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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다윗, 언어의 트라우마!(에베소서 6: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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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언어의 트라우마!

에베소서 6장 4절

서론

서울 구로구에 사는 48세 엄마가 중학생 딸의 전화 통화에 기가 찼습니다. 저들끼리 욕설로 통화하는 딸을 보고 몇 차례 주의를 줬지만 계속하자 감정이 폭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입에 걸레를 물었니, 말버릇이 왜 그렇게 더럽니?”

그 말을 듣고 북한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대한민국 중학생 딸이 가만있겠어요?

내가 걸레란 말이에요? 내가 걸레면 나를 낳은 엄마도 걸레겠네?”

 

이 정도가 되면 엄마와 딸의 관계는 모녀지간이 아니라 웬수관계로 바뀝니다. 서로 간에 그동안 참았던 앙금을 쏟아놓는데 자식의 마지막 무기가 뭔지 아시지요?

왜 날 낳았어? 누가 날 낳아달라 했어? 저들 좋아서 낳아놓고 왜 날보고 걸레라는거야?”

 

엄마는 하도 어이없어 말다툼을 끝내지만 엄마도 억울해서 딸의 심장에 비수를 꽂습니다

"이 돈 덩어리 웬수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너 같은 딸 낳아 너도 고생해 봐라"

 

이렇게 모녀지간은 순간적인 감정에 욕설을 퍼붓게 되고 진심과는 달리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막말로 막장드라마가 연출됩니다. 훗날 엄마나 자식이 가장 후회되는 막말상처입니다.

 

서울 중학생 438명에게 물었어요, 부모의 어떤 말에 언어폭력을 느꼈는가?

강요(46.5%). 공부해, 컴퓨터 꺼, 휴대전화 그만해라, 12시까지 버텨라, 똑바로 해라!

모욕(13.88). 넌 몰라도 돼, 너같은 애는 처음 봐, 너는 돈 덩어리야, 무슨 생각으로 사니?

비난 비판(13.6%). 옷에 그게 뭐니, 허벅지 살 좀 봐라, 성적이라도 좋으면 말을 안 해!

비교(8.3%). 엄만 네 나이 때 혼자 공부했어, 전교1등은 새벽1시까지 공부해! 누굴 닮아라!

 

협박(7%). 부모랑 따로 살고 싶니, 인서울 안 하면 대학 안 보내, 나 죽거든 울기만 해봐!

분석, 추측(4.5%). 오늘 하루 종일 무얼했니, 너 지금 어디야? 개네 아빠 직업이 뭐니.

책임부정(1.2%). 네 인생 네 거니 알아서 해, 네가 커서 뭘 하든 신경 안 써.

꼬리표 붙이기(1.2%). 천사 같은 내 딸 너는 의사가 될 사람이야. 난 이 집의 하인이지.

 

이렇게 되면 엄마는 ()이 되고 아이는 ()이 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부모는 영원한 ()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자녀와의 싸움은 항상 부모가 지는 싸움이고 엄마는 본전도 못 찾고 항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어폭력을 당하면 남에게 언어폭력으로 되갚음 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말에는 씨가 있어 열매가 달립니다. 부모 말이 자녀들 가슴에 씨가 됩니다. 자녀라는 밭에 고운 말을 심으면 고운 열매를 얻고 독한 말을 심으면 독한 열매가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다윗입니다. 시편의 절반은 다윗의 작품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여호와를 찬양하라! 온 하늘과 온 땅이여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다윗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영성이 깃들고 예술성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재치가 넘치고 덕()스럽고 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놀랍게도 말에 상처를 굉장히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받은 혀의 상처들은 유년시절이었습니다. 뜻밖에도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첫 상처는 아버지에게로 왔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말(삼상 16:11). 

사무엘은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에게서 왕을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이새의 아들들을 초대합니다. 이 초대장에 아버지는 막내 다윗만 남겨두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음악성 문학성이 뛰어납니다. 이런 성향은 너무 여려서 장군이 될 수 없고 왕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막내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는 남아 있어! 그 자리는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그래서 다윗만 초대에서 제외됩니다. 그 유명한 사무엘이 오는 자리라면 왕의 후보는 아니어도 축복안수라도 받을 수 있잖아요? 그 만찬에 너는 와봐야 소용없다고 홀로 남겨둔 것입니다. 아예 무시한 거지요. 아버지의 말 한 마디는 어린 다윗에게 큰 상처로 남았겠지요.

