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을 지켜라!
마태복음 5장 33~37절
서론
어느 마을에 바보 3형제가 살았습니다. 마을 뒷산 동굴에는 마시면 영생한다는 영생수(水) 샘물이 있었습니다. 단, 전제조건이 있는데, 샘물을 먹고 영생하려면 동굴에 들어간 이후는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말을 하면 영생이 아니라 즉사(卽死)한다는 것입니다.
바보 3형제는 영생의 삶을 살고 싶어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형이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돼!” 그 자리에서 꽥! 둘째가“거봐, 말하지 말랬잖아”꽥! 셋째가“야! 나만 살았다”꽥! 고이 잠드셨습니다. 바보 3형제의 죽음을 알게 된 마을사람들은 시신(屍身)이라도 거두려고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 보세요, 이곳에서 말을 하면 절대 안 됩니다!”꽥! 마을사람들도 그 말에“알겠어요!”하는 순간 꽥! 모두 죽었습니다. 말에는 누구든지 자신할 수 있는 장수(將帥)가 없다는 우화(寓話)입니다.
요즘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곤욕을 치르는 정치가들이 많습니다. 총리가 거짓말로 자꾸 둘러대다 낙마했습니다. 대꼿이라던 전임 대통령 비서실장이 말을 바꿔 신뢰를 잃습니다.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행실도 위험수위입니다. 성모 장로는 잘잘못을 숨기려 자기 목숨을 걸고 몇 명을 골라 망신주고 있습니다. 자기자살로 하청회사 직원들 수만 명이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로가 승려를 찾아가 앞일을 묻고 역술인을 찾아다녔다는데 만약 천국에 갔다면 웃고 있을까요, 천국자리가 좌불안석일까요? 천국은 과연 이런 이들의 꽃방석이 되어도 되는 것일까요? 구원만 가르쳤지 성화와 영화가 없기에 생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얻게 하셨지만 구원 이후의 삶도 주셨습니다. 크리스천 윤리, 신자들의 도덕생활을 집대성해 놓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믿음만 아니라 생활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가 아니라 너희는 이렇게 살라! 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으라! 믿음에는 강하지만 이렇게 살라! 는 가르침에는 약합니다. 그래서 받은 말씀과 사는 말씀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읽으라! 주신 것이 아니라 들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들으라! 들어서 지키라! 산상보훈은 그래서 행동지침입니다.
오늘은 말(言), 그중에서도 거짓된 언어사용, 거짓말에 관한 설교입니다. 말에는 독한 말, 부정적인 말, 이간질, 허튼말, 더러운 말, 아첨, 거짓말…등이 있습니다. 어느 게 가장 나쁜 말입니까? 나는 어떤 언어를 사용 중입니까? 언어는 내가 누구인가, 스스로 밀고합니다! 대체적으로 그 사람이 쓰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 속에 숨겨져 있는 인격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명령하십니다.
34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이는 법정이나 공공기관에서의 선서를 금지하는, 맹세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은 아닙니다. 신약초기시대 엣센파, 종교개혁시대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등은 이 명령을 따르고자 법정에서의 서약을 거부합니다. 맹세나 서약 자체의 금지 주장은 성경의 단면만 본 것입니다.
맹세하지 말라! 거짓 맹세, 위선적(형식적)으로 하는 맹세를 금합니다. 흥분상태, 질투에서, 급할 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는 맹세입니다. 이것들이 헛맹세, 거짓 맹세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 잘못이나 실수를 숨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合理化), 자기변명, 이런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거짓 맹세는 34절 하늘을 걸고, 35절 땅을 걸고 예루살렘을 걸고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느 것을 걸고 말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소유물이기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36절은 자신을 걸고도 하지 말라! 인간은 급하면 검은 것을 희다고, 희다고 해놓고 검다고 번복합니다. 그 맹세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진실하게만 말한다면 굳이 맹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 거짓된 말을 하기에 맹세를 들먹입니다.
잠언 기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잠 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성경에 거짓말사건들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사라부부의 거짓말, 아나니아 삽비라부부와 관련된 거짓말 사건은 거짓말의 특성과 결과에 대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거짓말도 악의(惡意)가 있느냐,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이냐… 차이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거짓말-부부관계임을 숨기고 남매관계라 했습니다. 거짓말 같은데 아주 거짓말은 아닙니다. 이복남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복끼리 결혼했기에 부부도 되고 오라비 누이동생도 됩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재앙을 당한 것은 바로와 아비멜렉 왕입니다. 하마터면 후손이 끊길 뻔 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로 망신은 당했지만 목숨은 건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땠어요? 그들은 헌금을 속였습니다. 헌금 절반은 숨기고 헌금 절반은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앞서거니 즉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두 부부에게 유사점이 있습니다.
