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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세례 요한의 빈들의 영성(마태복음 3:1~1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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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

세례 요한의 빈들의 영성

마태복음 3장 1~12절

서론

지난 주일은 아론의 종교와 모세의 종교, 아론의 영성과 모세의 영성을 살폈습니다. 아론의 종교는 소비자중심의 종교요 교회입니다. 내 중심이기에 교회도 나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도 내 요구사항에 부응하는 신이어야 합니다. 아론종교의 신은 사람들에 의해 제작되고 조종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32:1)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라는 주문입니다. 예배당 지어줄께요! 헌금해 줄께요! 봉사해 줄께요! 그러니 하나님도 내 행복과 성공을 책임져 주시오! 자식 잘되게 해줘요! 그러면 나도 잘 할께요! 신자가 아니라 내가 돈을 내는 소비자 입장에서 빅딜-거래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성경에도 없는 금송아지 하나님을 만들어 냅니다.

 

모세의 종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성입니다. 내게 유익되고 성공기회가 왔어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좋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집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먼저입니다. 내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명예가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나를 희생하려는 마음! 이것이 모세의 영성, 하나님 영광만을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자기 본능적 욕구를 뿌리치고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그걸 내려놓을 수가 있었을까요? 시내산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세상 민족시조라는 영광은 찰라에 불과한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매도되면서 나만 영광을 누린다? 그런 달콤한 조건을 받아들이기에는 모세의 영성은 너무 정결했습니다.

 

오늘은 영성인물시리즈 여섯 번째로, 세례 요한의 빈들의 영성입니다. 누가복음을 봅시다.

 

1:5,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사가랴는 히브리이름으로 스가랴 당시 흔한 이름으로 아비야 반열제사장입니다(대상 24:10).

아내 엘리사벳,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론의 자손이니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의 아내 이름과 일치합니다( 6:23). 아내는 아론 직계로 제사장 집안에서도 상당한 가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 가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금수저입니다. 평생 먹을거리, 직장 걱정 하지 않고, 안락함이 보장된 다이아몬드수저입니다. 거기다 세습입니다.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제사장 가문의 일원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제사장의 모든 특권을 내려놓습니다.

 

80,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일찍 빈들에서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충만 분위기가 만들어 낸 선택입니다.

어머니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41절 하반절,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67,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그러니 요한이 태중에서 얼마나 성령 충만했겠어요?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임신 6개월 태아가 성령 충만으로 뛰놀고 임산부가 태동을 강렬하게 느끼며 성령 충만함이 전이(轉移) 될 정도라면 요한은 어려서부터 굉장한 영성입니다. 그러기에 부패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으로 사역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성전과 종교는 예수님도 분노하실만큼 엄청 부패했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스스로 제사장 직분을 포기하고

 

80, 빈들로 나갔고 빈들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요한의 영성은 빈들-광야의 영성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광야는 단지 황량한 사막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광야 미드르바로 어원이 다바르에서 나옵니다. ‘다바르는 입()-말씀입니다. 광야와 입이 같은 어원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광야 미드르바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바르 현장입니다! 광야는 초장도 없고 소산물, 경작지도 주택도 없습니다. 사방이 없는 것뿐! 소산물도 없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 다바르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왜 광야로 내보냈습니까?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그걸 배우라고! 듣고 받고 배운 말씀으로 훈련하라고 광야 40년을 살게 한 것입니다.

광야는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곳입니다. 문명이 묻지 않는 곳,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스케줄이 필요 없습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잡니다. 바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는 오직 하나! 아무 것도 없고 사방이 침묵하기에 자연의 고요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 다바르를 듣습니다. 다바르를 듣지 않으면 광야에 살지만 광야가 아닙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은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기에!

요한이 그래서 일치감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제사장 아들로 태어나, 특히 외가로는 아론 대제사장 직계! 대성(大成) 확률이 많습니다! 성전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일거리! 사람들의 존경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없었어요. 하나님의 음성!

