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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감사 지수를 올리는 날(신명기 6:10~13)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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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지수를 올리는 날

신명기 6장 10~13절

서론

요즘에 국가적으로 안전문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생긴 일이나 판교의 환풍기가 무너져 16명이 어이없이 죽게 된 것은 안전불감증이 만들어 낸 인재(人災)입니다. 인재는 작은 부속품이 불량품이거나 사람이 불량품에서 생깁니다. 

 

불량품은 함량미달입니다. 함량미달의 정치가! 함량미달의 지도자들로 대한민국은 맨날 싸웁니다. 어떤 신자가 함량미달일까요? 우리 교단이 지난 총회에서 십일조내지 않으면 공동의회 회원 자격을 주지 않는다, 라는 법개정안을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개혁을 자처하는 외부세력들이 들어와 등록하고 교인 노릇하며 갈등을 부추기니 교인들 자격을 강화하느라 할 수 없이 생각해낸 고육지책입니다. 오해 부분이 많아 개정안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함량미달의 신자가 누구일까요? 다른 것은 다 우수해도 감사가 모자라면 함량이 미달되는 신자가 아닌가, 싶어요!

 

바울은 말세의 특징을,“감사치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딤후 3:2). 사람들이 감사치 아니하면, 세상이 끝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도 감사가 없으면 말세입니다. 말세가 되면 막가파-무대뽀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면 감사가 메말라버리고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항상 불평타령입니다. 막가파입니다.

 

정신병원 봉사자가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어서 그만 두느냐? 힘들어도 보람은 있다! 왜 그만 두냐, 그렇게 봉사했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있어야 하는데 감사가 없답니다. 그래서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만 병자가 아닙니다. 감사가 없어도 정신병자입니다. 제 정신이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하고, 교회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사는 감사할 일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감사절을 맞아 설교준비를 하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면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많고 감사제목이 손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감사한 일 때문에, 그런 사람들 때문에 털고 일어서는 게 목회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사이클로 다이얼을 맞추는 날입니다. 그래서 불평 바이러스 털어내고 감사지수 쭈욱~ 올리는 날입니다. 감사지수가 높아야 깨끗한 청정 믿음 됩니다. 불쾌지수… 그건 날씨 때문이나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감사지수가 약해서 그래요!

 

믿음이 좋으면서도 이외로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으면 만족지수 행복지수도 낮습니다. 이규태씨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병이 ‘감사 결핍증’이라 지적했습니다. 물건 사면 주인들은 “감사합니다”는 말 대신 “또 오세오” 이기적 인사를, 아이들에게 장난감 사주면 고맙습니다, 보다 신난다! 해요.

 

서양인들은 감사지수가 높습니다. 한국은 기독교역사가 130년밖에 되지 않아 말씀이 머리에 머물고 서양유럽은 말씀이 손과 발까지 내려가 기독교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이 많이 쓰는 용어 50개 중에 28개가 “감사하다” 와 연관된 말이랍니다. 옷 한 가지, 신문 한 장 사고 팔 때에도 “감사하다”“땡큐 유”. “싫어요” 하는 말에도 “노 땡큐!” 땡큐가 들어갑니다. 감사가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사람들은 앞으로도 땡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흑자(黑字)를 유지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감사는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삶을 풍성합니다. 감사를 천삼(天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사마음에 하나님은 건강과 풍요로움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쿠바, 멕시코… 등등의 남미는 미국과 같은 위도(緯度)에 속하면서도 가난하고 무질서하고 낙후되어 있습니다. 남미가 훨씬 더 좋은 자연조건과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세계 최강인데 남미는 여전히 질병과 기아에 허덕입니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북미는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개척한 감사의 땅이다. 그러나 남미는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개척한 탐욕의 땅이다. 북미와 남미가 현격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지극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요. 남미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니 감사보다는 탐심에서 나오는 불만불평으로 가득 찼습니다. 오늘도 빈곤과 무질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국은 신앙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도착하여 먼저 교회-학교-집을 세웠습니다. 첫 수확으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감사신앙입니다. 감사는 그 사람의 신앙의 질(質)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감사를 신앙의 척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척도인가요? 성경? 새벽기도? 금식? 봉사, 헌금… 모두 척도는 되지만 감사가 가장 큰 신앙의 척도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감사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감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감사절은 미국 청교도가 제정하고 유대인들이 수장절을 통해 감사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감사를 절기화, 정례화했을까요? 이스라엘은‘잊어버림’이라는 고질적 질병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나요? 오죽했으면 모세는 세상에 너희들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민족이 누구이며 너희들보다 많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보세요! 불평릴레이입니다. 왜 불평했을까요? 잊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못 받은 것만 생각하고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받을 것만 달라고 하니 감사가 모자란 거예요! 또 너무 잘 나가고 돈이 펑펑 벌리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실력이 있고 내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다, 생각하면 감사가 없는 것이지요!

