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양(羊)이라!
요한복음 10장 14~16절
서론
금년은 을미(癸未)년, 양띠의 해입니다. 양띠도 청양띠, 청양은 푸른 양입니다. 양(羊)은 우리나라 자생 동물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온순하고 상서로운 동물입니다. 꿈에 양을 끌어다 집안에 매면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구하거나 재물을 얻는다…. 양(羊) 고기를 먹으면 학문을 연구하거나 책임 있는 중책을 맡게 된다…. 양을 죽여 신에 바치면 진리를 깨닫거나 일이 성사된다… 는 해몽이 있습니다. 그래서 꿈에 양이 나타나면 길몽(吉夢)이라며 좋아합니다.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니라 재미 삼아 만들어 내서 하는 말들입니다.
성경에는 양(羊)에 관한 언급이 500회 이상 나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주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양(羊)을 하나님 자녀로 비유한 것도 2백번 이상입니다. 그만큼 양은 우리에게 친근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예표하며 하나님과의 가교역할을 해주는 짐승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할 때 나는 목자요 너희는 여우다! 너희는 염소다! 너희는 돼지다! 그렇게 비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강한 짐승에 비유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사자, 기린, 코끼리, 악어 따위는 정글에서 생존하기에 강한 동물들입니다. 그러나 양은 생존능력이 너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양(羊)을 사나운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우리를 양에 비유할까요? 연약한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이듯 우리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의존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의존형 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지나치게 엄마를 의존합니다. 그러면 마마보이가 됩니다. 술에 너무 의존하면 중독이 됩니다. 인터넷 마약…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가는 인생이 망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의존해도 중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더 좋을 뿐입니다. 왜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시원한 시냇물로 기르시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행복에 겨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양들의 최고-최상의 상태는 눕는 것입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우리 식의 표현대로 자빠져서 하늘을 쳐다보며 참 좋다~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배가 부르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등이 따뜻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양들도 가장 최고의 상태가 되면 드러눕습니다.
그러면 양은 언제 드러누울까요?
1. 배가 부르면 드러눕습니다.
양(羊)의 배는 일단은 풀로 채워야 합니다. 야들야들한 좋은 풀을 계속 먹어 배가 기분이 좋은 포만감에 이르면 양들은 잘 먹었다~ 하면서 드러눕습니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지요!
그런데요, 양(羊)은 방향감각이 둔한 동물입니다. 시력이 나빠서 쉽게 길을 잃습니다. 불과 10미터 안팎의 물체만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 낭떠러지가 있어도, 가시밭이 있어도 앞으로~ 앞으로~ 직진만 하다가 떨어지고 가시밭에 갇혀서 피투성이가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방향 감각도 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고향 제주도의 소들도 한겨울에 한라산에 방목하면 봄이 되면 집을 찾아옵니다. 새들도 온 천지를 돌아다니지만 제 둥지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조금만 집에서 멀어지면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길치’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양은 먼 곳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초원을 찾아 나서지 못합니다. 척박한 땅에 나온 작은 새싹들, 다른 동물은 제대로 뽑아먹을 수 없는데 양은 바로 코앞에만 보기에 그런 풀들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아주 깔끔하게 뽑아먹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허기집니다.
그런데 좋은 목자를 만나 목자의 인도로 초원을 찾으면 원없이 먹고 배를 채우고 더 이상 먹을 생각이 없을 때 드러눕습니다.
양은 풀로만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시원한 물로 빠르게 흐르는 물을 두려워합니다. 목이 말라도 빠른 물살이 두려워 목마른 채 죽기도 합니다. 다리가 약한 양은 물을 마시려다 빠른 물살에 빠지기도 합니다. 털이 무거운 양은 물에 빠지면 거의 죽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양에게 목자는 절대적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는 시편 23편의 고백은 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셨을까? 양은 목자 곁에서 목자의 인도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목자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안심해야 눕습니다!