우리는 누구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많이 받습니다. 유년시절 자녀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듣게 되는 말들은 자녀들에게 상처가 되고 언어폭력이 됩니다.

 

 형들(삼상 17:28). 

다윗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이 출전한 전쟁터를 찾았다가 형들에게 무시당합니다. 누구도 골리앗의 조롱과 모욕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막사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의분에 겨워 나가서 싸우겠다! 하니까 큰형 엘리압이 야단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   

 

형에게 모욕당하다니, 아이들 말로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며 두고두고 상처가 되겠습니까?

 

 주군(主君)이자 장인. 사울은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사울도 여인들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사울은 그 말에 상처가 되었습니다. 상처는 부메랑이 되어 다윗에게로 날아갑니다. 그러니 칭찬도 때에 맞는 말로 해야 제대로 된 칭찬이 됩니다. 남들과의 비교급 칭찬은 서로 싸우도록 만듭니다.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삼상 20:27),

 

사울은 다윗을이새의 아들이라 합니다. 촌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사위-부마이자 장군입니다. 그런 출중한 인물에게 아버지 이름에 모욕을 준 것입니다. 얼마나 큰 상처입니까?

 

 아내 미갈. 

다윗은 왕비에게서도 말의 상처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다윗이 그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죽을 때까지 잠자리를 하지 않았고 미갈로 하여금 자식이 없는 무자식의 여인으로 만들었겠어요? 미갈도 번지수를 잘못 고른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것은 몰라도 말에 상처가 너무 큰 사람, 특히 그 아버지, 장인에게 말의 상처를 받은 바가 있기에 아내에게서 오는 언어폭력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나발

나발은 아비가일의 남편으로 무대뽀의 전형입니다. 나발은 수천 마리의 염소와 양을 소유한 큰 부자입니다. 부자가 된 것은 다윗 군대의 덕()이 컸습니다. 양털을 깎는 잔칫날, 다윗은 군사를 보내 뭐 좀 달라 하니까 나발이 대뜸 하는 이야기가 웃기는 소리 말라! 다윗이 누구냐? 나는 알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삼상 25:10)

 

나발의 조롱을 받은 다윗은 분노합니다. 그는 4백 명을 거느리고 직접 선두에 서서 출동했는데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아침이 오기 전에 몰살시켜 버릴 태세였습니다.

 

다윗의 내면적인 트라우마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지나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할 거예요! 나발만 혼내던지 죽이던지 그러면 되는데 왜 나발의 죽속을 모두 몰살해 버리겠다고 합니까? 이건 파리채로 잡을 파리를 대포를 동원하는 잔인한 처사입니다.

 

다윗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말로 인한 상처를 알면 이해가 됩니다. 어려서부터 조롱, 무시, 간섭, 핍박, 언어폭력을 너무 당한 것입니다. 나발까지 그러니, 뚜껑이 열린 것입니다.

 

큰 부당함에는 잘 참던 사람들이 정작 사랑하는 사람들, 주변 인물들에게는 참지 못합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심지어는 친정어머니에게는 버럭 화를 퍼붓습니다. 그래서 상처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긴장감을 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깊숙이 찔립니다

 

소설가 알렉산더 테로는복수하는 사람의 유일한 바람은 평준화이다. 나는 너에게 받은 만큼 주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약자들에게, 만만한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내가 받았던 언어의 상처를 애꿎은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부스민족 

말로 인한 상처의 트라우마는 어른이 되거나 왕이 되었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말의 씨가 아이들 가슴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왕이 된 다윗,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정복이 나섭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부스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하자 여부스부족이 비아냥댑니다(삼하 5:6).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이처럼 다윗은 유년시절부터 언어의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평생 언어폭력의 희생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서 트라우마, 정신적 외상(外傷)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잘 참아도 이상하게도 말의 상처는 참지 못합니다.