 

모세가 자기 백성의 민족성을 잘 압니다. 뿌리 깊은 불평불만의 죄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광야 40년 마감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들에게 마지막 강론을 합니다.  

 

12절, “너는 조심하여…”

 

언제 조심하라고요?

 

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절,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먹고 살만 할 때, 잘 나갈 때에 조심하라는 거예요! 조심은 잊지 않는데서 가능합니다.

 

10절,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잊지 말고… 옛날 종 되었던 때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출애굽 시켜주고 오늘 이렇게 풍성한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다른 것은 잊어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진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아주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경건파들이기에 어려움을 견디려 금식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 되겠다, 돌아가자고 했을 때 누가 말했습니다. 한번만 더 금식해보자!

그때 한 노인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만 생각한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감사한 일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금식일이 아니라 감사일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서 추수 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금식이 필요도 하지만 감사가 없는 금식은 의미가 없고 봉사가 필요하지만 감사가 없는 봉사는 별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은 생각하라! 는 것입니다. 땡큐와 씽크는 a-i 글자 한 자 차이입니다. 생각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감사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첫 조상 아담은 빵을 먹기까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가꾸고 거둬들여서 이를 빻아 반죽하여 굽기까지 15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지금은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으면 끝입니다. 빵을 먹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15단계를 누군가 대신해 주었기에 빵을 먹을 때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식들에게 가르칩니다.

 

한국에서는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쌀 한 톨이 생겨나가기까지에는 88단계를 거쳐야 한답니다. 누군가는 몇 곱절 더 많은 일을 해주어 우리 밥상에 밥이 오르고 반찬이 오르는데도 정작 우리에게는 감사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감사결핍증에 걸렸다, 이규태씨가 진단한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자꾸 높여 가야 합니다. 감사지수는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10명의 환자들을 보세요! 되돌아온 환자는 처음에는 여럿이 했습니다. 그러다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육신의 병고침을 감사했더니 영혼의 고침을 감사하게 되었고 그의 감사는 배로 커졌습니다. 감사는 자꾸 키워야 합니다.

 

강철왕 카네기는,“배은망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마치 들풀과 같으나 감사는 장미와 같아서 물을 주어 기르고 사랑하며 가꾸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감사는 배우고 가르치고 연습하여 길러야 아름다운 장미와 같은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루아침에 헌금으로 왕창하고, 감사할 조건이 생겼을 때 요란스럽게 감사하고 감사 절기에만 감사하는 것보다는 감사 체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체형이 아름다운 신앙체형이 됩니다.

 

나병에서 고침 받는 순간에 열 명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감사의 그룹과 무감사의 그룹입니다. 무감사협회원은 9명이고 감사협회는 1명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남여의 성(姓)으로 나뉘고, 피부의 색깔로 나누지만

 

감사절에는 감사자와 무감사자, 감사협회에 속한 사람들과 무감사협회에 속한 사람들로 나누고 싶습니다.

