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만이
에베소서 4장 1~4절
서론
독수리가 자기 날개의 힘으로 높은 하늘을 난다고 생각하세요, 바람의 힘으로 하늘을 난다고 생각하세요? 어느 높이까지는 날개의 힘으로 납니다. 그러나 높이 솟아오를수록 바람의 힘으로 솟구쳐 오릅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제 날개 힘으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창공의 제왕(帝王)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가 바퀴의 힘으로 구른다고 생각하세요, 엔진의 힘으로 달려간다고 생각하세요. 자동차가 바퀴의 힘으로 어느 정도는 굴러가겠지만 바퀴로 굴러간다면 달구지 기능 밖에 안 됩니다.내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성령님께서 내 신앙생활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신앙생활의 주체다, 하시면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주해서 믿게 하시고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 생각 내 주장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야 성품이 변하고 성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성령님에게 맡기지 않는 신앙생활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신앙의 공회전입니다. 성장 대신 서로 앙금들이 생기고 구정물이 나옵니다. 나중에는 별 사람 없네… 기대감이 사라집니다.
이런 상태가 치유되지 않고 누적되면 종교 자폐증환자가 됩니다. 종교자폐증, 무서운 말입니다. 종교자폐증 환자는, 오직 자기 의(義)에 사로잡힌 사람, 최악의 바리새파 종교인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기독교는 마구간의 종교요, 다락방의 종교입니다. 마구간에서는 아기 예수가 탄생했고 다락방에서는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거듭난 신앙인이라면 두 장소를 모두 체험해야 합니다. 마구간체험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다락방의 성령체험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며 순간마다 그 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생활이 마구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다락방의 성령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믿음이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면서 역동적이 되며 성품-인격이 성화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성령의 역사가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개인적인 체험과 은사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다보니 성령을 무(無)인격이나, 에너지로 처리해 버립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가장 왜곡된 대접을 받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장로교 계통에서는 성령에 대해 인색합니다. 그래서 성령은사, 성령 충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배도 사람이 만들어 낸 틀, 전통적이고 틀에 짜인 예배… 조금만 전통에 어긋나면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장로교인들은 너무 자신들이 강합니다. 대체적으로 자기 성품이 강한 종교인들이 장로교인들입니다. 이 분들은 성령님에게 통치권을 내주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은사를 기피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주권관계, 예수님과 나와의 구속의 관계는 아주 좋은데 성령님과의 관계를 거의 무시하기에 믿음생활이 석화(石化)되고 구원의 즐거움이 미약합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신앙생활, 유교 종교인 비슷한 교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순절계통에서는 성령대접을 아주 잘합니다. 성령은사, 성령세례, 성령 충만을 강조합니다. 어린아이들도 방언을 하고, 방언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무시합니다. 성령 안에서 믿음의 활력(活力)도 대단합니다. 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매사에 성령의 능력으로 견디며 열정적인 교회생활을 합니다. 한마디로 신납니다. 찬송을 해도 박수를 쳐도 우리와는 달라요!
여기에도 약점이 있습니다. 오순절 신학은 성령님을 너무 과대평가한 나머지 인격적인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령을 받았다면서 자기 기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자신들만이 성령을 전세(傳貰)낸 것처럼 조종하며 은사와 능력을 과시합니다. 내가 원할 때마다 내 손에서 쥐락펴락되는 성령님입니다.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성령님이 왜 강림하셨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처럼 스스로 하늘영광을 버리고 자원해서 오신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은 스스로 오셨기에 당신의 사역을 갖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이라는… 분명한 자기 사역의 목적으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다릅니다.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의 목적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이후에 내가 이룬 구속사역을 계속 적용하고 성취해가도록 보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요구해서 오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는 왜 성령님을 요청했습니까? 요한복음 16:8, 성령님이 하실 역사가 나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우리 구원을 이루려 오셨습니다.
죄-의(義)-심판…, 성령을 받아야 죄를 알고 의인이 되는 과정을 알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이런 일들이 종교교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 죄가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내가 의인의 신분을 얻고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서 내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큰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개인의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하시고 구원 받은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예배당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내가 곧 교회입니다.