 

골리앗과의 싸움! 사실 그 싸움은 다윗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 싸움은 사울 왕의 싸움이요 형들의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나선 것은 촐싹거리는 성격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까? 당연히 의분(義憤)에서 나왔겠지만 어려서부터 말에 상처를 받고 살아온 것으로 다윗은 너무도 못 견뎌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골리앗의 입에서 조롱당하고 멸시를 당하자 이는 하나님의 문제이자 자기의 문제입니다. 어려서부터 말로 상처를 받았던 문제, 아버지에게서 형들에게서 받았던 말의 상처가 그로 하여금 벌써 나서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살면서 더 많이 찬양하고 더 많이 찬송시를 만들었습니다. 날마다 입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정직한 영을 달라고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갈망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성령으로 점점 치료가 되었습니다. 주변의 격려로 치료됩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 당하고 도망 갈 때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욕을 퍼붓습니다(삼하 16:7,8). 시므이는 사울의 신하로 베냐민정권이 유다정권으로 넘어가니 분한 것입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했다

 

그러자 호위장군 아비새가 말합니다.

저 놈을 한 칼에 베어버릴까요?”

다윗이 대답합니다.

가만 두어라! 여호와께서 저를 통해 나를 저주하라고 하시는데 어찌 벨 수 있겠느냐?”

 

나단선지자의 꾸짖음도 말로 오는 분노입니다. 당장 죽이라! 는 추상 같은 호령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나 나단 선지자에게는 나발이 조롱했을 때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너무 다릅니다. 이미 다윗 속에 말로 인한 상처, 트라우마가 치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굉장히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말로 인한 유년의 상처가 치료되고 건강한 자아상 자존감을 갖게 되었습니까?

 

아비가일이라는 여성으로 치유된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찾아와 그만한 일로 뭐 그러십니까? 쫀쫀하게 등의 말로 남편을 두둔하고 은근히 다윗의 분노를 돋웠다면 싸움판은 더 커졌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말의 지혜자입니다.

 

우리 남편 나발,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다윗 장군님 자신에게 신경을 쓰세요. 장군님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때 나발과 가족을 죽인 일이 험담거리로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장군님의 마음에도 항상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해서 사과하고 많은 고기와 과일들을 예물로 가져왔으니 받으시고 노를 푸세요!”

 

우리 교회에 이런 분들이 많아야 합니다. 누가 화났다고 화에 기름을 붙는 행위, 누가 화를 내는데 그따위로 행동하니까 그렇지 뭐 더 열 받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와 온유함과 슬기를 갖추고 누군가의 분노, 자녀의 분노를 조절하도록 돕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교훈합니다.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노엽게 말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과 행실에 일관성이 없을 때 분노합니다. 부모들이 자기감정으로 화를 낼 때, 상처를 주는 말에 자녀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부모성공의 수단으로 대할 때 분노합니다. 자녀들이 분노하지 않게 부모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끝내어 자녀들을 오냐~! 오냐! 하다 버릇없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게 독친(毒親), 덕이 되는 엄마요 부모입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야단칠 때는 야단을, 매를 뜰 때는 매도 들어야 합니다.

 

주일학교에서 여름캠프를 떠나는데 엄마가 전도사님에게 쪽지를 건넸습니다.

 

<우리 아이는 때리지 마세요. 옆에 있는 아이를 때리면 충분히 알아들을 것입니다.>

 

내 자녀들에게 매를 들사람이 누굽니까? 학교에서 교사가 책망도 하고 때로는 회초리도 들어야 하는데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자녀에게 매를 들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매를 들어야 하고 예절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의 영혼이 바르게 정신이 건강하게 제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자녀들에 대한 1차적 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성경적 부모상입니다.

결론

한 젊은이가 위대한 스승을 만나려 오랫동안 깊은 숲과 사막을 헤맸으나 스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쳐 쓰러져 있을 때 흰 수염과 맑은 눈매를 지닌 노인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네가 찾고 있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마. 집으로 돌아가라! 누군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올 텐데 그 분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위대한 스승이 집에 와 있다는 거예요. 소년은 달려가 대문을 두드리자 누군가 달려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로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두 스승을 짝으로 자녀를 맡기셨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부모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대물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격려의 언어와 교훈의 언어로 자란 아이들이 복 있는 아이들이고,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복된 부모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 자녀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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