 

예루살렘 성전 울타리 안에서 사람소리들이 너무 컸습니다. 제사장들끼리 음성이 너무 컸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 다바르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직업 제사장이거나 세습 제사장으로 만족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머니 태중에서 구세주의 어머니를 감지하고 그 안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예민한 영성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이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하나님이 없는 혼탁한 장소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출가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거기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는 빈들의 영성가가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요한은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했을까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3장으로 갑니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유대 광야 빈들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기인(奇人) 생활을 합니다. 먼저 복장을 보세요!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요한의 옷은 낙타의 가죽이 아니라 낙타털로 거칠게 짠 옷입니다. 가죽 띠. 헐렁한 겉옷을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입니다. 음식을 봅시다.

 

4,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지금까지는 식용메뚜기로 해석했지만 성경학자들은 쥐엄나무 열매로 봅니다. 요한이 살던 지역에는 메뚜기가 많지 않았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쥐엄나무를 메뚜기나무라 불렀습니다. 쥐엄나무는 양식이 떨어졌을 때 먹는 가난과 궁핍의 상징, 돼지먹이 열매입니다( 15:16).

석청. 돌의 꿀? 이건 그냥 꿀이 아니라 종려나무 열매가 돌 틈새에 떨어져 꿀이 됩니다.

요한은 제사장 아들로 왜 이런 최소한의 의식주를 선택했을까요? 제사장은 30세에 임명되고 부러움이 되는데 왜 이렇게 사서 고생하고 복장과 음식마저도 요상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요한이 광야로 들어온 이유를 알면 답이 나옵니다. 요한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의 기도소리, 제사객들에게 죄를 사한다는 엄숙한 선언! 서기관들의 성경낭송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특권, 소위 갑()을 내려놓고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광야 행()은 오직 하나! 다바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삶이 단순해야 합니다. 빈들은 채움이 아니라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빈들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속을 채우고 머리를 채우려다보면 음식이 있고 책을 사야 합니다. 그러면 돈이 필요하고 공급을 위해 사람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면 모양새를 내게 되고 뭔가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복잡해집니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광야를 찾은 것입니다. 내가 말하려고 찾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심, 다바르~를 듣는 미드르바가 되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복장 낙타털옷,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메뚜기와 석청~ 하나님 말씀에만 올인하려고 모든 것을, 소유를 비워냈습니다.

 

우리 광야는 어디입니까? 광야가 있어야 깨끗한 영성이 있습니다. 신약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적 광야-미드르바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다바르가 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들으려 하지 않고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소비자! 내게 맞는 설교! 내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찬양! 나를 힐링시켜다오~ 하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그 화려한 예배당에서도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리 큰 예배당은 왜 건축했나요? 여러 사람 고생시켜가면서!~ 주변 주민들에게 원망 들어가면서~ 작은 교회 목사들 주눅 들고 좌절감 심어주면서 왜 그리 큰 예배당, 수만 명의 교회를 만들려고 하나요?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아론의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존재하게 해다오!

큰 교회 비판하고 작은 교회 두둔할 생각 없습니다. 큰 교회에 대해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큰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할 수 있고 작은 교회도 자기 욕심과 아집으로 돌처럼 석화(石化) 수 있습니다!

큰 교회는 무조건 옳고 작은 교회는 무능하다, 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작은 교회라고 무조건 옳고 큰교회라고 무조건 나쁘다고만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크다! 작다! 는 것은 사람들의 잣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말하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영광으로 빛나는 교회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려면 비워야 합니다. 교회도 비워야 하고 목사도 비워야 하고 모든 신자들도 교회 안에서 자꾸 비움을 연습해야 하고 비우는 자기해체의 작업들을 죽을 때까지 수고해야 합니다.