짐승들은 공격무기가 있습니다. 이빨과 발톱… 뿔, 달리는 다리… 스컹크는 냄새를 피워 도망갑니다. 하다못해 토끼도 빨리 달려 위기를 모면합니다. 정해진 보호색이나 위장색도 있습니다. 피라미나 카멜레온… 등은 주위 배경에 따라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꿉니다. 위장술입니다. 갈치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먼 바다의 물 속 100m 깊은 곳에 삽니다. 갈치는 몸 전체가 은백색이기 때문에 큰 물고기에게 들킬 위험이 적습니다. 갈치에게는 은백색이 보호색입니다. 이처럼 이빨과 발톱이 없는 짐승들도 독이나 보호색이나 가시가 있어 자신을 방어합니다. 식물도 가시나 독특한 향으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양(羊)은 그런 자구책이 없습니다. 양은 무기가 없어요! 시력은 나쁘지요 다리는 약하기에 달아나지 못합니다. 한번 넘어지면 쉽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두려움으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잠을 설치면 신경쇠약에 걸리고 설사를 계속하면 비실거리고 양질의 우유를 짤 수 없습니다.
양들은 이처럼 공격무기도 없고 위장색도 없기에 겁이 많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푸른 초장에도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가 무엇에 놀라서 달아나면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도망질합니다. 그러기에 여간해서는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양(羊)은 언제 겁이 사라지는가? 목자가 보이면 안심해서 눕습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목자를 신뢰합니다.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목자 밖에 없습니다. 공격무기도 없고 자기를 숨기는 은익무기도 없고 줄행랑도 제대로 못하는 양들에게는 목자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존재를 눈앞에서 확인해야만 편안히 잠들 수 있습니다. 목자도 이를 알기에 양들이 보는 높은 위치에 앉아 양을 지켜줍니다. 목자는 잠을 자도 막대기에 의지해서 앉은 채로 눈을 붙입니다. 양들이 보기에는 밤새도록 잠들지 않고 자기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안심하고 잠이 듭니다.
들판에는 양들을 위한 임시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라고 할 것도 없이 돌과 나무로 들짐승에게서 보호해 주는 야트막한 울타리 우리입니다. 양들이 우리에 들어가면 목자가 문이 됩니다. 양을 해치려면 목자를 밟고 가야 합니다. 목자는 가장 완전한 수문장입니다. 양들이 이러 알기에 양우리에서 목자의 보호를 받아가며 편안하게 눕고 잠을 잡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목자의 안전한 보호를 말합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은 언제 무엇이 닥칠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입니다. 언제 재난과 위험과 우환이 들이닥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건강을 챙기고 자녀들을 보호하고… 철두철미하게 재정관리, 가정관리, 인생 관리를 해도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한 예감에서 살아가든가, 평온한 안식 속에서 살아가든가 어느 한 편에 속해 살게 됩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끈을 끊지 못하면 모든 풍족한 것으로 채워도 우리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누워서도 제대로 잠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는 목자! 나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런 관계성을 믿었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시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다”
나 자신도 나를 보호할 수 없고 돈도 명예도… 부모님도 나의 영원한 보호자는 될 수 없습니다. 누가 내 옆에 있어야 소심하고 겁쟁이들인 우리가 누울 수 있습니까?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인할 때 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1절, 양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선한 목자입니다. 시편 127편은 말합니다.
5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성경대로 모든 걸 양보하며 남에게 먼저 배려하며 손해를 보면서 산다는 건 아무런 방어무기 없이 광야에 던져진 양(羊)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의 보호가 절실합니다. 목자만 보호해 주면 우리는 최고의 생산성을 보이는 양이 될 수 있습니다.
3. 아프지 않아야 눕습니다!
양(羊)은 깨끗한 동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더럽습니다.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는 양떼들도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돼지가 더럽다 하지만 실은 양이 더 더럽다고 합니다.
양(羊)은 웅덩이에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앞뒤 두 발이 모두 짧고 몸은 뚱뚱하니까 일어나려면 바동거립니다! 비가 오면 흰 양털이 온통 흙과 오물로 더러워집니다. 털북숭이기에 제대로 마르지 않고 장마철처럼 항상 축축하게 젖어있습니다! 그러면 털속에 온갖 진드기, 쉬파리, 벌레… 온갖 병균들이 몰려와서 병든 양이 됩니다.
