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 사울과는 달랐다!
사무엘상 24장 4~7절
서론
여름설교는 영성을 주제로 하는 인물시리즈설교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영성이 뭔지, 파악 안 되는 분들이 있지요? 영성과 성화의 차이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영성은 무엇인가? 너무 신학적으로! 깊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영성은 인성(人性)의 반대어입니다. 인성(人性)은, 사람의 성품,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행동의 특성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성이지요! 인간성은 성격입니다. 성격이 좋으면 인성이 좋다, 라고 말합니다.
인성이 사람 성품이면, 영성은 하나님의 성품! 속성! 성질! 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당신의 성품, 신의 성품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영성이 있고 거듭나지 못했거나 비신자들에게는 원칙적으로는 영성이 없고 인간성만 있습니다. 이것이 성격이고 일종의 정신입니다.
그러면, 영성과 성화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영성-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오지만 내 안에는 원죄의 인간성도 있습니다. 원죄 인간성이 거룩한 영성을 흐리게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죄된 비(非)영성의 세계입니까? 듣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으로 맑은 영성이 흐려지고 혼탁해집니다. 성화는 더러운 영성의 찌끼들을 닦아내고 걷어내는 과정입니다.
영성이 유리창이라면 성화는 유리창을 닦는 행위입니다. 현대식건물 유리창이 깨끗하고 투명해도 먼지투성이 세상에서는 먼지가 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계속적으로 닦아내야 깨끗한 유리창이 보존됩니다. 영성의 때, 찌꺼기들을 걷어내는 작업, 버리는 작업이 성화입니다. 그러기에 성화가 없는 영성은 맑은 영성, 깊은 영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은, 사울의 영성입니다. 사울은 영성으로 시작했다가 인성, 그것도 악성(惡性)으로 인생, 종칩니다. 다윗과는 너무 다른 길로 끝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사울은 잡음(雜音)을 듣고 다윗은 영음(靈音)을 듣는다.”
“사울은 광야영성이 없고 다윗은 광야영성이 있다.”
“사울은 접신여(接神女)에게 묻고 다윗은 하나님에게 묻다”
오늘은 다윗의 영성입니다.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출발이 좋지 않습니다. 사울은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했습니다(삼상 9:2). 그러나 영성이 소멸되어 버리니 그 잘난 외모와 외양이 허세덩어리입니다. 다윗도 잘 생겼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무엘이 왕을 선택하는 초대의 장소에 일곱 형은 갔는데 다윗은 양을 돌봅니다(삼하 16:11).다윗을 왕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성품이 너무 어질고 예술을 사랑해서 양이나 지키는 목자이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 자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만이 아니라 형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 전투장에 왔을 때 다짜고짜 나무랐습니다(17:28).
이스라엘에서 왕은 전투를 잘 하는 용사이지 목자는 아닙니다. 수금이나 시편을 논하는 막내를 시시하게 보았던 형들의 언사입니다. 그 날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일약 스타가 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노래 한 마디로 다윗의 인생은 시련과 고난으로 내 몰립니다. 사울이 얼마나 심하게 미움의 눈! 살의의 눈으로 주목하는지(18:9)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억울합니다. 골리앗을 무찌르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사위로 삼았으면 사위대접을 해주어야 하는데 평생 대적질입니다. 20여년 가까이 시달리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같이 덤비겠지요! 그러면 같은 망했을 거예요. 다윗은 사울을 벤치마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을 보면서 반대로 행했습니다.
1. 다윗은 영음(靈音)을 듣고 사울은 잡음(雜音)을 듣다
사울 왕은 여인들 노래 한 마디에 국정(國政)도 장인노릇도 포기하고 오직 다윗만 주목합니다. 다윗을 ‘요주의인물’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귀는 여론의 향배만 따라갑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하나? 다윗에 대해서는 뭐라 하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사람만 바라보며 영음이 아니라 사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자연히 영성이 떠나기 시작하고 뒤틀린 영성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다윗은 달라요. 사람들 소리는 사람들 소리일 뿐입니다. 만만이라는 노래에 우쭐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하늘 소리고 무엇이 사람 소리인가, 그걸 분별했어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장수들이 재촉해요.
