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나무에 불이 붙다!
출애굽기 3장 1~5절
서론
유대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모세입니다. 당연하지요! 조상들을 400년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켰고 광야 40년을 먹였고 보호했고 인도했습니다. 이런 초능력과 함께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대면하고 율법을 받아 모세오경을 기록했으니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모세 오경 마지막 책이 신명기이고 마지막 장 34장은 모세 사후에 제삼자가 부록처럼 첨가합니다.
10절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2절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전무후무한 위인이자 영웅입니다. 모세의 모습은 마치 2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그 정도의 찬란한 명성을 유대역사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자생하는 ‘가시덤불’, 아카시아나무입니다. 주변에 고상하고 당당한 나무들과는 대조적으로 앙상하고 볼품이 없어 나무로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떨기여서 그늘도 열매도 재목도, 관상용도 안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초라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아니한지라⋯. 얼마나 신기한 광경이면 3절, 큰 광경을 보리라⋯ <메시지성경>은 ‘놀라운 일’이라 번역합니다. 희한한 광경이라는 거지요!
여기 호렙산의 떨기나무는 상징성을 갖습니다. 앙상한 떨기나무~ 볼품없는 떨기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생활의 처량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떨기나무 백성들을 불꽃으로 타오르게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모세 부지깽이로 불을 붙이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예언이자 비전입니다.
모세의 형편은 어떤 자입니까? 초라한 떨기나무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모세나무! 모세도 초라한 떨기나무처럼 꼴이 말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그의 행색을 소개했지요?
-낮은 자존감, 왜곡된 자아상, 삐딱한 심리상태, 자기 부정! 섭섭병! 잘못된 비교의식⋯ 나이 80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그래서 4:1, “아니하며⋯ 아니하고⋯ 아니하셨다⋯”
떨기나무도 이런 떨기나무가 없습니다. 잔득 화가 나 있고 섭섭하고 외로운 떨기나무였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양을 치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밖에 없습니다. 왕자신분이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무기력합니다. 스스로도 한심한 노릇이지요! 여러분도 그런 심정, 그런 왜소한 떨기나무의 느낌을 받은 적이 없나요?
목회로 힘들어하던 목사님이 팍삭 늙어버리고 속이 비어버린 고목나무를 보니 자기 신세 같았어요! 그래서 신세를 한탄하는 시(詩) 한 편을 썼어요! 강서구에서 목회했던 목사님이에요!
고목나무야 고목나무야~ 너는 목회도 하지 않으면서 왜 그리 팍삭 늙었니?
여러분도 해봐요! 고목나무야 고목나무야~ 너는 월급쟁이도 아니면서 왜 그리 팍삭 늙었니? 너는 실속 없는 사장도 아니면서⋯ 너는 고된 시집살이도 안 하면서⋯ 왜 그리 팍삭 늙었니?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대한민국의 호렙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떨기나무입니다.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존감이 없는 희망 없는 인생의 고목나무, 외로운 떨기나무입니다.
모세의 생애에 인생의 전환점 터닝 포인트가 일어납니다! 다섯 번의 사양과 거절 끝에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어 아멘! 하여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떨기나무, 80세 노인 목자 모세의 식은 열정에 불이 붙었습니다. 모세 불덩이는 400년 꺼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은 소망에 불을 붙였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앙상한 떨기나무 신세입니다. 봐주는 이 없고 하나님조차 외면하고 잊어버렸다 생각되는 세월, 앙상한 떨기나무에 불과한 노예민족, 장정 60만이면 뭐합니까? 희망도 없고 열정도 없는 남자들⋯.
하나님께서 이런 남자들에게 불붙이고 떨기나무 같은 존재들을 백합보다 더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백성들로 만드시려 개입합니다. 불 꺼진 심정에 불붙이고 꺼진 기도 가슴에 기도 불을 붙이고 섭섭병으로 찌든 심령에 감사와 행복 불을 붙이는 부지깽이로 모세를 부른 것입니다.
교회는 불을 끄고 불붙이는 곳입니다. 소방수 역할과 방화범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다베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불은 심판의 불을 불러왔어요!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습니다(민11:1~3). 그래서 죽을 자는 죽어도 살 자는 삽니다!
교회에도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 불이 있어요! 이런 불들이 교회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불평에 불붙이는 방화범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불에는 소방수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권사님들이 말쟁이들의 불을 끄는 소방수 권사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불은 끄지 말고요!
