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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구원에 대한 오해(여호수아 2:15~2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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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으로

구원에 대한 오해

여호수아 2장 15~21절

서론

너무나 사랑하던 남여가 있었어요. 월남전에 참전했던 남자는 폭탄을 맞아 양팔을 절단했습니다. 여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전사 편지를 내고 고국에 돌아와 숨어살았습니다.

여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축복해주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녀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어 그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돌담 너머 안을 들여다보던 월남 상이군인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 그녀는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월남전에서 죽어간 첫사랑 생각하며 양팔 양다리가 없는 그 남자를 돌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참 사랑 알았다면 이렇게 슬픈 생애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양다리라도 있는데.

 

내가 불구자가 되었으니 여자는 나를 싫어하고 떠날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여자의 사랑을 오해한 거예요! 이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오해입니다. 오해(誤解),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아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오해, 상황에 대한 오해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오해도 있습니다. 기생 라합도 오해 부분에 해당됩니다.

 

출애굽-광야 40년 마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두 정탐꾼을 여리고성으로 보내는 장면입니다. 여리고성은 가나안 관문이라 피해갈 수 없고 무조건 승리해야 합니다

 

6 1,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파죽지세의 이스라엘의 진행에 쫄아버린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에 정탐꾼을 보내면서 40년 전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습니다. 두 정탐꾼은 숫자는 작지만 믿음으로 무장된 사람입니다. 그 땅 사람이 어떻느니, 상황이 어떻느니 그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준비해 두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보는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교회가 눈여겨 볼 지도자의 자질입니다.  

 

정탐꾼들이 성읍동태를 살피려면 어디에 가야겠어요? 당연히 주막입니다. 술집은 동네소문과 비밀이 새는 곳이고 술 취하면 말에 헤픕니다. 비밀을 담아놓으려면 입이 근질거립니다.

 

여기서 기생 라합을 만납니다. 기생은 주막 여인이다, 누구는 매춘까지 했다고 합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위치하기에 여리고 성읍 전체를 살펴보기에는 매우 적절한 장소입니다. 라합은 손님 상대이기에 대번에 알아보는 눈썰미가 있어요! 이거 틀림없이 히브리인이에요! 신고하면 대박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한 패가 되어버립니다. 민족으로 볼 때는 매국노고 신앙으로는 구원의 행운을 얻은 것이지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1, 행위로 구원받았다?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에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살려준 착한 행위로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합은 용감했어요.

11,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정탐꾼을 숨겨주고 창문을 통해 탈출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협조적 행위로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주일학교에서 이런 오해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가르치고 믿으면서도 정작 행위구원을 말합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준 행위로 구원 받았다! 그러니 우리도 착한 일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 이런 구원관입니다.

 

그런가요? 착하고 선한 행위로 구원 받는다면 왜 구원의 대상으로 라합을 택하겠어요? 라합보다 선한 사람이 여리고에 얼마나 많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여인을 겨냥하고 정탐꾼을 보냅니다. 왜요? 가나안에서 행위 구원교리를 만들까봐 최악의 불량여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거예요!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받는다! 선한 행동으로 받는 구원은 없다! 그걸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말하면서도 정작 의식에는 내가 뭘~ 해야 구원을 받을 텐데 오늘 밤에라도 죽으면 구원 받지 못할 텐데 바르게 살지 못했기에 그렇게 불안스런 구원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행위구원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믿고 착한 일을 한 대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구원 받습니다. 행위와 관계없이 예수님 안에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행위와 관계없이 구원 받습니다.

 

당연히 라합이 구원 받은 것은 협력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정탐꾼이 돌아가고 침공이 시작됩니다. 기이한 방법으로 여리고성은 무너집니다. 라합은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 전쟁이 벌어졌는데 라합 가족들 주민등록증 있어요? 사진이 있어 일일이 대조해 보겠어요? 라합 가족이 전쟁 통에 살아남은 것은 표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22, 붉은 줄을 창문에 달아냅니다. 

