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영성기도
역대상 4장 9, 10절
서론
본문은 15년 전, 우리교회 17주년 설립예배 때 설교했습니다. 그때는 야베스의 기도결과를 강조했습니다. 야베스는 어떤 제목으로 기도해서 어떤 응답,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기도결과론을 설교했었지요. 그런데, 야베스의 축복이나 응답에 너무 매달리면 기도가 오히려 영성의 강물을 흐려버리고 거룩한 기도가 축복수단,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기울면 신앙이 변질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베스가 어떤 기도, 어떤 응답을 받았는가, 보다는 야베스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기도가 응답받게 했던 그의 삶은 무엇인가? 축복의 열매보다는 축복의 씨앗을⋯ 응답의 결과보다는 응답의 원인⋯ 야베스의 ‘기도’보다는 야베스의 ‘영성’을 전합니다. 매력적인 구절 10절보다는 10절의 보조역할로 끝날 수도 있는 9절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야베스는 누구인가? 9절에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신성분은 아주 좋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개역성경에는 존귀한 자라…, 2절, 유다의 아들들은⋯ 야베스는 유다계보에 속했으니 이스라엘 12지파에서도 명문 유다 혈통입니다. 그러니 야베스는 성공 DNA를 갖고 태어납니다.
엊그제 세계 400대 부자 명단이 나왔는데요, 1위 MS(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2위 패션 브랜드 '자라(ZARA)'로 유명한 인디텍스의 아만시오 오르데카, 3위 워런 버핏⋯ 한국인으로는 다섯 명이 진입했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 작은 나라에서 400대 부호에 든다는 것이 대단하지요? 5인 부호의 특징이 뭐냐? 재벌 2,3세… 상속자들입니다.
요즘 수저계급론이 자주 등장합니다.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흙 묻은 수저)⋯ 등의 수저로 출신 환경을 빗대는 풍조가 수저계급론입니다. 재벌상속자가 되어 재벌부호가 되면 금수저입니다. 요즘에는 금수저 위에 다이아몬드 수저까지 나옵니다. 다이아몬드 수저를 갖고 태어나면 인생 성공이 예약된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대학입학 후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부모자산이 5000만원이하가 흙수저입니다. 흙수저보다 더 못한 게 플라스틱수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헬(지옥)+조선=헬조선입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망한민국, 대한지옥이라 부릅니다.
삼국시대 신라 때 혈통에 따라 구분한 골품(骨品)제도가 있는데 왕족골품에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있습니다. 성골(聖骨)은 김씨 왕족 중에서 부모 양쪽 모두 왕족으로 왕이 될 자격을 가진 최고 신분이고, 진골(眞骨)은 부모 중에 한 쪽만 왕족가문입니다. 엄밀히 따지만 진골은 왕이 될 자격이 없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聖骨)이 소멸되자 태종 무열왕 이후 신라가 멸망 때까지 진골출신이 왕위에 진출합니다. 성골-진골 개념이 정확하지는 않답니다.
골품제도가 유대사회에도 있었습니다. 제사장 레위지파에서도 아론 계열만 제사장 성골입니다. 아론혈통에서 제사장을 세습합니다. 모세는 아론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제사장 직분에서는 진골입니다. 모세는 물론 두 아들도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레위지파에서는 진골이니까요.
사울은 성골, 왕족이 아닌 베냐민지파 출신이 초대 왕으로 등극했다가 그 사단이 났잖습니까? 야베스는 유다지파지만 다윗의 직계 왕통은 아니기에 유다지파에서 주류혈통, 왕통(王統)은 아닙니다. 유다지파에서는 일종의 진골입니다. 3장을 보세요.
1절,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이 이러하니⋯”
3장 전체는 다윗가문의 족보입니다. 왕이 될 성골, 주류가문 족보입니다. 야베스는 3장에 없습니다. 여기에 이름을 올려야 왕족 성골입니다. 그의 계보는⋯ 4장에 기록됩니다. 4장은⋯ 유다의 아들들은⋯ 왕가 지파지만 혈통은 왕족이 아닌 비주류가문입니다.