좋은 불! 열정의 불! 능력의 불붙이는 방화신자가 됩시다. 불평 불은 끄고 감사 불을 붙이는 거룩한 불 부지깽이들이 됩시다! 열정의 지도자가 열정의 교회를 만듭니다. 불 꺼진 사람은 불 꺼진 교회를 만들고 기도불이 꺼진 사람들은 기도가 꺼진 교회를 만듭니다! 감사불이 꺼진 사람들은 감사가 꺼진 교회를 만듭니다! 나쁜 불은 끄는 소방수, 성령의 불은 타오르게 하는 거룩한 방화 신자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예수님이 던져주는 뜨거운 불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에너지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내 안의 에너지 사역은 내 손으로 노를 젓거나 휠체어 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뜨거운 엔진이 있으면 하루도 이틀도 한도 끝도 없이 거침없이 나갑니다.
이런 불이 모세에게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 언약의 불로 모세 자신을 소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들어버린 언약을 일으킵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불붙이는 모세보다 불을 주신 하나님이 더 위대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을 주시지 않았다면 모세에게는 백성들의 심장을 뛰게 할 불이 없습니다.
40년 전 모세에게도 불은 있었지요! 나이 40에 동족이 애굽인에게 맞는 것을 보고 욱~ 하는 의협심에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께로 나온 불이 아니라 애국심, 동족애라는 불, 욱~ 하는 감정의 불입니다. 이런 불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결국 이런 욱! 하는 감정의 불을 극복하지 못해 가나안 입성을 거절당하는 불운의 생애가 됩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의 불이 아니라 불을 붙여주신 하나님입니다. 열 가지 재앙들⋯ 홍해를 가르는 능력, 40년을 먹여 살리는 능력도 엄청나지만 그의 위대함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인류에게 소개해준 첫 사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선언에 있습니다.
천지창조부터 오랜 세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육체가 없고 영이신 분이기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만큼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계시로서의 하나님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一角)이고 빙산의 구각(九角)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는 빙산의 구각을 드러냅니다. 모세가 그걸 세상에 알리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의 어떤 능력이나 사역보다 하나님을 소개함이 위대하고 그래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1665년, 영국에 흑사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케임브리지대학도 18개월을 휴교합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생 아이작 뉴턴은 고향으로 돌아와 사과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사과가 떨어지면서 이마에 맞아 잠을 깼습니다. 그때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과는 왜 항상 땅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지? 왜 옆이나 위로는 올라가지 않지?’
그런 궁금증으로 연구를 거듭하다 만유인력 원리를 발견합니다. 만유인력은 우주의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끌어당기는 힘의 방향은 지구 어디에서나 지구의 중심을 향합니다. 그래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 간단한 원리를 인류는 모르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사는 기원전(BC. before Christ 그리스도이전), 기원후(AD. anno Domini, 주님의 해)로 나누고, 인류의 과학사는 만유인력 이전과 만유인력 이후로 나눌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과 함께 아이작 뉴턴도 인류에게 얼마나 대단한 보물을 선물한 사람입니까?
모세도 인류사의 분수령입니다. 모세를 기점으로 하나님이 정식으로 소개되고 모세 이전에는 하나님은 정식으로 당신의 속성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하나님에게 직접 질문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 개념을, 답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아는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 그 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인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안 그런가요? 세상 사람들은 천지를 창조하는 조물주를 믿어요! 그러나 막연해요! 조물주를 구체적으로 모르니 하느님, 하늘님이라고도 해요! 한문을 쓰는 이들은 옥황상제라고도 해요! 산에 사는 사람들은 신령님, 어부들은 용왕님! 이런 신적개념으로 조물주를 믿는다지만 설명은 못 합니다. 하늘님은 그럴 것이다, 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종교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 전에는 유대인들도 그랬어요! 그들은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신을 믿었습니다. 그 신이 아브라함을 불러냈고 민족을 조성하고 언약을 통해 자기백성들을 보호, 공급, 창성하게 신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구체적으로 정확한 개념을 몰랐습니다.
오늘 모세가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그 이름, 그 속성을 묻습니다. 위대한 질문입니다. 위대한 질문에서 위대한 답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인생살이에서 성공하려면 좋은 질문을, 좋게 질문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질문에 좋은 대답이 나오고 위대한 질문에 위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모세가 위대한 질문을 합니다.
