을 지켜내는 개인적인 강한 믿음으로 끝났겠지요.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용서 기도를 내보냅니다. 제2의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는 아직도 생생히 전해졌습니다.
이제 저들은 스데반의 기도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인지 스데반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본성을 드러내는데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왜? 그 안에 예수님의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기까지 충성된 영성이요 그것은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영성입니다.
스데반은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과 함께 성령 충만해졌습니다. 이게 진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요청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독자적인 일을 하지 않습니다. 100%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합니다. 십자가로 죄를 알게 하시고 의를 알게 하시고 심판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적용해 나가십니다. 마음을 감동시켜 예수님을 믿도록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예수님 사랑으로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예수님 더 알게 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예수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말씀 안에서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집사였지만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용서 기도가 나왔고 성자 예수님급 집사가 됩니다. 스데반에게 직분은 큰 의미가 아닙니다. 직분보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 중심 예수님의 성령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독립시켜 버린 거짓 성령들이 난무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성령이 내 성령이요 내 기분이요 내 감정입니다. 거룩한 성령이 신령 하늘님의 성신으로 둔갑되어 성령 충만한다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직분만 보이고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머리를 깎인 삼손처럼 세상의 물레방아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영성이 욕심 꾼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축복을 전제한 수고와 봉사가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매는 희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과 하나되어 순교적 희생이 나타나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영으로 충만한 그 예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신앙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죽기까지 하면서 예수님 정신을 실천하려던 스데반! 이런 피가 한국교회에 수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많은 직분자들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3. 스데반의 영성은 바울급(級) 순교영성입니다.
스데반은 바울급 집사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굉장한 사람입니다. 베냐민파 히브리인, 바리새파, 당시 석학(碩學) 가말리엘 문하생, 여기에 출생 이전에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집안 자체가 상류층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13권의 성경을 저술했습니다. 성경 권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의 진수(眞髓)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저술했습니다. 그가 개척한 교회는 이루 말할 수 없고 그가 길러낸 초대교회 지도자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더구나 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도행전 끝장에 미완(未完)으로 남겨지는 바울의 로마행이 결정적이라 생각됩니다.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기독교 2천년사에 최고의 신학자요 전도자입니다. 세상은 바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도행전 28장 바울을 실은 배가 로마로 가지 않고 아시아로 갔다면 오늘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예수교라 하지 않고 바울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고 바울은 그걸 교리화 신학화 체계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들으면 펄쩍 뛸 일입니다. 바울은, 나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겠다, 선포할만큼 예수님과 그 십자가 복음에 완전히 매료된 사람입니다.
이렇게도 굉장한 바울! 세상은 언제나 1등만 기억하지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2등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2등 없는 1등이 어디 있습니까?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안드레 없이 어찌 베드로가 있습니까? 무디를 주님께로 이끈 캠밸 선생없이 어찌 무디가 있습니까? 셜리반이 없이 어찌 핼런캘러가 있습니까?
스데반은 죽습니다.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재정과 구제를 맡아서 교회살림 하라고 세워놓았더니 말씀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굳이 순교하지 않아도 되는데… 순교는 사도들의 몫이었는데…. 스데반은 살아서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아까운 희생이 아닙니다. 스데반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스데반은 펄쩍 뛸 것입니다.
“내 순교를 희생이라 마세요! 나는 희생이 아니라 사울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이었소!”
7장 58절을 보세요! 8장 1절을 보세요! 의사 출신 누가! 상당히 꼼꼼한 사람입니다. 그가 굳이, 왜,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바울의 이름을 등재하고 있습니까?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데 어느 면으로든 기여를 했습니다. 이론을 제공했던지 참람자를 향해 돌을 던졌던지… 스데반의 최후를 지켜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사람을 죽이는데 동참해놓고 그를 쉽사리 잊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덤벙대는 베드로가 아니라 꼼꼼한 사울이었기에 더욱 스데반의 모습은 그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원수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스데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건 예수님의 정신이 그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순교자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 그가 평생을 자부심으로 알아왔던 유대교에서는 이런 가르침도 없었고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가 기독교 박해자에서 기독교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으로 180도 선회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물론이지만 예수님을 따라 실천의 삶을 살았던 순교자 스데반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행사했음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젊은 나이, 아까운 나이로 순교했지만 바울을 낳았고 바울 신학을 낳았고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낳은 사람입니다. 비록 요절했지만 바울급 집사가 되는 것입니다.
직분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점점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영광은 내가! 십자가는 계속 주님이!
그러니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점점 죄의 늪-직분은 계급화되고 교만하고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려 하기에 사람의 목소리는 있어도 예수님의 음성이 함몰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초대교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과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씀의 힘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교영성이 한국교회에 전수된다면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희망이 있고 거룩한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한국교회 130년! 1천만 명 이상의 대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세계기독교의 기적입니다. 요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재림신앙과 순교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오신다! 는 재림신앙은 굶주림, 배고픔, 땅에서 희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희망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면⋯ 중동에 돈 벌러 간 남편이 석유 달러 들고 오면 고생 끝! 이라고 돈 들고 귀국할 남편을 기다리는 순결한 심정으로 예수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오르지 교회에 올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저력이 예배당 건축을 이루어 냅니다.
또 하나는 순교신앙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순교자가 2,600여 명으로 추산되며(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가운데 600여 명의 명단이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에 헌정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순교의 피를 먹고 한국교회라는 나무는 엄청난 나무로 자랐습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로 거룩해지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가 말라버렸습니다. 한국교회라는 나무가 시들고 있습니다. 순교적 마음으로 믿음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똑똑하고 믿음은 좋은데 예수님 닮아내는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스데반의 순교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속사적인 죽음이면서 한편으로는 순교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에서 떠나면 사업이요 교회경영입니다.
우리 집에 감나무가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어떤 때는 감이 500개 이상이 열립니다. 금년에 한 개도 안 열렸어요! 나무가 잎이 완전 병들었어요! 이유가 뭘까요? 뭐가 부족했겠지요!
한국교회 나무는 피를 먹지 못해 타락하고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정결하게 되었지만 이제 내 피로 교회가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충분하지만 이제는 내 피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적 희생정신의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기도생활! 양보와 배려! 손해! 이런 믿음들이 없다면 그건 혼탁한 피가 교회 안에 가득 찬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부흥을 외칠 때가 아니라 교회의 정결을 외칠 때입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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