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는 뜻이 있다!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
서론
5년 동안 우울증을 앓던 엄마가 두 살배기 딸의 입과 코를 막아 질식시켜 살해하고 여섯 살 아들과 함께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딸을 죽이고 자수한 엄마는 38살, 범행 장소는 광주의 한 예배당입니다. 물론 자기도 죽으려 했기에 딸을 먼저 죽이지 않았나, 생각해요! 우울증엄마의 신앙심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신앙심으로도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한 셈입니다.
우울장애의 주요 증상은 의욕 저하와 우울감입니다. 원인도 없이 그냥 우울하고 매사에 의욕이 사라지고 죽고만 싶은 거예요! 특히 여성에게는 25% 정도에 이르며, 감정, 생각, 신체 상태, 행동 등에 변화를 일으키는 심각한 질환입니다. 정상적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선천성, 후천성 모두 있지만 대부분 불행하니 매사가 고통스럽고 괴로우니 우울하고 이게 자리를 잡아버리면 만성으로 우울증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본질을 고해라 합니다! 고해(苦海)는, 고통의 세계, 괴로움이 끝이 없는 인간 세상입니다. 요즘 같은 장수시대는 젊음은 짧고 늙고 병들고 오래 사는 것은 길어졌으니 이전 세대에는 없는 노인우울증 환자도 생겨나고 그래서 죽는 것만큼 늙는 것도 겁이 납니다.
1. 고통의 원인
고통은 왜 올까요? 고통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권선징악.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 착한 사람은 상(賞)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요 없다면 전생에라도 지은 죄가 있었다!
운명론. 내게 왜 이런 불행이… 내 팔자지 뭐… 체념하며 견딥니다. 일종의 팔자론이지요. 불교도나 힌두교도들에게 이런 운명론이 많습니다.
불가지론(不可知論).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내 아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이건 불공평해…. 나는 죄가 없다! 고통에 대한 분노. 억울함입니다.
하나님 동정론. 유대교 랍비 퀴시너는 하나님 동정론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세상의 고통이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음에 분노합니다. 불행은 나쁜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좋은 일은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불공평해…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들에게 잘 하고 싶은데 안 되는 일도 있지 않냐, 는 것입니다. 내 불행은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기에 내 불행에 가슴 아파하니, 우리도 하나님에게 너무 불행의 이유를 알려달라고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해석들은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통을 무시하게 됨으로 고통으로 오는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재수 없이 끼어든 마(魔)라고 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고통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선물이 아니라 내가 당하는 고통도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불편한 진실이지요!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내게 유익이라… '선하니라'. 내게 찾아온 고통을 통해 하나님과 말씀을 더 많이 배우고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니, 나를 선하게 만들고 그만큼 유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원인을 나름대로 분류했었습니다.
야곱의 고통. 순전히 자기 죄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스스로의 목을 조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인생 130년을 험악한 세월이라 토로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제공자였지만, 남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매를 자청하는 어리석고도 불행한 처신입니다.
요셉의 고통. 남들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요셉은 17년을 무지하게 고생하는데 하나 같이 남들 때문에 받은 것입니다. 자기 죄로 얻은 고통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억울하지만 꾹꾹 참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결백을 드러내십니다.
욥의 고통. 하나님으로 옵니다. 욥의 자기에게서 나온 의로움을 넘어 하나님께로부터 입혀주시는 의로움의 옷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통. 아들을 죽여야 하는 고통,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욥과는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의 신분을 얻었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대단한 인물이야!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믿음이야! 이제 너도 알았지? 그러니 시시하게 살지 말고 대단하게 살아라! 아브라함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기 위한 고통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의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선을 만드는 고통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유익이 되는 고통인 것입니다.
2. 고통이 주는 유익
본문을 보세요.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애가는 사랑 애(愛)가 아니라 슬플 애(哀), 슬픔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부르는 고통의 애가입니다. 가정이 망하고 회사가 망해도 억울하고 슬픈데 한 나라가 망했으니 선지자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이며 괴로움입니까?
1절,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
2절,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절,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8절,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절,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오늘의 고통은 누구에게서 왔나요? 1절,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주시다니… 그래서 33절 처음에는 하나님의 본심을 몰랐기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고 고통을 겪으면, 사람이 체념합니다. 기가 죽고 우울증이 됩니다.
누구는, 고통으로 더욱 사나워지고 공격적이 됩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억울함 때문에 증오심으로 불붙고 그 증오심이 주변은 물론 자신의 인생도 태워버립니다.
누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합니다. 자신은 인생을 끝내지만 뒤에 남은 이들의 고통은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물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처음에는 고통과 불행 앞에서 많이 흔들렸습니다.
17절,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절,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만두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고통을 당할 때 계속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아침에 드디어 해결을 봅니다.