 

빈들에서 오래도록 자기를 비우는, 요한! 그러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기득권자입니다. 돈과 종교와 정치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 밖에 나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세력을 향해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당시에는 욕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니 9,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꽉 찬 그들에게 에덴에서 아담부부를 타락시켰던 뱀의 자손이라는 말은 욕중의 욕입니다. 위선과 변절, 기만으로 길들여진 주제에 무슨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바리새파-사두개파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습니다. 종교죄목을 걸면 현장범입니다. 그럼에도 요한이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할 수 있었던 것은 빈들의 비움 영성입니다. 그에게 아내가 있나요, 부양할 자식이 있습니까? 제사장 월급이 있습니까? 그의 교인들이 있습니까? 어차피 아무 소유가 없으니 죽으면 끝입니다. 빈손이니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왜 무섭습니까? 집안에서 왜 무섭습니까? 가진 것이 없으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대형교회가 왜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합니까? 큰교회 목사님들이 왜 세습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예배당이, 교회가 너무 큰 것입니다! 남 주기가 아까운 것입니다.

 

사람을 내세우는 것! 조심할 일이지만 MBC 앵커 출신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 3년 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출석 교인이 1500명에 육박하자 교회 분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인근 2곳을 빌려 따로 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계층과 권력이 생기고, 그것이 시스템화하면 교인과 하나님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 쉽습니다. 한국의 대형 교회가 장점도 갖고 있지만 권력화하면서 목회가 아니라 정치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가 커지는 걸 하나님의 축복이나 목회자의 능력이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흩어지려고 합니다.”

 

비움의 신앙이요 비움의 목회입니다.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요한은 더 이상 뺏길 것도 없고 내려놓을 것도 없으니 기득권을 향해 용감히 선포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비움의 선지자였기에 물러설 때가 되니 물러섭니다. 제자그룹도 있고 청중이 있습니다. 청중만큼 큰 힘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스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 무대로 올라서자 조연으로 비켜섭니다. 지도자로서는 정말 인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머슴살이도 황송하다고 자신을 낮춥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비켜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자식들의 신앙에서 양보합니까? 자식들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공해야 내 노후가 편하다는 사고를 비워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아론의 소비종교, 나를 충족시켜 주는 금송아지 하나님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자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 영광으로 내 욕심을 숨깁니다. 내 혼탁한 영성을 요란한 말로 숨기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주차장빌딩건축회사 <팀하스>의 하형록 회장은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름 높이는 삶은 의미가 없다. 나를 비우고 헌신하면서 타인을 위한 삶이 존재가치가 있다

 

이게 비움입니다. 그도 한 때는 세계최고의 건축회사에서 29세에 중역이 되고 33세에 엄청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뉴욕 방면 3차선 고속도로에서 심실빈맥으로 순간 기절을 합니다.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깨어나 고속도로 갓길로 차를 세우고 위기를 모면하고 두 번의 심장수술에서 생각이 변하고 내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믿음이 바뀝니다. 자동차 사고와 심장이식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미드르바-광야였고 모든 것을 비워내니 하나님께서 세계 최고의 기업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가 주인이 되고 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으로 신앙체질이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영성이고 신앙심입니다.

결론

세례 요한은 그렇게 광야-미드르바에서 하나님의 음성-다바르를 들었습니다. 매일 듣기만 하면 뭐합니까? 그는 그렇게 자기를 비우는 삶을 살면서 말씀을 담았고 그 말씀을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어차피 잃을 것도 없었고! 그래서 용기 있게 전했습니다.

요한은 당시의 부패와 불의의 시스템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의 외침 때문에 헤롯왕에게 참수당합니다. 그것도 권력의 비도덕적 행위를 비난하다 잔칫날 음탕한 여인의 춤의 대가로 허망하게 죽습니다. 죽어도 치사하게 죽은 것입니다. 요한은 진정 치사하게 죽은 것입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11:11)

 

예수님께서 내린 결론입니다. 요한의 비움 영성이 예수님의 영성이고 불의에 저항하고 목숨을 던진 요한의 영성의 예수님의 십자가 영성이기에 예수님은 요한을 최고로 친 것입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요한의 빈들의 비움 영성, 많이 비웠던 만큼 누구도 부럽지 않고 두렵지 않게 살았던 세례 요한이 참 그리워지는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되어드려야 합니다! 비움 영성 맑은 영성으로 주변을 맑게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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