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도제(徒弟)교육
누가복음 14장 25~33절
서론
지난 한 주간은 바둑이야기로 세계가 들썩였습니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가 ‘세기의 대결’을 펼쳤고 세 번 모두 이세돌이 완패입니다. 그러자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류 대표’로 이세돌을 정한 것이 미스가 아니었냐는 지적을 제기합니다. 대타로 중국의 커제(柯潔) 9단이 알파고의 상대로 더 적합하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세돌이 완패하자 랭킹 1위 커제는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겨도 나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바둑 전문가들은 인간은 더 이상 지능 컴퓨터를 이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잖아요, 이세돌은 알파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알파고는 이세돌의 그동안의 모든 대국을 입력해 놓았습니다. 공정한 게임이 되겠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과 인공지능 알파고 간의 대결은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것이고 도박꾼들의 농간 같아요!
프로기사는 하루 3번 정도 대국하고 1년이면 1,000번 가량입니다. 지능알파고는 매일 약 3만 판씩, 한 달 100만 번 대국을 치릅니다. 그 학습능력의 차이가 바둑 괴물을 만든 셈입니다.
알파고는 24시간 잠을 자지 않습니다. 이세돌은 대국이 끝나면 쉬고 잠을 잡니다. 그러나 알파고는 대형슈퍼 쌍둥이 컴퓨터 두 대가 24시간 계속 대국을 합니다. 이세돌이 했던 대국을 계속적으로 흑백돌을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대국 동안에도 컴퓨터 연결선을 통해 계속적으로 정보와 훈수가 쏟아집니다. 그러니 지식의 상승은 끝이 없습니다. 알파고는 실수가 없습니다. 실수지만 영리한 실수를 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능 바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은 영적 알파고 사단을 상대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니 얼마나 강력한 슈퍼 존재입니까? 사단은 나를 빠삭하게 꿰고 있습니다. 당연히 패합니다. 그럼에도 소망이 있음은 예수님께서 사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하셨고 그 노하우를 내게 전수했으며 내 안에서 머물면서 사단과 싸워 이길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느냐에 관건이 있습니다.
25절, “수많은 무리에게⋯”
무리입니다. 수많은⋯ 몇 백 명 정도가 아니라 몇 천, 몇 만 명⋯.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25절은, ‘수많은 무리’로 기록합니다. 무리는 자기 이름이 없습니다. 자기주장도 없고⋯ 결단력도 없습니다. 군중심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가고 친구 따라 교회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겠어요? 세상 사람들이면 좋아하겠지요? 그들이 응원군이 되고 세력이 되고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는 아무리 많아도 무리입니다. 0이 100개를 더해도 0은 0일 뿐, 100이 될 수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무리들이 천명 2천명이 모여도 그들은 ‘무리’이지 제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풍성한 삶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내가 잘 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수단화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구원시키고 훈련시켜 일을 줍니다. 그들이 바로 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8절,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31절,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남들 강남 간다고 강남 가고 뱃세다 간다고 나오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무엇을 얻으며 무엇이 되며⋯ 무엇을 대가로 치르며 희생하며 버려야 할까? 무엇을 얻고 잃을까⋯ 손익계산을 해보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손익계산에 예수님의 주문이 ‘제자됨’입니다.
26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결국 무리로 남을 것이냐, 제자가 될 것이냐? 제자로 살려면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도제(徒弟) 교육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실 때 이리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되게 하리라…, 만든다! 어떤 교육을 통해? 도제교육입니다.
도제(徒弟)는 누군가를 스승으로 두고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입니다. 도제교육은 13세기 이후 산업혁명기까지의 가내수공업사회에서 실시된 직업교육 제도입니다. 열 살 때부터 상업, 공업, 기술⋯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장인(匠人, master)의 집에 다니면서 도제가 되어 봉사하면서 학습합니다. 교육내용은 직업은 물론 인격-인성교육까지 미칩니다. 매우 엄격한 훈련을 비교적 장기간(5∼7년)에 걸쳐 이수한 뒤 다시 일정한 작품제작에 합격해야 비로소 장인(匠人)이 됩니다.
도제(徒弟)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직업교육입니다. 현장에서 직접 일하면서 기술을 터득합니다. 별의별 괄시를 받고 심부름하고⋯ 그러면서 기술공이 됩니다. 만약 스승과 제자사이가 되지 않고 기능만 배운다면 벌어먹고는 살지만 인정받는 장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에서 상공업자의 동업조직 길드를 만들어 냅니다. ‘길드’는 도제교육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산성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무리-익명의 무리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적도 보고 떡도 먹었겠지요! 그러나 그 정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에게서 받는 선물치고는 너무 초라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더 큰 것을 얻고 누릴 수 있는데⋯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학생이 아니라 그들을 제자로 불러 도제(徒弟)로 삼으십니다. 12명만 아니라 여성신자를 비롯한 70여명을 반(半) 도제로 삼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주문하시는가?
예수님은 처음부터 쎄게 나가십니다. 지금은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살살 달래고 뭔가를 내주는 기복신앙, 번영신학, 성공보장으로 끌어 모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말이지요,
27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추종자들에게 충격이었지요. 마음 편하게 살려고, 하는 일이 안 되어 예수님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나왔는데 제자 자격 커트라인이 너무 높은 것입니다.
도제교육1-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의 도제교육 제1주문은 자기부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알라!” 했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 제자의 삶을 살려면 나를 부인하라! 자기부인은 자기부정, 해체입니다.