23절,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것들이… 이게 뭡니까?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가 있기에 불행과 고통에서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5절, 선하시도다,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32절,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망하게 하시지만 바벨론 70년을 통해 죄의 녹을 벗겨내시고 정결한 민족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높이시고 세우시고 더 크게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고통을 통해 민족이 거듭나고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고통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도 거의 같은 해석을 합니다. 착한 사람이 왜 고통당할까?
-품성을 높이기 위해 고통이 온다! 아프면서 큰다, 라는 말은 육체의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격의 그릇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교만 제거로 고통을 주신다! 교만은 고통을 통해 겸손으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교만의 귀머거리들에게는 고통이라는 확성기로 말씀하십니다.
-구체적 믿음으로 나가도록 고통을 주신다! 가족을 잃으면 천국은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고 교리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제 또 다른 집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살고 있는 실제적인 집입니다. 그래서 사별의 고통을 통해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시야를 넓히려고 고통을 주신다! 고통을 몰랐을 때는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고통을 당해보니 주변의 고통을 돌아보게 되고 이해되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베이치크가 말하는 고통의 최종목적은 인격 결함을 수리함입니다! 아브라함 선민은 이미 의로운 사람! 생활이 의롭지 못하기에 거룩한 성품을 만들려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체육부장관을 지낸 이영호씨는 암(癌) 투병을 할 때 감사의 소감을 이렇게 적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별 것 아님을 깨닫게 되니 감사
-세상에 욕심을 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으니 감사
-갑작스레 죽지 않고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으니 감사
-이왕 죽을 것인데 병중의 왕인 암으로 죽게 되니 감사
-죽어 영원한 행복의 나라인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니 감사
폴 브랜드는 세계적인 외과의사로 미국과 인도의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사역을 50년을 했습니다. 폴 박사는 필립 얀시와 함께 공동집필한 ‘고통이라는 선물’에서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임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나병환자들을 50년 동안 보살핀 폴 박사에게 무고통 무통증은 나병환자에게 최악입니다. 통증이 없기에 불을 만져 화상을 입고 살짐이 떨어져도 모르고…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통증을 느낄 때 살이 살아있고 뼈들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선물이라고 합니다.
폴박사에게 고통은 우리 몸에, 정신에, 영혼에 이상이 생겼다는 통보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고 회개하고 도와달라는 SOS를 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데면데면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고통의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으로 올라가니 고통은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3. 고통을 극복하기
고통은 목표 자체가 아닙니다! 고통은 어떤 이유 때문에 주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통이라면 고통은 우리를 유익하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고통이 해석처럼 답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제 때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재서 박사는 <내게 남은 1%의 가치>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고통의 설명서를 함께 보내는 법은 없다. 고난은 먼저, 설명서는 나중에 온다. 고통은 이메일로 오고 설명서는 배로 온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고난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설명서는 나중에 꼭 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 인생은 밝은 실과 검은 실로 짜여집니다. 밝은 실로만 짜도 안 되고 검은 실로만 짜도 안 됩니다. 두 색을 섞어가면서 짭니다. 하나님께서 형통과 고통을 곁들여 주시는 것도 더 아름다운 우리 인생을 만들어 내시기 위한 섭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온 것입니다. 이 찬송들이 언제 작사 작곡이 되었는가? 1618년부터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30년 전쟁-여기에는 파괴, 약탈과 죽음과 황폐함 등등… 도무지 찬송할 수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원망, 불평, 자학,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데 오히려 가장 은혜롭고 감사가 넘치는 찬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7세기말에 환켄 나우어가 찬송가를 수집해 보았더니 32,712곡이 되었고 몇 년 후에 웨첼이 수집했더니 55,000곡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고통이 찬송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꾀꼬리는 독일의 하르쯔산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멸종되었습니다. 뉴욕의 판매상이 녹음된 새소리로 미국 꾀꼬리에게 가르쳤습니다.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새장을 어둡게 했더니 꾀꼬리들이 두려움 중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이 찬송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노래, 아름다운 노래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고통이 오히려 찬송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35:10 이하)라고 말합니다. 밤중은 슬픔, 고통, 절망, 좌절을 뜻합니다. 오히려 고난이 우리를 노래하게 합니다. 흑인 여가수가 노래할 때 청중이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누구에게서 사사 받았냐 했더니 “나의 스승은 고통입니다! 고통의 스승께서 나를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배우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고통이 주는 순기능이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절,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33절을 같이 읽읍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 무조건 어떻게라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레나, 엘리노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당신 동의 없이는 당신에게 고통을 가하지 못한다.”
여호와의 본심을 끝까지 믿는 사람들만이 고통을 선물로 만들어 낼 것입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 이것이 때로는 불편한 진실이면서 소망의 진실입니다. 오늘 당하고 있는 고통이 거름이 되어 더 큰 믿음의 나무로 성장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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