 

라합은 가족들은 붉은 줄 집안안에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붉은 줄 창문 안에 있는 사람은 착하냐 나쁘냐? 행위와 관계없이 살렸습니다. 라합과 정탐꾼 사이 약속이고, 총사령관 여호수아와 라합 사이 약속입니다. 그 약속 안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하기 직전 열 번째 재앙이 임합니다. 장자들은 다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붉은 피를 칠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자들 목숨을 구했습니다. 출애굽 유월절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붉은 피를 보고 뛰어넘고 여리고성의 군사들은 붉은 줄을 보고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 십자가의 피 안에 있는 구원! 그 사실을 믿으면 구원! 라합은 이 사실을 가르치는 모델입니다. 붉은 줄 안에! 피 안에! 약속 안에! 이를 믿는 믿음의 구원을 놓치면 이게 오해입니다.

오해2, 기생 라합은 용감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구원 문제에서의 두 번째 오해는 믿어서! 라합이 구원을 받았다!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리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바울도 그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이 믿음의 주어(主語)가 누구이며 주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면 그 믿음은 행위로서의 믿음이고 믿는 주체가 라합입니다.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한 일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르던 정보를 주막기생이기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라합을 구원해 주셨다? 교리적으로는 완벽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구원은 구원의 원인자를 라합으로 만들고 하나님은 결재자로 머물게 합니다. 라합의 구원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없어요! 라합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원인을 제공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기생 라합 너 구원! 도장을 꽝! 찍는 결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뿐이라면! 하나님이 라합을 위해 하신 일은 뭐예요? 없어요! 라합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가 힘쓰고 자기가 노력했어요! 자기 믿음으로 스스로를 구원한 거예요! 구원 받을 믿음이 되고 자격을 갖추니 하나님은 너는 자격을 갖추었으니 구원! 결재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구원에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은혜에 대한 감격! 감동이 없어요! 내가 노력하고 내가 목숨을 걸고 받아들인 그 선택으로 나는 구원을 따낸 것입니다. 

누가 대단해요? 내가 대단해요!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어요! 내가 잘했지요? 하나님 도움이 없었잖아요, 내게 아론이 있었나요? 모세가 있었나요? 십계명이 있었나요? 제사의식이 있었나요? 나는 이방민족! 사전정보 없어도 내가 구원을 얻어내었으니 나 잘했지요? 자기공로 자랑하면  이건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었다 해도 구원받는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행위구원입니다.

 

진정한 구원 믿음은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라합이 하나님을 믿었어요! 여리고성을 포함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에요! 여리고성읍이 아무리 무장된 군대를 갖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군대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라합은 알았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니까!

 

이런 믿음이 라합에게서 왔나요? 누구에게서 그 믿음을 배웠지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누구에게서 얻었지요? 믿음의 동기를 불어넣어준 사람은 없어요! 그럼에도 믿었어요! 전해주는 이가 없는데 어디에서 이 믿음 생긴 거예요? 풍문에 들리는 광야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동족을 배반하나요? 그건 개인 문제가 아니에요! 일이 잘못되면 일가족이 몰사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선민사상을 갖고 있는 특별한 혈통민족이에요! 자기는 철저히 이방인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들이 받아줘? 모든게 불확실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었어요! 이스라엘에게 주실 땅의 약속! 대민족의 약속! 복의 근원 약속을 믿었어요!

 

어디서 이런 믿음이 왔을까요? 믿음의 동기는 라합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은 사람 스스로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앞으로 가나안을 무대로 하는 구원 역사에서 그런 사실을 선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에서 가장 종교심이 덜하고 믿음과는 거리가 먼 기생을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주시고 가나안 땅만 아니라 모든 구원을 받는 이들에게 교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너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너에게서 나는 믿음으로는 구원 받지 못한다! 내가 주는 믿음으로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 에베소서 2:8은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의 원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라합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돌아보면 라합은 자기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셨고 믿었고 그 믿음 보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라합의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그러니 한 때는 기생이던 라합의 구원에는 은혜의 감격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이걸 보여주려 하나님은 하필 기생(!) 라합을 택한 것입니다.