병균들이 머리 안으로 들어가면 양들은 너무 아파서 울부짖습니다. 온 몸에 진드기나 날파리들이 달려들어 알을 깨면 기생충으로 온 몸이 허물투성입니다. 그러면 너무 간지러워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가 뒹굴어 댑니다.
우리가 긁어보아서 잘 알지 않습니까? 처음에 긁으면 시원합니다. 그러나 금방 다시 간지럽고 간지러운 것만큼 긁어대면 나중에는 피멍이 맺히고 딱지가 생기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양들도 간지러움에서 견디지 못하고 가시넝쿨에 들어가서 뒹굴어대고… 온 몸이 상처투성입니다. 아프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나쁜 목자는 그런 양들은 버리고 가요! 다른 양들에게 더러운 병들이 전염될까봐 먼 골짜기로 쫒아버립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막대기로 양털을 헤집으며 병균이 생기지 않았나, 옮지는 않는가, 살펴봅니다. 그래서 다시 깨끗하게 목욕시켜주고 양털을 바람에 잘 말려가며 병균에 스며들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면 양들은 온 몸의 상처를 치료받고 아프지 않으니까 편안하게 드러눕습니다.
양의 특성이 바로 이래요, 털이 많아서 누군가 씻어주거나 다듬어주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가 없는 동물, 그래서 목자가 필요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을 양(羊)이라고 비유한 것은 늘 회복시켜주고 씻겨줄 목자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 선한 목자, 착한 목자라고 합니다.
14절, 나는 양을 안다…
엄마가 말을 못하는 아기들의 표정 하나에 그 심정을 알듯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한 사정을 안다는 것입니다. 못된 짓을 하다 웅덩이에 빠지고 병균을 얻고 진드기로 괴로워하는 심정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원상태로 회복시켜 줍니다. 그러기에 양들은 더욱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치기시절 다윗은 목자로서 양을 씻어주며 이런 진리를 터득했던 것 같아요. 시편 32편 1, 2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하며 죄사함의 행복을 최상의 행복으로 꼽았습니다.
선한 목자가 씻겨주는 즐거움이야말로 양(羊) 같은 신자들에겐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사실에서‘힐링’을 얻고‘힐빙’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양(羊)은 미련하고 연약한 반면 자존심과 고집은 광장하답니다. 양은 목줄을 메지 못하는 짐승이라네요. 목줄을 메어놓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죽는답니다. 그래서 방목을 합니다.
이런 특성 때문인지 어떤 서커스에서도 양을 훈련해서 묘기를 보여주는 장면은 없어요. 서커스 묘기대행진에서 사자, 코끼리, 말, 강아지들도 훈련되는데 양(羊)은 안 된대요.
그만큼 양은 재주가 없고 묘기가 없어요. 몸매가 있나요? 링을 걸 뿔이라도 있나요? 달음박질이라도 있나요? 이런 조건들도 없지만 양은 훈련되기 힘들만큼 고집이 세고 미련합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입니다. 그냥 놔두면 막장 드라마 주인공이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라고 진술합니다.
그러면서도 양(羊)을 키우는 것은 숫양 한 마리가 50마리가 되는 암컷들을 보호하고 방어합니다. 그만큼 책임감이 강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떼들의 그 생산성을 보고‘까탈’스러워도 양을 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0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은 목자와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목자가 없으면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약자입니다. 목자와 함께 있으면 약하면서도 가장 순종하는 짐승이고‘까탈’스러우면서도 경험적으로 목자의 인도, 공급, 보호를 알기에 100% 순종합니다. 그래서 재주가 하나도 없어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덜 똑똑해서 오히려 평온한 짐승으로 행복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양은 어떤 짐승보다도 자기 목자의 음성을 정확히 알아냅니다. 여러 목자들의 부르는 소리에도 정확히 자기 주인의 음성만 알아냅니다. 이런 특성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선택이나 판단, 주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 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양들처럼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물질의 꼴과 영적 구원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약하고 못난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러기에 나를 의지하지 않고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따르니 이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내가 약함이 오히려 은혜라~ 바울은 미리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금년 양의 해를 맞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안히 누울 수 있을까, 행복한 생활을 하는 한 해가 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하면서 좋은 양들이 되어 양질의 우유를 공급하는 생산성이 높은 양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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