고백공동체, 예배공동체 교회가 탄생된 날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우리교회 설립일은 1984년 9월 29일, 화곡1동 359-6번지 3층 상가건물에서 시작되었지만 본사가 되는 예루살렘교회는 2천년 전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창립되었고 다락방에서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왜 필요한가? 바울은 12절에서 직분의 역할을 말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온전은 의사가 부러진 뼈를 맞추는 것, 어부가 찢어진 그물 수리함(마 4:21), 교도관이 범죄자를 바로잡는 것(갈 6:1), 그런 의미입니다. 교회 역할, 직분은 무엇이냐? 교인들의 온전함을 복구하도록 돕는 곳입니다. 핼쓰장이 아니라 영육의 재활센터지요!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남을 위한 배려,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홍익인간으로 살도록 돕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최고 이단(?)은 이기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1~4절의 유기적 관계로 만들어 교제하게 하면서 온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며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온전한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입니다. 교회가 만들어낼 완전한 영적 성숙의 인간상(像)은 예수님이요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으로 채워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홍익인간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들어 내면 저절로 배워 남을 주는, 홍익인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홍익의 중심이 되는 예수님을 빼고 홍익인간을 만들려 하니 배워서 남에게 안 줄려 하는 실패한 교육이 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만들어야 하고 이런 역할들을 해야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하려면 교인들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까? 본문에 그 자질이 나옵니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상적인 교육장(場)이 가능한가? 내가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론으로 성령이 많이 나옵니다. 그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교회에게 맡겨진 직무를 감당하려면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를 온전하게 하려면 얼마나 힘든데요, 별의별 일이 생기고 별 사람들을 다 만나요! 우리는 모두 환자니까요! 그래서 성령님의 만져주심이 있어야 온전함으로 나아갑니다.
교회 봉사. 봉사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요! 한국천주교에는 ‘냉담자신자’라는 용어가 있어요! 공식 용어는‘쉬는 신자’3년 이상 판공성사를 하지 않은 신자입니다. 판공성사는 천주교 신자들이 연2회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고해성사입니다.
천주교회의 고민은, 통계에 잡히는 신자는 꾸준히 늘지만 미사 참여율과 냉담자 역시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 천주교 통계를 보면 미사 참여율은 21%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100명 중 21명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95% 이상의 출석률인데….
교회 예배 출석, 억지로 안 됩니다. 여기다 봉사까지… 교회 봉사는 한도 끝도 없어요. 방학도 없고 휴학도 없어요. 그러니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오랜 세월을 봉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 특히 어른들은 뼈대가 이미 굳어버렸어요! 생각이 굳어버리고 성품이 굳어버리고… 굳은 나무를 어떻게 분재(盆栽)로 만들겠어요? 나무가 어렸을 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쉽게 휘어집니다. 교회는 50대를 훈련시키고… 80대 어르신들께 구원을 설명해야 합니다. 사고체계가 굳어졌는데, 안 됩니다. 그래서 미신(迷信) 신자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오직’… 성령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은, 성령 내주, 성령 인침, 성령세례와는 다릅니다. 성령내주나 성령인침, 성령 세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성령 충만’은 구원의 때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나를 통치하는 예수님으로의 충만입니다. 이 명령은 필수적입니다. 현재적입니다.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채우라는 명령입니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빵빵하게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 바퀴에 바람을 빵빵 채워놓은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했을 때 어떤 상태였습니까? 광신적이었나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 새 술에 취했도다….
새 술은 발효(醱酵)되지 않은, 이제 막 발효를 시작한 포도즙입니다. 막 발효되는 포도즙은 가장 감미로운 술맛입니다. 감미로운 술을 마셨을 때의 표정을 상상해 보세요! 햐~ 좋~다~ 즐거움, 행복함, 만족스러움, 상대방에 대한 완전 무장해제… 성령을 받은 저들은 첫사랑을 고백하는 남녀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사랑이 넘쳤습니다.