 

무감사협회는 모든 좋은 것에서 나쁜 것을 봅니다.

감사협회는 모든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봅니다.

무감사협회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가 얼마나 나쁜지 불평합니다.

감사협회는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 얼마나 좋은 지 깨닫습니다.

무감사협회는 자신이 더 많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협회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감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감사협회 회원들이며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행복한 형제자매 신자들입니다.

 

로버트 로빈슨은 25세에 목사가 되어 목회를 아주 잘했습니다. 영국 기독교사에 스펄젼을 방불케 할 목사였습니다. 영국 제일침례교회에 부임해서 크게 부흥을 일으켰는데 언제부터인가 영적 기운이 소진해져 결국은 교회를 사임하고 낭인(浪人)이 되었습니다.

 

1700년대, 노인이 되어 마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부인이 기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부인이 책을 권해요. 시(詩)입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읽어나가다가 로빈슨은 책을 돌려주고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 데 자꾸 눈물이 나옵니다. 부인은 로빈슨의 마음도 모르고 더 읽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로빈슨은 눈물을 흘리며 “부인. 이 시는 제가 쓴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로빈슨, 한 때는 대단한 영성가요 설교자였지만 감사가 없으니 유창한 설교도, 기도도 찬송도 심령도 메말랐고 남들은 은혜 받게 해놓고 정작 본인 자신은 황폐한 심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사가 말라버리고 불평으로 채워진 사울의 말로를 그에게서 봅니다. 

결론

옛 속담에 “받은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베푼 은혜는 강물에 새겨라”

 

내가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면 감사할 수 있고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 주신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역시 행복지수가 낮은 불평불만의 신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에 가장 병이 든 형태입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집안의 온도를 높이는 것처럼 감사의 온도도 높입시다. 그러면 감사지수가 넓게 나타나고 행복지수도 높게 나타나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1년 동안도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서로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이름은 감사입니다.

 

 

[아래의 설교는 조금 다릅니다.]

감사 지수를 올리는 날

신명기 6장 10~13절

서론

(‘강연 100도’ 김희아씨 동영상을 보고)

미국의 루주벨트는 39세에 두 다리가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굴하지 않고 네 번이나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루주벨트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된 이면에는  엘리노어(엘레나)라는 부인이 있습니다.  엘리노어는 10세 때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얼굴조차 예쁘지 못해 어려서부터‘못생긴 오리새끼’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던 엘레나는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했던지 돈을 가리켜‘땀과 눈물로 조각이 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20세에 루주벨트와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는데 한 아이가 눈앞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때  엘리노어는 위로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직도 다섯 명이나 있어"하며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남편 루주벨트는 성년이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됩니다. 남편이  엘리노어에게 농담 삼아 "아직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묻자 엘레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엘리노어는 세계에서 존경받는 여성의 상위권에 듭니다. 세계가 그녀를 존경하는 까닭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명랑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따뜻한 마음씨 때문입니다.

엘리노어는 세계에서 존경받는 여성의 상위권에 듭니다. 세계가 그녀를 존경하는 까닭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명랑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따뜻한 마음씨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세의 특징을,“감사치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딤후 3:2). 사람들이 감사치 아니하면, 세상이 끝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도 감사가 없으면 말세입니다. 말세가 되면 막가파-무대뽀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면 감사가 메말라버리고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항상 불평타령입니다. 막가파입니다.

정신병원 봉사자가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어서 그만 두느냐? 힘들어도 보람은 있다! 왜 그만 두냐, 그렇게 봉사했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있어야 하는데 감사가 없답니다. 그래서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만 병자가 아닙니다. 감사가 없어도 정신병자입니다. 제 정신이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하고, 교회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사는 감사할 일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감사절을 맞아 설교준비를 하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면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많고 감사제목이 손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감사한 일 때문에, 그런 사람들 때문에 털고 일어서는 게 목회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사이클로 다이얼을 맞추는 날입니다. 그래서 불평 바이러스 털어내고 감사지수 쭈욱~ 올리는 날입니다. 감사지수가 높아야 깨끗한 청정 믿음 됩니다. 불쾌지수… 그건 날씨 때문이나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감사지수가 약해서 그래요!