4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소서”
절호의 찬스, 죽여서 왕권을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귀신이 들리고 미친 왕으로 행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왕은 왕입니다. 3절, 사울은 다윗이 굴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용변을 봅니다. 얼마나 채신머리없습니까? 미친 왕, 왕좌가 아니라 쭈그리고 앉아있는 원수라면 단 칼에 베어도 됩니다. 다윗은 기회가 왔어도 죽이지 않습니다. 흔적을 남기려 겉옷자락만 살짝 베었을 뿐입니다. 그런데요, 그것조차 죄송한 거예요!
5절,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마음이 찔려⋯ 양심에 찔린 것입니다. 왜에?
6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얼마나 맑은 영성, 순수한 영성입니까? 생활에서 작동되는 양심! 그것이 영성입니다.
압살롬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울과 같은 베냐민지파요 신하이던 시므이가 외칩니다.
“저주 받은 자여 꼴좋다!”(삼하 16:7)
옆에 있던 아비새 장군이 발끈해서 “⋯이 죽은 개가 내 주 왕을 저주하다니⋯ 한 칼에 머리를 베게 하소서”(삼하 16:9), 다윗이 이런 말로 제지합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1절)
다윗은 자기에게 향하는 소리들-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라는 칭송의 노래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시므이의 저주 악담조차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귀에 듣기 좋은 “사울을 죽이소서⋯” “저 죽은 개 같은 시므이를 죽일까요?” 이 소리는 인간의 소리로 들었습니다.
칭찬의 소리라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쁜 소리라고 원수의 소리로 듣지 않고, 좋은 소리도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거슬리는 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윗의 분별력은 하나님의 영음을 듣는 귀가 열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이게 없었던 거지요!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만 들으려 하고 하나님이 없는 여론에만 연연하다 망하는 길을 간 것입니다.
사울 왕은 사람들의 소리에서 그냥 여론을 듣고 다윗은 저주하는 악담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영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2. 다윗은 광야영성이 있고 사울은 광야영성이 없다
사울이 성신 충만함으로 왕의 생애를 시작하던 때에 최대지파 에브라임 부족과 왕족으로 예언된 유다지파가 저게 무슨 왕(王)감이냐? 할 때에 사울은 자존심을 개입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잠하였더라”(삼상 10:27)
입이 없어서 잠잠했겠어요, 힘이 없어 침묵했겠어요? 사울은 사무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삼상 10:24). 하나님께서 택해주셨다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셨다는데⋯ 그거면 됩니다. 백성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왜 이런 저런 뒷담화 없겠어요? 그래서 대놓고 멸시하며 조롱하는 말에 잠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에 무너집니다.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사울 생애에 영성의 광야가 없습니다. 고생 모르고 살아왔기에 인생에 광야가 없습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오랜 세월 광야생활로 다진 생애입니다.
광야는 고요합니다. 침묵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의 잡음이 들리지 않고 풀벌레, 바람소리만 들리는 태고(太古)의 영역입니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광야는 영음을 듣는 장소입니다.
침묵과 묵상과 기도가 있는 곳! 다윗은 광야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광야는 최고의 영성 장소입니다. 밧세바와의 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나발과 시므이의 조롱과 배신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왕자들의 반란에서도 시편 절반을 기록하는 영성의 대가가 될 수 있는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단련한 영성의 뼈대가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대표적인 시편이⋯
시편 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35: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편 40:1, 2,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왕관을 억지로 뺏어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광야⋯ 하나님을 묵상하는 곳, 오직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두는 곳,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비전을 세우는 광야, 침묵에서 영성을 더욱 갈고 닦으며 빛나는 영성으로 일어서게 하였기에 다윗은 주변의 격한 소리도 자기 충동심도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광야라는 수련의 장소, 내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성의 체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3.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에 매달리고 사울은 접신여(接神女)에게로 달아나다
사울은 블레셋군대의 침공으로 위급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줄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악신이 든 사울이 악령 접신녀 무당을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과는 유언 하나 못 남기고 후사조차 없이 세 아들과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접신녀와 접속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나요? 골리앗과의 전투 이전에 사울은 여러 차례 불순종의 처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로 사울의 교만과 고집을 책했겠습니까? 그러면 돌아와야지요! 다윗은 그보다 더한 죄를 짓고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할 때 무릎을 꿇은 겸손함과 낮아짐을 보여서 살아난 것 아닙니까?