권태기의 무심한 눈동자들이 아니라 봐도 또 봐도 서로에게 질리지 않는 사랑의 눈동자, 감미로움으로 가득 찬 눈동자, 부드러운 언어입니다. 그래서 조롱 삼아 술에 취했다 외친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술독에 빠진 생쥐는 고양이와 정면으로 맞섭니다.
-마음이 관대합니다. 그래서 술 인심이 인심 중에서 최고입니다.
-주면서도 아깝지 않습니다. 너무 감미로운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술의 힘으로 노동을 합니다.
-즐겁습니다. 주인은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재미가 없는데 머슴은 막걸리 한 잔을 받아놓고 흥얼거리며 즐거워합니다. 좋은 술맛에 취하면 더 감미롭고 기분이 나이스~ 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새 술에 취한 것처럼 꿈을 꾸고 있구나~
교회공동체가 성령을 받으면 감미로움을 체험합니다. 서로의 잘잘못을 캐어내려는 날이 선 눈동자가 아니라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새 술에 취한 모습들이 되어야 합니다. 계산적인 것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층(層)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예배가 감미롭고 봉사가 감미롭고… 교회생활이 감미로워야 합니다. 눈에 거슬리는 작은 것 때문에 교회에서 얻는 감미로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이 감미로움을 계속 유지하며 발전시키느냐, 그게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고 교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부부생활, 가정생활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미로운 결혼생활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부생활에도 성령 충만을 받아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 맨 정신으로는 신앙생활이건 교회생활이건 부부생활이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령님의 주도적 역할은 거듭 난 그리스도인들! 역동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입니다. 내가 기질이 강하다는 분들은 성령충만을 더욱 갈구해야 합니다. 내 성격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생각하는 분들도 성령 충만을 입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령 충만을 훼방하는 어떤 걸림돌도 외면하고 오직 성령 충만! 성령 충만에 올인해야 합니다. 봉사도 성령 충만을 공급받으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잘 믿는 신자, 잘 되는 신자가 됩니다.
결론
우리나라 무당들 90%가 배워서 하는 습득무당이랍니다. 배워서 하는 무당! 먹고 살기위해 하는 무당질이 얼마나 힘들어요? 진짜 무당? 말이 좀 그렇지만, 진짜 무당은 신이 내린 강신(降神) 무당, 이런 무당이 되어야 신명나는 굿을 합니다. 거짓을 해도 사단에 잡혀 진짜처럼 신나게 하는 것입니다. 습득무당들은 돈벌이하느라 억지로 속이느라 고생하는 것이지요.
교인도 그래요. 배워서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많아요, 어려서부터 찬송을 배우고 따라 합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습득해서 그냥 따라 다닙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도통 신이 나지 않아요.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인간의 의지에 따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율법교사 아볼로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습니다(행 18:24). 세례요한은 성령역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회개와 물세례만 촉구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새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역사하는 성령세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교회는 미완성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성령을 받았느냐 물었을 때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고 합니다. 저들이 듣지 못했던 성령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두 세례는 다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안수하자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에베소교회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라! 계속 공급 받고 채워놓으라는 것입니다. 내 성격이 보이지 않아야 성령충만입니다. 아직도 내 아집과 기질, 성품이 드러나면 그만큼 나는 ‘나’로 ‘내 종교’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으로 계속 채워야 합니다. 한 번 기름으로 영구히 가는 자동차는 없습니다. 기름차는 기름을 계속 공급받고 전기차는 태양열로 계속 전기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기름이 떨어졌기에 그 좋은 자동차들이 쉬고 있고 기름을 충분히 넣지 않았기에 조마조마하게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운전의 즐거움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 이야기는 아닙니까?
성령 충만을 방해하는 어떤 일도 교회 안에서는 하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을 뺏기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마십시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의를 하지 않습니다. 다툴까봐!
주일은 오직 성령 충만의 시간들! 성령의 기름을 꽉꽉 채우는 분들만이 한 주간 멋진 주행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을 계속 공급해 주는 우리교회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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