야베스는 유다지파 중에서 동수저, 비주류신분이며 출생 때도 어머니가 난산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누가 이름을 작명했다고요? 어머니입니다. 유대인은 자식 이름은 당연히 아버지가 짓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름하여⋯ 사연이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이름도 짓지 못하고 어디에 간 것일까요? 출생 전에 세상을 떠났을까요? 그래서 사생아일까요? 죄를 짓고 도피했을까요?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이방인일까요? 축복 받는 출생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름에 자기 아픔을 담아 야베스라 짓습니다. 왜?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입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너 고생해라, 야베스⋯ 해산할 때 내가 엄청 고생했다, 그러니 너도 고생깨나 해봐라 야베스⋯ 그런 억하심정으로 이름을 짓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야베스, 얼마나 죄송하고 수치스럽고 열등감에 빠집니까?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부른 노래에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바람이 휘몰아치고⋯ 그것도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벌써 가사에서 인생의 비극과 불행을 봅니다. 이런 삶은 흙수저입니다. 흙수저보다 못한 플라스틱수저, 똥수저입니다. 당연히 헬조선이라 좌절하며 비판하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헬조선의 정서는 포기입니다. 3포 세대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고 여기에 내 집 마련-인간관계를 포기하면 5포 세대입니다. 또 꿈-희망까지 포기하면 7포 세대가 됩니다.
야베스는 3포를 넘어 5포세대로⋯ 5포를 넘어 7포세대가 되었나요? 신앙포기-희망포기-기도포기-혈통포기-효도포기-노력포기-결혼포기⋯ 이렇게 7포세대로 자학하며 비탄에 빠져⋯ 흙수저라고 플라스틱수저라고⋯ ‘어머니 가엾은 우리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원망하다 무너질까요? 제발 이름이라도 바꿔 달라, 덤볐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이름 개명은 흔합니다.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자’입니다. 12지파 시조 야곱은 이스라엘로 개명합니다.
라헬은 둘째를 낳고 죽으면서 아들 이름을 ‘베노니’라 지었습니다. ‘슬픔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즉시 개명합니다. 베냐민. ‘오른 손의 아들’. 그랬더니 베냐민은 12아들 중 막내이면서, 어머니의 젖도 먹지 못하고 자란 비실이지만 훗날에는 창을 던지고 돌을 던지면 백발백중 용사부족으로 번성합니다. 이름이 주는 암시성, 이름이 가져다주는 파워입니다.
야베스도 이름을 바꾸고 싶겠지요! 너~ 고통! 고통의 아들~ 수고의 아들~ 남들이 듣기에도 그렇고 아들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의 비극적 사연을 생각했고 난산으로 고통하며 낳은 것을 생각하면서 몸서리쳤겠지요? 그래서 고통아~ 야베스~ 좋아할 이름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을 바꾸면 상황도 바꾼다는 기대감으로 개명합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이름을 바꿈으로 자기 운명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에 무슨 팔자가 있고 운명이 들어있겠어요? 야베스는 이름을 바꾸는 대신에 기도로 자기운명을 바꾸는 쪽을 선택합니다.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야베스는 누구를 상대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갈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는 교제입니다. 교제는 쌍방 간의 교통입니다. 내 것이 저 쪽으로 가고 저쪽이 내게로 옵니다.
기도라는 파이프를 통해 내 문제가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의 문제해결이 내게로 옵니다. 내 고통이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기쁨이 내게로 옵니다. 기도 파이프를 통해 내 상처가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치료가 내게 옵니다. 이런 역사와 응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께 파이프를 댈 때 일어납니다.
그렇게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 야베스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아뢰되⋯ 히브리어로 ‘카라’, 이는 ‘부르짖다’. 부르짖음은 먹고살만한 사람의 기도단어가 아닙니다.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드리는 기도가 ‘카라’ 부르짖음의 기도입니다. 광야에서 하갈이 드렸던 부르짖음이 카라~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고통의 아들 야베스는 기도합니다. 어머니에게도 고통이 되었던 아들, 어머니의 불행이며 눈물이 되었던 아들⋯ 철이 들면서 어머니에게 징징대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름을 개명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생애를 바꿔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소서~ 나의 지역을 넓히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게 하소서~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눈물콧물 흘려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고통이라는 삶이 마감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10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할렐루야~
금년 한 해 이런 기도응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고통이라는 이름 때문에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통을 주는 질병입니까? 아픔이 되는 자식문제입니까?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경제문제입니까? 대인관계, 인관관계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묵상기도도 좋고 경건한 기도도 좋지만 인생에 몇 번은 부르짖는 기도~ 카라기도를 합시다! 그래야
하나님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의 응답을 받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목소리 톤도 되고 통곡도 되지만 간절성입니다.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간절한 기도, 결사적인 기도, 간절하게 매어달리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요,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9절은 거의 무시하고 10절만 치중합니다.
“⋯지역을 넓히시고⋯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래서 지역을 넓혀주시는 번영의 축복! 환란을 벗어나는 축복! 더 이상 근심이 없는 축복! 그런 축복에만 몰입하는데 이런 기도에만 집중하다보면 영성을 상실한 번영신학, 이기적 신자, 기복주의 신자가 됩니다. 기도하다 인품과 인격에서 실패하고 영성을 잃게 됩니다.
