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살라!
사도행전 1장 1~5절
서론
지난 한국교회는 어떤 기독교였을까요? 100년 전의 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한마디로, 재들은 우리와 다르다, 아니면 달라지고 있다! 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들로 여겼습니다. 좋은 의미든 조롱이든 뭔가 ‘노는 물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어때요? 니네들 우리와 다른 것이 뭐니? 내놔봐! 다른 인격, 다른 행동, 다른 언어를 내놓지 못해 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제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일은 없지요. 더 큰 고마움은 설교에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은 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언어의 변화, 행동의 변화, 인격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저에 대한 최고의 대접입니다.
사도행전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졌느냐? 는 증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의 기독교’와 ‘부활 이후의 제자들 기독교’로 나뉩니다. ‘예수 부활의 기독교’는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임을 말해줍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절대 배달사고가 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찌되었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가치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이후의 기독교는 부활을 믿고 달라진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나? 어떻게 부활을 살아냈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두 개의 기독교가 모두 필요합니다. 부활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사도들의 변화-지난주일 설교가 부활의 예수님이라면 오늘 설교는 부활 이후 제자들의 변화되어가는, 부활을 사는 기독교입니다.
본문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을 살아내기 시작하나, 일종의 스텐바이(stand by), 대기 중이지요!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무엇으로 부활을 살아냈을까요?
1. 새로운 자화상(自畵像)으로 부활을 살다~
자화상(自畵像). ‘내가 생각하는 나’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내 관점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보아도 스스로를 낮게 보는 낮은 자아상이 있습니다. 남들이 우습게보아도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은 자아상이 있습니다. 자화상은 결국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나는 누구인가? 내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제자들의 자화상(自畵像)은 세 단계로 성장합니다.
첫 단계의 자화상,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입니다.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자기중심입니다. 나름대로 자신만만했고 내가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나는 원하는 무엇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영어로는 “I am something”인 사람들이지요. 내 힘과 세력을 믿고 살아가는 육(肉)에 속한 신자들로 하나님께 무덤덤합니다.
애굽 왕궁에서 살았던 모세 40년이 이런 세월입니다. 왕자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어요!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자신만만으로 40세나 되었지만 자기정체성을 몰랐어요! 나는 히브리인이다! 이런 정체성!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없었던 것이지요!
두 번째의 자화상은, 예수님에 대한 배신과 실패입니다. 스승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때 배신했고 기대감이 끝났습니다. 초라한 삶이지요. 그들은 갈릴리바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릴리로 찾아가셔서,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실패자라는 자기고백입니다. 3년 전 그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입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잡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제자들의 의식은 무엇인가요?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무익한 존재다! 패배적인 자화상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I am nothing”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살인자 신세가 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의 광야 40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해방이라는 사명을 주고 애굽으로 보내려 했을 때 거절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저는 부적격자입니다!”
서너 번을 거절합니다. 실패한 자화상입니다. 40년을 너무 좌절했기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자신감 결여입니다. 자기 인생이 달라질 것이 없다 포기한 삶입니다.
세 번째의 자화상은 부활 이후입니다. 부활을 목격하자 제자들은 미쳐버립니다. 오직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영어로는 “I am God's”입니다. 하나님께 올인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80노인이 되어 꿈도 희망도 사라졌지만! 떨기나무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불을 붙여주시면 출애굽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열정에 불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의 만남은 모세의 자화상을 바꿔놓았습니다. 부활 이후, 그들은 무엇을 얻으려는 목적중심이 아니라 사명중심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자존감이 사명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주일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누구임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 나는 누구인가?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정체성을 갖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내가 할 일이 제대로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져야 하는 자아상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화상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자녀다! 여기에서부터 높은 자존감, 행복한 자존감이 생깁니다. 자존감은 우리의 프라이드를 높여주고 사랑받는 기쁨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살아내는 진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방향으로 부활을 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의 학습과정을 거쳤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방향은 쫓아가는 삶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게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각자들에게는 독립이나 땅의 성공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무엇을 하겠다는 구체적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의 삶의 방향 속에 하나님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분을 따라갑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살려고 했습니다. 사랑과 용서, 주님을 소개하는 일 등으로 살아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삶의 방향-삶의 목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공적인 삶의 수단일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앞세워서 조국 독립을 원했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종교를 이용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부활 이후, 그들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일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증인되는 삶입니다.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증거하는 진술자입니다. 증인은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그대로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목적하며 살아야 할까? 삶의 방향성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삶이 세상을 쫓아가는 삶이었다면 부활 이후에는 부활을 전하는 삶으로의 부름, 부름 받은 삶이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해 자신들이 수단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적 삶을 살기로 변화됩니다. 부활 체험자들에게 나오는 삶의 변화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인생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달려가는 방향이 분명했습니다. 어떤 쪽을 위해 분명한 목표를 갖고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고든 맥도날도는 사람을 세 부류라고 말합니다.
*쫓아가는 삶-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을 경쟁대상이나 자기 수하로 삼습니다. 철딱서니 없는 인생입니다.
*쫓기는 삶-자기성공만을 위한 경쟁으로 살아왔기에 늘 쫓기는 스트레스 삶을 삽니다. 자기가 자기를 조이는 인생입니다.
*부름 받은 삶-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자존감으로 사는 인생이지요!