 

믿음이 좋으면서도 이외로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으면 만족지수 행복지수도 낮습니다. 이규태씨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병이 ‘감사 결핍증’이라 지적했습니다. 물건 사면 주인들은 “감사합니다”는 말 대신 “또 오세오” 이기적 인사를, 아이들에게 장난감 사주면 고맙습니다, 보다 신난다! 해요.

서양인들은 감사지수가 높습니다. 한국은 기독교역사가 130년밖에 되지 않아 말씀이 머리에 머물고 서양유럽은 말씀이 손과 발까지 내려가 기독교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이 많이 쓰는 용어 50개 중에 28개가 “감사하다” 와 연관된 말이랍니다. 옷 한 가지, 신문 한 장 사고 팔 때에도 “감사하다”“땡큐 유”. “싫어요” 하는 말에도 “노 땡큐!” 땡큐가 들어갑니다. 감사가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사람들은 앞으로도 땡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흑자(黑字)를 유지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감사는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삶을 풍성합니다. 감사를 천삼(天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사마음에 하나님은 건강과 풍요로움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쿠바, 멕시코… 등등의 남미는 미국과 같은 위도(緯度)에 속하면서도 가난하고 무질서하고 낙후되어 있습니다. 남미가 훨씬 더 좋은 자연조건과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세계 최강인데 남미는 여전히 질병과 기아에 허덕입니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북미는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개척한 감사의 땅이다. 그러나 남미는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개척한 탐욕의 땅이다. 북미와 남미가 현격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지극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요. 남미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니 감사보다는 탐심에서 나오는 불만불평으로 가득 찼습니다. 오늘도 빈곤과 무질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국은 신앙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도착하여 먼저 교회-학교-집을 세웠습니다. 첫 수확으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감사신앙입니다. 감사는 그 사람의 신앙의 질(質)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감사를 신앙의 척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척도인가요? 성경? 새벽기도? 금식? 봉사, 헌금… 모두 척도는 되지만 감사가 가장 큰 신앙의 척도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감사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감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감사절은 미국 청교도가 제정하고 유대인들이 수장절을 통해 감사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감사를 절기화, 정례화했을까요? 이스라엘은‘잊어버림’이라는 고질적 질병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나요? 오죽했으면 모세는 세상에 너희들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민족이 누구이며 너희들보다 많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보세요! 불평릴레이입니다. 왜 불평했을까요? 잊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못 받은 것만 생각하고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받을 것만 달라고 하니 감사가 모자란 거예요! 또 너무 잘 나가고 돈이 펑펑 벌리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실력이 있고 내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다, 생각하면 감사가 없는 것이지요!

 

모세가 자기 백성의 민족성을 잘 압니다. 뿌리 깊은 불평불만의 죄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광야 40년 마감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들에게 마지막 강론을 합니다.  

 

12절, “너는 조심하여…”

 

언제 조심하라고요?

 

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절,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먹고 살만 할 때, 잘 나갈 때에 조심하라는 거예요! 조심은 잊지 않는데서 가능합니다.

 

10절,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잊지 말고… 옛날 종 되었던 때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출애굽 시켜주고 오늘 이렇게 풍성한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다른 것은 잊어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진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아주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경건파들이기에 어려움을 견디려 금식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 되겠다, 돌아가자고 했을 때 누가 말했습니다. 한번만 더 금식해보자!