13절,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그러면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한 마디로 Who Are You? 누구세요? 입니다. 대단한 사람이지요! 외국 대통령 신분을 아는데 대통령을 향해 당신 이름이 뭡니까? 묻는다면 보통 배짱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걸 물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이 베일을 벗고 세상에 알려지는 날입니다.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반복합니다.
이것은 “나는 나다!” (I Am, 혹은 I Am Who I Am)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어린 시절에는 문이 열리며 미래가 들어서는 그 순간이 있다.”
문이 열리며 미래가 들어서는 순간-그렇습니다! 우주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들어오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시며 자기 호칭을 갖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면 이름으로 함께 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다가가실까요?
모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세상에 여호와의 이름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 단어 속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모두 설명됩니다.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빙산의 구각이 드러나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물론 논리성을 말합니다.
영원자존자-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출생도 없이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종교의 교주에게는 시작도 있고 종말(죽음)이 있습니다. 영원자존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십니다. 부모가 없고 출생도 없습니다. 죽음도 없어 하나님이십니다.
영(靈)-하나님은 출생도 죽음도 없기에 성장하고 노쇠하고 병에 걸리고 늙고… 이런 과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불변입니다. 육체가 아니고 영이기에 가능합니다.
불변(不變)-하나님은 그의 약속, 선택, 섭리에 변함이 없고, 변개치도 않으십니다. 언약을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고 당신의 구원 약속을 따라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시 신들은 변덕이 심했습니다.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들에 조종되는 신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구원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바른 신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편재(遍在). 하나님은 지역신, 부족신이 아닙니다. 우주적이며 우주 통치자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애굽도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는 사실 앞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유일신-당시 신들이 상대성을 띄었습니다. 가나안 주신(主神) 바알은 아스다롯 여신(女神)과 부부 신(神)입니다. 부부신은 상대성입니다. 이들 가나안 신들에 비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유일하신 절대 신(神)을 선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런 신(神)과 접속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미쳐버리는 것이지요! 미친 사람들도 일종의 신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평안을 혼자 다 갖고 있습니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평안! 얼마나 강력한 접신입니까?
신들린 사람들의 초능력을 보세요! 때로는 그야말로 ‘용한’ 점쟁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악신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 점을 치고 이적을 행합니다.
모세도 접신합니다. 그러니 80노인이 미칩니다. 모세 지팡이도 미치고 손도 미쳤어요!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고 뱀을 손으로 잡으면 지팡이가 됩니다. 지팡이를 내밀면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나와 메추라기가 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어떤 자가 되는가?
4장 16절,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이적이자 재앙입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치며 콸콸~ 물을 내게 하시는 분~ 만나와 메추라기를 불러오는 모세! 애굽인들에게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접신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흘러나왔습니다.
34:29, ⋯모세는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그 영광의 얼굴에 눈이 부셨습니다. 모세가 너무 거룩했고 자기들은 너무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자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립니다(33절)
오랜 세월을 큰바위얼굴을 보면서 가슴에 품었던 소년이 자라서 큰바위얼굴로 닮아버린 것처럼 가시떨기와 같이 초라했던 인생, 40년의 목자생활에서 기쁨도 희망도 비전도 없이 하루하루 맹목적으로 살았던 모세나무, 이제는 늙었다고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났다고 탄식하던 인생의 떨기나무 모세! 그에게 하나님의 불이 붙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고 항복하고 순종하니까 하나님의 불이 모세나무에 붙어 아름다운 성탄목의 오색찬란한 모세나무가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떨기나무로 인생을 종치려던 모세가 하나님의 불이 붙어 200만명에게 불을 붙이는 부지깽이가 됩니다. 거룩한 불 부지깽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지금도 늘빛의 호렙산에서 불을 붙일 모세를 찾고 있습니다. 4절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5절 신을 벗으라! 불이 붙어야지?
우리도 불붙는 열정으로 살아보아야 합니다! 조용하던 사람들은 밖으로 타 오르는 사도행전의 뜨거운 불로! 밖으로만 팔팔 뛰던 사람은 속으로 깊어지는 요한복음의 깨끗한 불로 모세처럼 불붙은 떨기나무가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 예수님과 사는 즐거움! 찬양하는 즐거움! 기도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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