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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품애굽에서 나와라!(출애굽기 13:14~1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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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애굽에서 나와라!

출애굽기 13장 14~16절

서론

금년도 사역주제를 “성령이여 아름다운 성품열매 맺게 하소서”로 정했습니다. 왜 이런 주제를 정했을까? 지난해는 우리교회가 설립 30주년이었습니다. 공자는 2세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다 나이 30에 자립했다고 30세를 이립(而立)이라 했습니다. 도덕 위에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을 ‘어른 나이’, 즉 가정에서나 생활에 기반을 잡은 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30세부터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일종의 수신제가(修身齊家), 몸과 마음을 닦고 수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 공부 잘 하고 일을 잘 해서 사랑을 받았나요?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요! 구약성경을 많이 암송하신 것으로 보아 공부도 열심하셨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함은 암기능력, 어떤 특별재능보다는 사람의 됨됨이, 성품으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유능하고 실력이 있어도 인간됨됨이가 안 되면 인정은 받아도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 

 

사람의 육체에는 저마다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얼굴들이 모두 좋아요! 왜? 익숙한 얼굴이니까! 오랫동안 보고 또 보면 얼굴이 익숙하고… 그러면 좋아 보입니다. 부부가 처음에는 얼굴을 보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십여 년 살다보면 얼굴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고 정(情)으로 살게 됩니다. 얼굴이 익숙해지니까 얼굴이 곱고 안 곱고는 상관이 없어요.

 

육체에 얼굴이 있듯이 마음에도 얼굴이 있습니다. 마음의 얼굴은 성품입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어떤 마음-성품을 가졌느냐에 따라 좋은 사람, 별로인 사람… 등등으로 분류합니다. 누구를 두고 사람이 좋다 나쁘다 인간성을 말할 때는 기질-인격-성격을 종합해서 판단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은 유능하다고는 해도 인격자는 아닙니다. 저 사람 인격자다, 존경할 때는 대체적으로 인간성-성품을 두고 말합니다.

 

자녀를 4등급으로 나눈다지요? 1등급 공부 잘 하는 놈, 2등급 성격 좋은 놈, 3등급 건강한 놈, 4등급 지 애비 닮은 놈… 사실은 성격 좋은 아들, 건강한 녀석이 최고입니다. 아무리 공부 잘 해도 성격이 나쁘면, 어려서는 두통(頭痛)을 주고 커가면서 심통노릇을 합니다. 사위도 성격 좋은 사람이 정(情)이 가고, 며느리도 상냥해야 사랑을 받습니다. 

 

지난번에 노회장님이 사람에게 4등급이 있는데, 1등급 공부도 잘 하고 싸가지도 있는 사람… 2등급 공부는 못해도 싸가지가 있는 사람…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싸가지는 없는 사람, 4등급 공부는 잘하는데 싸가지는 없는 사람… 머리는 좋은데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 가장 안 좋은 사람이랍니다. 머리가 좋고 싸가지가 없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싸가지! 이게 성격입니다. 싸가지가 있으면 괜찮은 사람이고 싸가지가 없으면 별로!입니다. 성격은 일정한 행동패턴입니다. 좋은 말을 반복하면 좋은 성격이고 흉을 반복하면 안 좋은 성질이지요! 정신분석학에서는 성격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것, 타고 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성격을 고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프로이드 심리학의 핵심 포인트도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변한 것 같아도 심리 속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50대 이상의 상담은 무용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50세가 넘으면 배워봤자 가르쳐봤자 설교를 들어봤자 행동에는 효력이 미미하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인간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질긴가요? 애굽 바로 왕에게서는 예수님 믿기 전의 내 고집을 보게 되고요,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모습에서는 믿은 이후의 내 고집을 봅니다. 그만큼 성격은 예수 믿기 전에도 있고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우리를 주장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 얼마나 지독한 성격입니까? 절대 자기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열 가지 재앙들… 강물이 피바다… 개구리떼… 이(머리니), 파리… 가축의 죽음, 악성 종양… 우박…메뚜기… 흑암… 바로는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왕의 마음이 완악했다… 지독한 성격이지요!