사울에게는 그런 겸손이 없어요! 왕이 되고나서 그야말로 갑질입니다. 내가 누군줄 알어? 그러자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들어옵니다(삼상 16:14). 성령은 교만한 자들에게서는 떠납니다. 악령이 사울을 괴롭히는데 그 번민함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알음알음해서 다윗을 소개 받고 수금을 켜게 하니 악신이 떠나가고 머리가 개운해 집니다. 일종의 음악치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윗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영은 떠나갔으니 자연히 악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악신이 그를 부리니까 신앙은 물론이고 이성을 잃어 상식 이하의 일들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윗을 미워하기를 증오 수준입니다. 사위 다윗을 죽이면 달 미갈은 혼자가 됩니다. 딸의 불행도 그에게는 막무가내입니다. 다윗 편을 든다고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에게 우호적이라고 아히멜렉과 85명의 제사장, 가족들, 아이들까지 처단합니다(22:19).
제 정신이라면 이런 일을 하겠어요? 하나님의 성신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부리니까 무시무시한 일들을 겁도 없이 저지릅니다. 마지막에는 접신녀 무당에게 운명을 맡겼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시기와 질투,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이 그를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다윗도 완전한 의인은 아닙니다. 때때로 내가 누군데… 갑질을 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것은 왕의 갑질입니다. 자기 죄악을 숨기려 충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오라 가라~ 한 것도 왕의 갑질입니다. 그러나 갑질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시인하고 눈물을 엎드려 집니다(삼하 12:13).
나단 선지자에게 네가 감히 뉘 앞에서? 호령으로 단 칼에 베어야 하는데 어찌 왕이 신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할 수 있나요? 영성이 살아있는 거예요! 비록 영성이 죄악으로 흐려졌지만 회개의 영과 함께 영성이 살아나는 거예요!
또한 다윗은 사울이 비참했던 모습을 상기합니다. 85명 제사장들을 죽인 살인마! 아들까지 죽이려 했던 그 광기~ 다윗은 다 보았거든요. 하나님의 성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가고 악령이 그를 부리니까 왕이 미치광이 짓을 합니다. 사울의 광기에서 다윗은 자기를 봅니다. 그래서 바닥에 엎어지며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참회록이 시편 51편입니다.
3절,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렇게 토로했을까요?
12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죄가 있으면 오히려 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밤새워 회개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영성의 때를 씻어내고 하나님의 일급수로 마음을 정결하게 합니다. 그래서 일급수 영성으로 거듭납니다. 이것이 사울과의 다른 점입니다.
결론
“신이 죽었다”는 사신(死神)철학자 니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학자는 아닙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버린다!”
교회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그래요. 분쟁이 일어날 때는 옳은 편과 그른 편이 있습니다. 그러나 싸우다보면 꼭 같아집니다. 괴물이라며 욕하던 상대편과 꼭 같아집니다.
다윗이 사울과 싸우다 사울처럼 괴물이 되어야 하는데, 다윗은 갑질의 괴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두 스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과 사울! 모두 같은 성, 사미자 사씨!(?)입니다. 사무엘은… 저렇게 기도하고 순종해야겠구나, 벤치마킹 스승이고 사울은⋯ 저렇게 살아서도 행동해서도 안 되겠구나, 반면교사 스승입니다. 그러니 영성의 왕이 되려면 무조건 사울과는 반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무엘보다 사울이 더 큰 스승입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불쾌하지요! 그러니 우리도 남에게 반면교사 안 되려면 바르게 처신하고 잘 살아야 합니다.
이 여름에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영성의 때들을 벗겨내며 우리의 영성을 일급수로 만들어 가는 겸손과 회개와 간절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초대교회의 영성으로 돌아가게 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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