야베스는 기도도 훌륭했지만 그가 드린 ‘기도’보다 하나님을 믿고 형제들에게 덕을 베풀며 살았던 야베스 ‘자신’이 더 훌륭했습니다. ‘기도’보다 ‘사람’이 더 훌륭했다는 것입니다.
9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메시지>성경은 “야베스는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로 번역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인가?
2장 55절에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아마도 야베스가 살았던 성읍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 세종로, 충무로, 율곡로⋯ 외국에도 영웅의 생애를 기념하는 워싱턴 D.C, 드골공항, 벤구리온공항⋯ 유명인의 이름을 따는 도시나 공항, 거리 이름이 있는 것처럼 야베스 마을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도 서기관들이 사는 경건한 마을의 촌장입니다. 그만큼 형제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야베스는 이름을 고통이라 할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입니다. 성골이 아니라 진골입니다. 인생을 포기할 이유가 열 개도 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는 출생 신분을 딛고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부여잡고 기도로 일어납니다. 기도로 상황을 바꾸기보다는 자신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을 바꾸려 한 사람입니다. 이름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고 신분도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정체성-세계관-인격을 바꿔 형제들에게 유익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자기 이름으로 성읍을 얻은 훌륭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이냐? 한국교회는 대부분 소원을 비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달라고… 물질 달라, 고쳐 달라, 건강 달라, 잘되게 해 달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기도를 합니다. 이런 기도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한 제목, 소원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해결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기울면 안 됩니다.
유대인에게 기도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본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내 행위가 어떤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많이 할수록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심령을 갈고 닦아 기도를 많이 할수록 더 경건하며 인격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자이고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우리에게 기도는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기도가 자기보다 작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없음으로 사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는 큰데 인격이 작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도 크고 기도도 크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가 큰 것만큼 인품의 크기도 구해야 합니다. 깨끗한 영성으로 갈고닦아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영성의 기도입니다. 지경을 넓혀달라고 환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이 유다지파임을 감사했고… 비록 흙수저 인생으로 태어났지만 인품에서는 다이아몬드 수저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이전에 영성이 맑은 사람입니다. 특히 지역을 넓혀달라는 것도 서기관들의 증가를 위한 기도이니 얼마나 영성의 기도입니까?
야베스의 멘토는 다윗입니다. 다윗의 직손 혈통은 아니지만 같은 지파는 틀림없습니다. 출생신분의 비하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고 왕손지파의 자손답게 자존감을 높여가면서 그의 호수 속에 아름다운 하나님을 담아가는 영성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아꼈다 주셨더라”
기도에 대한 응답보다는 삶에 대한 응답, 인격에 대한 응답으로 지경을 넗히고 환란에서 벗어나고 근심이 없게 하셨습니다. 흙수저 인생을 탓하지 않고 고난을 통해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 내는 야베스가 너무 아까워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하셨고 명예의 전당 <역대기>에 기록되는 영예를 안은 것입니다. 그의 비문은 이것일까요?
<야베스는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시작은 힘들었지만 끝은 너무도 좋은 사람, 아름답고 멋진 생애에 어울리는 비문(碑文)입니다.
결론
야베스. 아버지의 흔적도 없이 어머니가 주신 이름으로 시작했던 아이⋯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아이⋯, 이 아이가 살았던 시대는 헬조선보다 더한 헬유대입니다. 그는 흙수저를 갖고 태어난 아이입니다. 무너졌으면 수없이 무너질 아이입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고통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미사일을 잡았습니다. 기도의 동아줄을 통해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유다지파의 조상 다윗을 멘토 삼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그러자 동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자기 이름의 성읍을 얻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수 이용복씨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아픔도 있지만 “물장구치고 다람쥐 잡고⋯”시작되는 노래에는 생명의 환희가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다 불이 나서 정전되었는데 나중에 간증하기를 “어차피 앞이 보이지 않는 나는 수월하게 재빨리 빠져나왔다”며 시각장애인도 유리한 점이 있다”고 긍정적인 삶을 보였습니다. 오늘의 야베스를 봅니다.
야베스는 기도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야베스는 기도응답 이전에 영성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주어진 운명과 상황을 기쁨으로 수용하며 그 아픔을 기도로 품었을 때 고통을 뜻하는 야베스 이름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생애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도교’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에 앞서 영성을 만들어 냅시다. 하나님께 받으시는 ‘기도’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자’가 됩시다! 그럴 때에 우리 기도도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다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영성의 사람 야베스의 영성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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