고든 맥도날도는 그리스도인들은 ‘부름 받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부름 받은 삶을 살기위해서는 내면세계를 정돈하고 사명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곧 부활 이후의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했고 할 일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며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도들 이후, 기독교에 입교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동일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주님처럼 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들에게 속도나 업적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바른 목표를 정하고 그 방향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그것이 초대교회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속도를 생각합니다. 바른 방향보다는 빠른 속도를 원합니다. 그래서 바른 방향보다는 빠른 성공과 빠른 출세를 원합니다. 이것은 방향이 잘못된, 쫓아다니는 삶입니다. 쫓아다니는 삶은 언젠가는 쫓기는 삶이 됩니다. 쫓기는 삶은 자신이 자신을 쥐어짭니다. 이것이 스트레스의 주범입니다. 스트레스는 기쁨을 먹어버리는 바이러스입니다.
우리의 삶에 방향성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속도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 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3. 새로운 엔진으로 부활을 살다~
제자들은 예수 만나기 전 본능(本能)에 끌려 살았습니다. 마음 가는대로, 기분 가는대로 살았습니다. 부활 이후 주님이 끌어주시는 힘으로 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격적으로 그들 가운데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 충만함으로 역동적인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열정이고 힘이고 능력입니다. 아무도 그 힘을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 신이 그들 안에 들어와 산다.”고 말했습니다. 나쁜 말로는 미쳤다는 것이고 좋은 뜻으로는 절대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신이 함께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열정이 생겼을까요? 몸 바쳐 죽을 수 있는 대상이 생긴 것이지요! 충성할 대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정이 초대교회를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겁쟁이가 산길을 걷다 해가 저물었습니다. 아늑한 자리가 있기에 밤을 보낼 생각으로 자리를 만들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습니다. 담뱃재가 떨어지면서 냄새가 났습니다. 바위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푹신한 마른풀이라 생각했는데 호랑이를 깔고 앉은 것입니다. 호랑이가 내빼는데 큰 일 났습니다. 앉아있으려니 떨어지겠고 뛰어내리려니 죽겠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겁에 질렸습니다. 더 놀란 것은 마을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호랑이 등에 올라타 호랑이를 거느립니다. 그 권세에 위압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이런 형극입니다. 제자들은 3년을 예수님이라는 창조주의 세력 하에 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이양(移讓)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에너지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꾸 불발탄으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1마력짜리인데 1만 마력짜리 엔진이 부착된 것입니다. 그들의 배움이 비로소 에너지가 됩니다. 그러자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외쳤습니다.
“어찌된 일이냐?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된 노릇인가?”
제자들만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은 살아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잠재된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만났느냐에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합니다. 한 스푼의 황토에는 2억 마리의 미생물이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사막이 되어버리지만 물이 들어올 때 태양과 접촉될 때 수많은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마른덤불이 불이 붙으면 야산을 태우고, 흙 속에 묻혀있는 석탄은 불 에너지를 만났을 때 기차를 움직입니다.
우라늄이라는 원소는 폭발력이라는 에너지를 만날 때 원자폭탄이 되어 일본을 날려버렸고 천황의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잠자던 구리와 철사들이 과학자들의 에너지가 들어갔을 때 전화가 되고 통신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들은 정열적으로 달려갔습니다. 부활은 너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 부활하신 예수의 엔진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에너지가 제자들을 두려움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세상을 뒤집어놓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염병(染病)-전염병이라며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불을 받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이후, 그들은 부활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흔들 수 있는 부활의 깃발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더 이상 두려워할 수도, 조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미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원불변할 것 같던 로마제국은 예수 불이 붙은 사람들로 기독교 전교 2백년 남짓 만에 항복합니다. 열정이 로마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본인들이 살아낸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조용하게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강단에만 올라서면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찬송하면서도 기도하면서 흥분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강단에만 서면 정열적인 목회자가 됩니다. “녹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겠다!”라는 이런 정열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21세기는 열정의 시대입니다. 열정적인 사람들만이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식은 가슴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상도 뜨거운 가슴을 원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불이 있는 사람들만이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경남기업의 전 회장, 성아무개씨가 부패척결의 대상으로 수사를 받자 자기가 돈을 건네는 몇 사람을 지목하는 메모를 남기로 자살했습니다. 어느 감리교회의 장로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장례식장이 나오는데 故 장로 성아무개, 라는 위패가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장로직을 받는 분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고, 없으면 결백을 밝혀야지 그런 식으로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자살하면서 남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갔다는 것은 옳은 사람의 인생 마무리가 아닙니다. 그 분이 중직자였지만 과연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이었을까요, 돈 좀 있다고 돈으로 장로 직을 샀던 것은 아닐까요?
정집사님의 딸이 유방암수술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 한쪽을, 이번에는 남은 쪽도 수술을 받았습니다.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수술하기 전에 기도하는데 말이 막합니다. 그런데 자매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합니다.
“괜찮아요! 이미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평소에 교회에 열심하지 않았기에 믿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을 보며 이 자매는 정말 부활을 몸으로 살아내는구나, 마음이 쨘~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을 교리나 머리로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제자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열의 사람을 기대합니다. 식은 가슴으로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도 식은 가슴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뜨거운 가슴을 드립시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뜨거운 가슴을 주실 것입니다. 그 뜨거운 심정으로, ‘부활 이후’의 기독교의 변화를 만들어 갑시다! 복음의 내용을 입으로 성품으로 인격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냅시다. 이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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