 

신약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 양쪽에 있는 강도가 처음에는 모두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용서의 기도를 하십니다.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십자가 아래에서 못을 받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 침을 뱉는 사람입니까? 그들 죄 용서해달라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저들이 누구에요? 양쪽에 달려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 뻔뻔한 강도들인가요? 그렇지요! 그들을 위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는 모두에게 다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백부장 한 사람만에게만 믿음을 주셨습니다. 백부장이 저는 실로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두 강도 중 한 강도에게만 믿음을 주셨습니다. 한쪽 강도만이 갑자기 옆의 강도를 꾸짖으면서 예수님에게 간청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두 사람이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그건 그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서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해주셨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격할 것입니다. 그 대열에 기생 라합도 있고 우리 모두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될 때 그 믿음은 구원을 일으킵니다. 그러기에 내 믿음 자랑 말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오해3, 구원 받았으니 이젠 되었다?

라합은 여리고성이 멸망하는 중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하마터면 나도 죽을 뻔 했네? 내가 선택을 아주 잘했네? 이제 이스라엘에 귀속되고 귀화했으니 어디, 잘 살아볼까? 이스라엘이 누릴 복을 누리며 살아볼까? 여리고성에서 구 원 받았음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대강 살면 되는 것일까요?  

 

그러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기생 노릇 하면 됩니까? 다시 주막을 열어 함부로 몸을 굴리며 살았을까요? 은혜 구원을 받은 기생 라합, 거룩한 하나님을 믿은 이후로 라합은 거룩한 부담을 느낍니다. 라합은 동족에게는 매국노입니다. 정탐꾼을 살려주었고 성읍의 모든 지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동족들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어떻게 나를 선택하고 지명하셨나? 받아주었나?

 

라합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지난날의 기생 모습 나타날까봐 더 조심스럽게 행동합니다. 불편했지만 거룩한 불편이고 부담스럽지만 거룩한 부담입니다.

기생 라합의 생애는 어땠을까요? 룻기에 라합 이름이 등장해요. 이스라엘로 편입되어 살몬과 결혼합니다( 1:5). 둘 사이에 보아스가 태어납니다. 보아스는유력한 자입니다. 유력자는 재물이 많고 도덕적으로 존경 받으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망가입니다.

 

라합을 아내로 맞이한 살몬도 대단해요. 믿음의 선택이지요. 아무리 여리고성을 정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기생은 기생입니다. 그럼에도 기생과 결혼합니다. 대단한 사람이지요!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여준 따뜻한 환영과 영접! 남편 살몬의 사랑에 기생 라합은 기생의 딱지를 떼고 점점 현숙해지고 경건해 집니다. 그 사이에 보아스가 태어납니다. 보아스는 어머니의 출신 성품과 동족을 배반하면서 평생 품고 가는 가슴앓이 아픔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이방인 여인, 미망인 룻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마음으로 룻을 사랑합니다. 둘 사이에 오벳-이새-다윗 왕이 태어납니다. 기생 라합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영예를 얻은 것입니다.

 

기생 라합의 이야기는 구원도 중요하지만 구원 이후 우리 생활의 변화! 인격의 변화! 이것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구원자로 기생 라합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에서 오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느냐? 구원 이후에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 그걸 묻지 못하고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 알고 있느냐? 그것만 생각하지 읽어서 무엇이 변했느냐? 기도를 하는 것만 말하지 기도해서 무엇이 달라졌느냐? 그걸 묻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종종 말했지만 피스메이커에서도 강사 분이 말했어요. 외국교인들이 보면 한국교회 전체가 구원파래요! 구원 이후에 생활에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공짜로 구원해 주셨다고 사는 것도 공짜로! 구원의 부전승이라고 사는 것도 편하게 부전승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기생 라합이 우리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 구원 받았습니다. 공짜로 은혜로 받았어요! 그러나 살아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구원은 받되 상급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성화가 없는 구원에 얼마나 상급이 있겠으며 영화가 있겠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구원도 받습니다. 부전승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급과 영화는 부전승도 아니고 무임승차도 아닙니다. 불편하게 살아야 하고 생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다운 교회, 신자다운 신자가 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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