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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만찬이 은혜다!(누가복음 22:14~2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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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

성만찬이 은혜다!

누가복음 22장 14~20절

서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보관하고 전달할 수단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은혜의 보관창고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많으면 좋은 교회요 은혜가 말라버린 교회는 비(非)은혜의 신자들입니다. 한국교회는 숫자보다 은혜가 말라가고 있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담아놓으시고 흘려보낼 때 두 가지 은혜수단을 사용합니다. 말씀과 성례(세례와 성례)라는 수단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날 저녁,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에 제자들과 유월절의 만찬자리를 만드셨습니다. 이 성만찬은 은혜의 자리였고 예식이었습니다.

1. 유다가 은혜입니다.

성만찬의 자리에 유다를 포함시켰다는 것이 엄청난 은혜입니다. 3~5절,“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엿보며 앉아있습니다. 얼마나 배신적 행동입니까? 유다에게, 나가 있으라! 네가 있으니 설교도 힘들고… 성만찬 집례도 마음이 흔들려 못하겠다… 호통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마음으로 유다를 대합니다.

유다…. 3년을 고생하고 스승을 배신하고… 성경에 기록되어 배신의 대명사가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될 텐데…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요 13장 1절에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했다고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다고 번역합니다.

배신자를 소중한 동료로 보는 것!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돌아서기를… 그 손에서 휘어지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이요 은혜의 마음입니다.

 

물을 찾는 사람은 지혜롭고 산을 좋아하면 어진 사람이다, 합니다. 산은 모든 걸 수용해요. 내 심장에서 뛰놀고 짓밟고 오물을 쏟아놓아도 품고 그걸 거름으로 푸른산을 만들어 냅니다. 독풀 쓴뿌리 백합도 모두 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 그래서 산은 어질 수밖에 없지요.

 

내 옆에 누가 있나요? 요한이나 베드로만 있는게 아니지요! 유다도 있고 만성적인 불평꾼 도마도 있습니다. 비은혜의 신자들입니다. 뒤에서 나를 험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교회는 모두를 품어야 하는 은혜의 저수지입니다. 그게 힘듭니다. 그러면서도 품어야 은혜의 사람입니다. 비난 할 것 다 비난하고 불만 터트릴 것 다 터트린다면 언제 예수님을 믿겠으며 언제 은혜의 교회를 만들어 냅니까? 유다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의 마음… 이런 마음들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며, 은혜의 교회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성찬에서 이런 은혜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유다마저 품어야 합니다. 끝까지 소중한 동료라는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조개가 이물질을 품을 때 아픈 것만큼 값비싼 진주가 되듯 은혜로 품어야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갖는 은혜의 위대성입니다.

2. 빵이 은혜입니다.

19절, 빵은 먹는 것, 양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찢어주시는 양식은 그냥 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셨던 떡은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나와 다른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빵입니다. 내 방식만 고집하지 말 것! 남을 비판지 말 것! 스스로 교만하지 말 것,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 것! 이 모든 가르침이 예수님께서 주신 빵입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입으로 먹는 빵만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말씀의 빵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날 성만찬을 통해 어떤 허물에도 소중한 동료로 끝까지 받아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빵으로 받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저들은 근원을 다 드러냈습니다. 넘어진 동료, 배신한 동료, 의심했던 동료… 모두 받았고 끝까지 존경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왔고 요한이 나오고 마태 마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계시록이 나온 것입니다. 은혜가 만들어 낸 위대한 사람들이요 작품입니다. 은혜가 없이 내쳤다면 교회는 껍데기만 남았을 것입니다.

 

율법에는 이런 은혜가 없습니다. 자격을 갖추어야 구원 받고 의인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자격을 상실하면 사랑의 대상에서 탈락했습니다. 그건 비은혜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아야 합니다. 비판하지 마라! 내가 피로 산 사람들이니 비판하지 마라~! 나의 교회를 비판하지 마라… 내가 일으켜 세울 때까지 가만히 있어라! 그 빵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됩니다. 은혜의 빵을 먹지 못하면 우리는 점점 메말라지고 비판과 불만에만 능한 비은혜의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빵을 받지만 말고 말씀의 빵을 받으세요! 그 빵의 가르침에 복종하세요! 은혜가 넘칩니다.

3. 포도주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 잔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20절,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내 언약이니…

마태는 피의 언약이라 합니다(26:28). 그러니까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희생의 피, 남을 위해 흘리는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내가 언제 은혜를 받습니까? 교회가 언제 은혜의 수단이 되었습니까? 교회가 십자군을 조직해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일 때 교회는 은혜가 메말랐습니다. 십자군이 되어 순교할 때 천국에서 상급을 주고 조상들의 죄까지도 탕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칠 때가 로마교회가 가장 은혜가 없었던 중세시대였습니다. 중세기 교황청은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당시는 황제들까지도 교황청의 권세 앞에 부들부들 떨었던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그때 교회는 은혜를 잃었습니다. 고문과 학살,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습니다. 비은혜의 시대였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을 때, 가난하고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오히려 원수들을 위해 축복하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자기희생의 정신,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전에는 누군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려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우리 육신을 못 박고 육체가 깨어지고 자아가 깨어지고 우리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흘러나오지 못합니다. 당연히 은혜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걸 받아 마시라! 나처럼 희생할 수 있느냐? 그걸 말합니다. 홀짝 받아 마시지 말고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수 있느냐? 내 자아를 십자가에서 못박을 수 있느냐? 내가 지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은혜가 다시 회복됩니다. 독한 마음! 아집으로 가득 찬 마음, 너무 내 주장으로 무장된 마음에는 은혜의 수로(水路)가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다시 은혜로 채우기 위해 우리는 한 자리에 앉았고 떡을 떼고 잔을 마시려 합니다. 모두를 소중한 동료로 끝까지 사랑하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용서와 관용으로 살게 해달라고… 교회 안에서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흘러나오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하며 눈물짓는 그 마음… 비로소 다시 은혜가 작동을 시작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이고 참 신자의 삶입니다! 이게 바로 30주년 이후를 출발한 교회다운 늘빛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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