 

15절,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왕의 장자 아들은 물론 애굽 전역의 장자 아들이 죽을 때까지 왜 끝까지 완악-고집을 부렸을까요? 모세에게 밀리면 리더십이 손상되고 체면이 깎일까봐 고집도 부렸지만 바로 왕의 본바탕 성격입니다. 고집불통 성격이 여러 사람들 힘들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은 뿌리가 깊기에 성격개조라는 말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 그런가요? 광야 40여 년 동안에 보여준 모습을 보세요! 원망하고 매를 맞고 회개하고 다시 불평하고 또 얻어터지고… 회개하고… 유대인의 고질적인 성격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신신당부했어요! (신 12: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라! 모세가 얼마나 당했으면 유언 중의 하나로 이런 걸 남겼을까요?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은 그리 살았을까요? 그들의 기질, 그 성질 어디 갑니까? 가나안 350년을 다룬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도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우상숭배하고 매를 맞고…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적들을 몰아내 주시고… 살만하면 다시 우상숭배하고 매를 맞고…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적들을 몰아내 주시고… 이런 악순환이 350년을 반복합니다.

 

사사기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또… 다시… 또… 반복되는 행동패턴, 성격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는(21:25), 사람이 각각 자기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였더라… 자기소견, 제 마음대로 살았다는 거예요! 제 성격대로 제 기질대로 살았다는 거예요!

 

기준이 누구에요? 자기 성격, 자기 기질이에요!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날마다 그분과 눈높이를 상향조절하며 고칠 것, 버릴 것, 반성할 것… 자기 향상으로 성화되면서 인품이 높아지고 인간성이 좋아져야 하는데… 씹을수록 더 단단해지는 껌처럼… 삶을수록 딱딱해지는 달걀처럼 더 질기고 강해집니다. 이 바탕 위에 믿음을 얹으니 주님도 없는 거예요!

동물 중에 갑각류가 있어요. 게와 새우처럼 몸 바깥쪽이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는 동물이지요! 갑각류의 단단한 껍질은 척추동물의 뼈대 역할을 하며 갑옷처럼 자기를 무장합니다.

 

옥성호의 <갑각류 크리스천>, 단단한 믿음의 겉모습에 둘러싸여 있지만 껍질 안에 들어있는 믿음은 나약하고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는 이중적 속성을 해부하는 책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책과는 반대의 상황도 말하고 싶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십자가에서 자아가 해체되고 유연해지고 죽어지고 수용성이 늘어나고… 그래서 점점 온유함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내 본성을 더욱 강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재앙이 올수록 더욱 완악해지는 바로 왕의 갑각류의 성품… 본래의 고집에 성경을 알면서 더 고집스러워지고… 신앙생활 할수록 더 유연해야 자칫 나쁜 크리스천이 됩니다. 좋았던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만을 절대화하는 유교적 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옆에 있으면 편해야 하는데 불편해요! 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 유교적 신앙이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갑각류 크리스천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15절, “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우리 속에 바로 왕이 있어요! 내 기질 속에 애굽이 있다는 거예요! 애굽과 바로! 그건 나쁜 성격, 기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싫어해도 바로 왕이 애굽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맸어요. 내 본성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격위에 믿음을 쌓고 자칫 유교적 교인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한국교회 신앙의 역기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도 내 마음은 애굽입니다. 내 성질이라는 바로 왕이 나를 주장하고 통치합니다. 그 완고한 성품 때문에 바로 왕 자신이 힘들고 백성들이 힘들었어요! 왕의 장자가 죽었어요! 장자가 죽어야 그 고집을 놓았어요! 대단한 아집이요 고집입니다. 우리는 그러면서 애굽 성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은 선민이지만 생활은 애굽 땅에서 종교 농사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의 갑각류 믿음이 호감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품은 반복되면서 강화되는 행동패턴입니다. 그러기에 반복되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힘이 없고 나쁜 성질이 약화됩니다. 내 안에 좋은 성품과 나쁜 성품이 있는가, 이걸 파악해야 합니다. 좋은 성품은 계속 힘을 공급해주고 칭찬해주고 나쁜 성격은 굶겨야 합니다. 남에게 해가 되는 것은 반복패턴으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발산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향상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어요. 자꾸 성격에 미뤄버립니다. 내 성격인 걸… 내가 몇 십 년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내 식대로 살 거야, 내 방식대로 믿을 거야… 이런 식으로 ‘탓’하는 것은 내 인생의 DNA에 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격은 개인의 ‘행복순’에만 관한 것이 아니고 영적성장에도 영향이 있습니다. 20년, 30년 직분, 장로 권사를 해도 신앙이 달라진 것이 없는 분들….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많이 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는 분들… 게을러서? 기도를 덜 해서? 성경을 덜 알아서? 아닙니다!