그때 한 노인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만 생각한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감사한 일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금식일이 아니라 감사일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서 추수 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금식이 필요도 하지만 감사가 없는 금식은 의미가 없고 봉사가 필요하지만 감사가 없는 봉사는 별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은 생각하라! 는 것입니다. 땡큐와 씽크는 a-i 글자 한 자 차이입니다. 생각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감사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첫 조상 아담은 빵을 먹기까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가꾸고 거둬들여서 이를 빻아 반죽하여 굽기까지 15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지금은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으면 끝입니다. 빵을 먹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15단계를 누군가 대신해 주었기에 빵을 먹을 때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식들에게 가르칩니다.

 

한국에서는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쌀 한 톨이 생겨나가기까지에는 88단계를 거쳐야 한답니다. 누군가는 몇 곱절 더 많은 일을 해주어 우리 밥상에 밥이 오르고 반찬이 오르는데도 정작 우리에게는 감사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감사결핍증에 걸렸다, 이규태씨가 진단한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자꾸 높여 가야 합니다. 감사지수는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10명의 환자들을 보세요! 되돌아온 환자는 처음에는 여럿이 했습니다. 그러다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육신의 병고침을 감사했더니 영혼의 고침을 감사하게 되었고 그의 감사는 배로 커졌습니다. 감사는 자꾸 키워야 합니다.

 

강철왕 카네기는,“배은망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마치 들풀과 같으나 감사는 장미와 같아서 물을 주어 기르고 사랑하며 가꾸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감사는 배우고 가르치고 연습하여 길러야 아름다운 장미와 같은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루아침에 헌금으로 왕창하고, 감사할 조건이 생겼을 때 요란스럽게 감사하고 감사 절기에만 감사하는 것보다는 감사 체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체형이 아름다운 신앙체형이 됩니다.

 

나병에서 고침 받는 순간에 열 명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감사의 그룹과 무감사의 그룹입니다. 무감사협회원은 9명이고 감사협회는 1명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남여의 성(姓)으로 나뉘고, 피부의 색깔로 나누지만 감사절에는 감사자와 무감사자, 감사협회에 속한 사람들과 무감사협회에 속한 사람들로 나누고 싶습니다.

 

무감사협회는 모든 좋은 것에서 나쁜 것을 봅니다.

감사협회는 모든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봅니다.

무감사협회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가 얼마나 나쁜지 불평합니다.

감사협회는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 얼마나 좋은 지 깨닫습니다.

무감사협회는 자신이 더 많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협회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감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감사협회 회원들이며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행복한 형제자매 신자들입니다.

 

로버트 로빈슨은 25세에 목사가 되어 목회를 아주 잘했습니다. 영국 기독교사에 스펄젼을 방불케 할 목사였습니다. 영국 제일침례교회에 부임해서 크게 부흥을 일으켰는데 언제부터인가 영적 기운이 소진해져 결국은 교회를 사임하고 낭인(浪人)이 되었습니다.

1700년대, 노인이 되어 마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부인이 기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부인이 책을 권해요. 시(詩)입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읽어나가다가 로빈슨은 책을 돌려주고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 데 자꾸 눈물이 나옵니다. 부인은 로빈슨의 마음도 모르고 더 읽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로빈슨은 눈물을 흘리며 “부인. 이 시는 제가 쓴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로빈슨, 한 때는 대단한 영성가요 설교자였지만 감사가 없으니 유창한 설교도, 기도도 찬송도 심령도 메말랐고 남들은 은혜 받게 해놓고 정작 본인 자신은 황폐한 심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사가 말라버리고 불평으로 채워진 사울의 말로를 그에게서 봅니다. 

결론

옛 속담에 “받은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베푼 은혜는 강물에 새겨라”

 

내가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면 감사할 수 있고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 주신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역시 행복지수가 낮은 불평불만의 신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에 가장 병이 든 형태입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집안의 온도를 높이는 것처럼 감사의 온도도 높입시다. 그러면 감사지수가 넓게 나타나고 행복지수도 높게 나타나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1년 동안도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서로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이름은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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