㈀ 두 부부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대충 믿은 것이 아니라 모두 교회의 중직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아나니아는 초대교회의 중직입니다.
㈁ 두 부부 모두 대단한 결단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더 좋은 것을 위해 땅을 떠났고 아니니아 부부는 땅을 팔았습니다. 모두 대단한 결단입니다.
㈂ 두 부부 모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자기를 죽일까봐 거짓말을 했고 아나니아는 땅을 판 돈 모두를 바쳐버리면 어떻게 살까? 미래에 대해 살아갈 일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은 믿음이 부족하여 정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두 부부 모두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거짓말 한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부부가 모의를 하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부부가 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나니아 부부 모두 거짓말이 들통 났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거짓말-거짓말 때문에 재앙을 당한 것은 바로와 아비멜렉 왕입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거짓말의 대가로 오히려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말-즉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 아브라함은 사람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성령에 대하여 거짓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속임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 아브라함은 일상적인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남매라 하자, 누구에게도 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흰 거짓말이라고 할까요? 아나니아는 교회 안에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건 공적 거짓말이고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입니다. 검은 거짓말입니다.
㈂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자신의 인격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네가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바로 왕에게 핀잔을 들었습니다. 개인의 명예가 손상을 당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거짓말은 거룩한 교회공동체의 거룩을 훼손합니다. 교회가 정직하고 참을 전하는 도리로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데 두 부부들로 인해 거짓말 집단처럼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두었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론 초대교회가 거짓말 종교집단이 되고 말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 부부를 즉사(卽死)시켰습니다.
거짓말은 이처럼 자기의 인격을 더럽히고 교회 공동체의 거룩을 훼손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는 말을 삼가고 밖에 나가서는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장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 진실하지 못한 말을 삼가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짓말이 아니라 내 말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 말쟁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재미로 삼으면 말쟁이가 됩니다. 지하철에서 서로 싸우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인가봐… 하더랍니다. 그래서 교인=말쟁이라는 핀잔을 받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당연히 실수도 많고 허물도 많습니다.
터키 테러스산(山)에는 독수리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독수리들은 왜가리 새를 좋아합니다. 왜가리 새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모여 있을 때도 꼬꼬꼬… 날고 있을 때는 더욱 큰 소리로 꼬꼬꼬… 자기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노출시킵니다. 독수리들은 그 소리만 듣고서 곧장 그들에게 날아가 잡아먹습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은 왜가리들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입에 돌 하나씩 물고 산맥을 날아갑니다.
㈁ 말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말에 신빙성, 신뢰성이 있어야 합니다. 과장된 말, 허위-거짓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뻥! 치는 것! 민망할 정도의 자기 피알, 이런 것들 버려야 합니다.
토착 언어를 잘하는 선교사들이 선교에 성공하는 비율이 적다고 합니다. 오히려 토착 언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선교에 성공하는 이상(異狀) 현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말을 못하니 행동을 바르게 해서 감화를 끼치는 것입니다.
㈂ 책임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말에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을 할 때는 누구에게 들은 말인가,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 이 말에 내가 책임 질 수 있는 것이냐,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난 다음에 말을 옮기고 전해야 합니다.
개구리가 연못에서 놀고 있는데 아이들이 돌을 던집니다. 아이들은 악의도 없고 그냥 재미로 던집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말합니다.
“그러지 마라~! 너희들은 장난으로 던져도 우리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다!”
툭툭 던지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인 아름이 될 수 있다는 이솝의 우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책임을 지셨습니다.
용서-일곱 번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씩이라도 하라고 하시더니 십자가에서 모두를 향해 저들을 용서하소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말에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죽음 부활 승천. 말씀대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말에 책임을 진 것입니다.
우리가 혀를 입안에 잘 간직해야 좋은 믿음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결론
불교에 “사람은 입 안에 도끼를 품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칼에는 양날이나 있지 사람의 입에는 백 개의 날이 달려 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 가슴에 평생 가시가 됩니다. 막말과 독설, 거짓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지만 내가 듣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성공의 언어 들으면 내가 성공하고 신앙적 말을 들으면 내가 좋은 신앙인이 됩니다. 말에는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정적인 말의 씨를 없애려면 40번의 긍정적인 말을 들어야 뇌가 정리를 합니다. 좋은 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 37)
우리가 언어생활에서 조심해서 말로 교회에 도움이 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을 지키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는 행복했다!(창세기 45:28~30) (0) | 2023.08.10 |
---|---|
다윗, 언어의 트라우마!(에베소서 6:4) (0) | 2023.08.09 |
신앙의 귀감(龜鑑) 가이오 장로(요한삼서 1:1~4) (0) | 2023.08.09 |
부활을 살라!(사도행전 1:1~5) (0) | 2023.08.09 |
부활, 배달사고를 내지 말라!(000000누가복음 24:1~6(누가복음 24:1~6) (0) | 2023.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