유대사회에서 ‘부인한다’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한 포기입니다. 심지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성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공동체 리더인 아버지가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포기함이며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무가치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으로 당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것마저 요구하십니다.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부패한 옛 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과 동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이거 부정하지 못하면 인생이 참 힘들고 성숙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제자가 되고 싶으냐? 무리처럼 백날 따라 다녀봐라, 제자가 되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정해야 돼⋯ 라고 요구하십니다.
남에게 안티 걸지 말고 자신에게 안티 걸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내게는 자랑할 것이 없어⋯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없는 거야⋯. 나를 부인하며 살아야 비로소 예수님과의 도제관계가 되면서 조금씩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5절의 ‘수많은 무리’는 누구입니까?
아무리 따라다니고 말씀 들어도 제자가 되지 않습니다. 받아먹을 것 다 받아먹고 예수님에게서 이적을 통해 병이 나아도 제자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구할 것인가,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할 생각인가,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힘든 것 싫어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가 손해 볼 일도 있으니 그냥 무리로 남는 게 좋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얌체 같은 사람들입니까?
세상에서 얄미운 사람, 미운 사람들-놈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직종마다 다릅니다.
의사-앓으니 죽겠다는 놈. 그래서 병원에 오지 않으면 의사는 무얼 먹고 삽니까?
치과의사-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겠다는 놈. 잇몸으로 살면 치과의사는 무얼 먹고 삽니까?
한의사-밥이 보약이라는 놈. 평생에 보약 한 첩 안 사 먹으면 한의사는 무얼 먹고 삽니까?
산부인과의사-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놈. 상팔자라고 애를 안 나으면 산부인과 의사는 무얼 먹고 삽니까?
학원 강사-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놈! 그러면 학원 강사는 무얼 먹고 삽니까?
변호사-자기는 법 없이도 산다는 놈! 그러면 변호사는 무얼 먹고 삽니까?
제자들 중에서 가장 얄미운 놈은? 기적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얻어먹고 가르침을 받을 것 다 받고⋯ 3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자기 부인은 없는 사람!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내가 받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김집사가 받고 강장로님이 받으라는 사람들⋯ 예수님 입장에서는 얄미운 사람, 열 받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라! 자신 편을 들지 말고 항상 남의 편을 들어주고 항상 남들보다 나를 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쉬어도 예수님처럼 사는 길은 힘듭니다. 수없이 자신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없어서 장인은 5~7년이면 수료하는데 우리는 50년, 70년을 믿어도 안 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들에 대한 냉정함이 필요합니다.
도제교육2-자기 십자가를 지라!
로마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했던 그들로서는(행 5:37) 십자가는 죽음의 짐이기에 죽음의 상징 십자가를 메라는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누가 십자가를 지고 있으면 으레 ‘저 사람 죽었구나!’ 죽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죽게 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고양이 앞의 쥐’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고양이가 쫓아오면 쥐는 오금이 절여 달아나지 못합니다. 달아날 곳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금이 저려서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죽은 자들입니다. 세상에 대해 자아가 죽은 자들이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죽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나의 삶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괴로울 때 바라보고 위로 받고 나의 죄를 사함 받을 때 효력을 보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와 넓은 길에서 사는 것이고 무리로 적당하게 사는 삶입니다. 주님에게 이런 사람들은 도제교육을 받은 그리스도인 제자가 아닙니다. 도제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의 제자들이 교회에 더 많아지고 교단의 지도자들이 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포기, 자기 부인,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향해 죽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었습니다. 현자는 공동묘지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그는 무덤을 가리키며 실컷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자(賢者)가 말해주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바로 저 것이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무반응입니다. 십자가는 곧 나 이미 죽은 목숨,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아가 없습니다. 고생과 수치의 삶입니다. 이런 각오로 도제교육을 받아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에게 나온 이들은 평안을 원했습니다. 샬롬, 그것이 유대인사가 되리만큼 마음의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통해 평화를 얻으려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웬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 합니다.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두려운가, 잘 알았기에 철렁했습니다. 예수님 당대 유다라는 인물이 로마에 반역했다 2천명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십자가라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멀리 물렀습니다. 결과는 영원한 ‘무리’로 남습니다. 이렇게 무리로 살아서야 되겠느냐? 나와 함께 3년을 도제교육을 통해 도제가 되고 ‘마스터’가 되라는 것입니다.
결론
다시 인공지능 ‘알파고’ 이야기입니다. 김대식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공학과 교수는 이번 대국 결과를 보면서 알파고의 성장 속도에 놀랐다고 말합니다. 알파고의 진화는 그걸 만든 사람조차 놀라고 있습니다. 제작자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빨리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알파고는 5개월 전 판후이 2단과 대국을 할 당시 바둑 수준이 프로 2단 정도로 평가됐습니다. 이번에도 꼭 이길만큼만 이깁니다. 갖고 노는 것입니다. 이세돌은 인류가 진 것이 아니라 내 개인이 패했다 말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인공지능 기술이 어디까지 갈지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인간처럼) 학습할 줄 아는 기계가 생긴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알파고 제작자들의 목표는 월스트리트 최고 투자자의 뇌를 이런 식으로 매핑해 투자를 더 잘하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문학 종교… 등이 사라집니다. 알파고는 어떤 소설가보다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고… 설교조차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의 뇌를 없애거나 종교 뇌를 심어 인위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도록 합니다.
어느 신문은 알파고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알파고가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우리가 알아듣고는 있는 것일까?”
그러기에 참된 도제교육을 통해 유혹에서 핍박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십자가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과학의 파도를 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그래야 다음세대에도 기독교는 살아남고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도 믿음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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