 

성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격이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누구는 너무 느려서 신앙진보가 느리고, 누구는 너무 급해서 단합을 해칩니다. 누구는 말을 많이 해서 허물이 되고 누구는 말이 너무 없어 답답합니다. 누구는 매사에 끊고 맺음이 없어서 중심이 없고 누구는 매사에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성장은 성화(聖化)와 함께 갑니다. 성화될 때에 온유하고 진실하고 시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진실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품입니다. 성품에 성화가 일어나는 것을 외면한 채 성경에만 목숨을 걸어요. 성경을 알고 성경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지적 만족감… 이게 성품변화와 이어지지 않으면 기분만 좋을 뿐이지 영혼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고 기도에 은혜 체험을 했으면 행동을 통해 반복패턴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것이 습관화되고 체질화가 되고 거룩한 성품으로 재창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의 성격, 광야 백성들의 성격을 하나님의 선민-성민의 성품으로 바꿔나가는 것은 배움과 예배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성품들은 하지 않으려 애쓰고… 좋은 성품은 반복으로 행동하고… 그러면 일정한 패턴으로 굴러가면서 점점 성품이 좋아지고 성화 단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내 성품을 알아야 해요! 내 성품의 강점과 단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품은 버릴 것이 아니라 유용하게 사용하고 활용하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불렀습니다. 성품이 각각입니다. 왜 이런 사람들로 제자 그룹이 구성되었나? 모든 성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다 쓸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우리의 성격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혈질 우울질… 이런 등등의 성격들은 하나의 마음의 얼굴이기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얼굴은 태어나면서 갖고 옵니다. 이거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이 저를 보고 키가 크지 않다, 얼굴이 많이 멋지지 못하다- 그래도 내 잘못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소관, 하나님 소관입니다. 부모님인들 어떻게 하겠어요?

 

이처럼 외모 자체가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마음의 얼굴인 성격 자체도 잘못이 아닙니다.

성격-감정은 ‘중립’입니다. 중립을 지키는 이 성격을 누가 주장하는가? 좋은 사고가 주장하면 좋은 쪽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굉장히 철저합니다. 그 철저함이 지난 3500년 동안 여호와 종교를 지켜낸 좋은 면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형식주의로 만들어 버렸을 때 폐쇄적이고 이해심이 없는 무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격은 중립이기에 성격 자체를 핸들링 하는 사고 자체가 중요합니다. 자기감정은 제거할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 필요에 대해서는 예민해지고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덜 민감해져야 합니다.

 

제자들-각양각색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부르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되게 하리라”-주님의 보장입니다. 주님은 성격을 교정시켜 주신다, 제거해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다. 성격을 제자들 부르는 기준으로 삼았다면 더 좋은 사람들,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럼에도 주님은 성격을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격은 다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들어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격을 옳은 쪽으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일에, 주님의 나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에게 3년을 훈련받았습니다. 자기 성격 그대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성격을 버리는 훈련이 아닙니다. 성격을 공격적인 인간관계에서 친화적인 윈윈관계로, 경쟁관계에서 생산적 관계로 성격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법을 훈련받았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성격을 옳게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운전사를 갖게 됩니다. 성령 운전사는 성령의 소욕이라는 엔진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항상 중립 성격을 성령의 관할 하에 두었습니다. 내 감정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따르는 쪽을 택했습니다. 성령께서 그 쪽을 택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되어져 간 것입니다.

 

내 성격이려니, 손을 놓아버릴 것이 아니라 내 성격을 잘 파악해서 성격의 운전을 성령에게 맡기고 성령의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구원 이후,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사명이자 사역입니다. 교회 일이나 사역, 직분만 내 사역이 아니라 구원 이후 내 성품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성지(聖地) 가나안을 만들어 가는 것도 사역 중의 큰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성품 성향에 더 많이 노력하고 좋은 성품을 서로 만드는 일에 서로 도와주고 협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질(質)이 좋은 신자, 품질(品質)이 좋은 교회가 됩니다.

결론

미국의 어느 교단에서는 상당히 엄격하게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받은 후에는 눈에 띄는 행동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매가 세례 이후에도 계속 좋지 않는 행동을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목사님이 불러서 말했습니다.

“자매님은 세례를 받고도 옛날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자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저는 세상에서 계속 탈출 중입니다.”

 

탈출 중!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들아, 애굽에서 나와라! 세상에서 탈출하라! 너의 본성에서 탈출하라! 나쁜 성격의 통치를 받지 말라! 나쁜 성품에서 탈출을 계속 시도하라!

 

탈무드에 “옷을 벗으면 남는 것은 성품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은 성품에서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성품은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내 인격에, 특히 신앙인격에 마이너스성품이라면 누르고 결박하고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님과 함께 하면 달라집니다.

 

보혜사 성령은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에게 성령을 따라 성격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애굽기질에서 탈출하고 행복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옥토마음입니다. 이런 옥토신앙에 100배 열매를 맺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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