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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은혜가 사라지고 있다!(창세기 25:1~7)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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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사라지고 있다!

창세기 25장 1~7절

서론

이스라엘 역사에 3대 족장(族長)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 패밀리입니다.

아브라함, 출발은 대단했는데 늙어갈수록 끝이 졸아들어버립니다. 고구마 모양 같아요!

이삭. 시작이나 끝이나 그게 그거인 사람. 아무 특징이 없는 것이 이삭의 특징입니다. 진취적인 아버지 위세에 눌리고 걸출했던 아들에게 치여 아들 노릇,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했던, 좋은 말로는 진국이고 안 좋은 말로는 꽉 막힌 사람, 이류인생으로 보여요.

 

야곱. 대단하지요! 시작은 아주 안 좋았어요! 태중에서 형과 싸우면서 평생을 가해자로 살았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가장 성화된 모습을 보이고 최고의 생애로 등극한 인물입니다.

1. 아브라함의 표면(表面)

표면은 겉모양, 거죽이지요! 등장인물이 가장 많은 책 2위가 삼국지, 1위가 성경입니다. <성경계보>를 펴낸 신오균씨에 따르면 등장인물이 2200(2197) 정도,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불린 것을 계산하면 2618명이랍니다. 2200명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예수님, 다음이 아브라함! 유대인, 비유대인, 구약신약에서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는 아브라함 삼손 솔로몬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보니 황당한 면이 많아요!

아브라함. 대단하게 읽었고 배웠고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즉시 순종하고 즉각 떠났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가이고 진취적인 신앙인입니다. 아브라함의 출생지 갈대아 우르는 당시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술, 의학, 사법제도가 발달한 곳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서판은, 오늘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흥미를 끌고 있는 삼각법의 문제를 우르의 수학자들이 풀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문명 도시인에게 가나안으로 가라! 는 것은 뉴욕 월가에서 10억 연봉 받던 사람에게 연봉 1000만원 받고 아프리카 오지로 가라! 는 명령입니다. 누가 쉽게 그 명령에 아멘! 하며 순종을! 그것도 즉각적인 순종을 할 수 있습니까? 대단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축상의 분쟁이 일어나자 선택권을 조카에게 준 사람입니다. 사람도 좋고 믿음도 좋은데 물질에는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에게 너른 목초지를 보이며 네가 먼저 선택하라. 대단한 인격입니다. 모리아산에서 자식을 산제물로 바치라 하자, 죽이라면 죽이겠나이다~ 최상의 헌신을 보였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달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전당에 오른 인물들을 거명할 때 아브라함에 대해 10절 가까이 할애합니다. 기라성 같은 에녹도! 노아도! 딱 한 줄로 넘어가는데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이 장편(?)에 속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브라함을 평가했습니다. 믿음의 영웅! 믿음의 달인 우리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답게 그렇게 믿고 떠나고 살아야 할 텐데 헌신하고 헌물해야 할 텐데 그러나 세월이 지나 아브라함을 들여다보니 결코 훌륭한큰바위얼굴만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이면(裏面)

아브라함의 이면-뒷면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많아요. 키가 크면 그림자도 큰 것처럼 훌륭하게 보였던 것만큼 결함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면을 보고서도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했던가요? 과연 이 사람이 우리가 생각했던 믿음의 조상- 믿음의 달인인가?    

 

아브라함의 강점은 즉각 순종입니다! 정말 그는 즉각적 순종을 했나요? 처음에는 즉각적 순종을 했어요! 그러나 그게 사실만은 아니에요!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 하란에서 체류합니다. 하란은 달의 여신을 모시는 센터, 우상도시입니다. 여기는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여기에 15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행을 거절했던 것 같아요! 데라는 히브리전승에는 우상장사라고 해요! 달신의 신을 섬기는 하란 땅에서 장사가 잘 될 것처럼 보였던가요? 그래서 15년 가까이 체류했고 그만큼 아브라함의 즉각적 순종, 완전한 순종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걸 간과하고 있는 거예요!

 

여종 하갈에서 얻은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사라의 몸에서 대민족을 만드신다, 언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여성성()이 사라져 더 이상 출산기능이 없다 판단되자 사라의 종용을 기회로 여종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식이 아닙니다.

 

지금도 보세요!

1절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이해가 안 가요. 아내 잃을 때 그의 나이 137세였고 175세까지 살았어요! 아내 잃고 한 40여년 살았어요! 아내가 죽었을 때 애통하며 호곡하던 사람! 그랬는데 아내가 죽고 가나안 여인과 결혼합니다! 아들에게는 가나안여인과는 절대로 하지 말라 종에게 맹세까지 시킵니다. 그런데 저는 홀딱 가나안여인과 결혼합니다. 자식을 6명 낳은 것으로 보아 젊은 여인을 취했던 것 같아요!

 

그두라와 결혼 이후에는 믿음의 행적이 사라집니다. 곳곳에서 제단 쌓던 아브라함 에셀나무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르던 사람 모리아산에서 아들을 바치려던 위대한 믿음의 조상 그랬던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 이후에 신앙행적이 없어요.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도 없고 제단도 없고 기도도 없고 어떤 헌신 기록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있다면 아들을 장가보낼 때 비신자를 며느리로 맞을 수 없다! 유일하게 그게 아브라함의 신앙행적입니다. 40년을 너무 평범하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언약-대민족이 되는 언약이 이삭을 통해 끈은 이어지니 모든 하나님의 약속성취는 아들에게 맡겨버리고 나는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라인에서 벗어나 세상 남자처럼 그렇게 생애를 마무리하고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영적 배터리가 떨어져 점점 빛을 잃어가고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특출하게 시작했다가 평범하게 끝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손자 야곱은 반대입니다. 그는 출발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쁜사람표! 야곱의 이름표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부인들 자식들까지 속인 사람, ()이 나쁜 사람이지요!

 

그러나 130세 되었을 때 인생에 터닝 포인트-생의 분기점이 일어납니다. 실종자 요셉이 총리가 되고 아들 덕에 애굽으로 이민 갑니다. 거기서 147세 살았으니 17년을 더 살았습니다. 17년을 야곱은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녹 쓰는 것보다는 닳아 없어지는 생애를 살겠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회개와 긴장감으로 살았습니다. 자식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돌보며 알아갔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중보기도했고 속죄했습니다. 그러면서 성화가 되고 아브라함을 뛰어넘는 위인이 됩니다. 애굽의 말년이 영적황금기요 추수기입니다.

 

죽을 때 야곱 보세요! 대단해요! 12명 자식을 앉혀놓고 미래를 예언하는데 분량대로 예언했다고 했습니다. 분량대로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그 사람의 기질과 특징을 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관심 없다 섭섭했던 아버지가 어찌 그리도 정확히 자신들을 알고 예언하는지 12아들들이 그 앞에 존경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비해 아브라함은 40년을 더 살았어요! 아브라함은 어떤 예언도 유언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대인(大人)이 믿음의 소인(小人)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참 안 된 일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조상자리를 교체해야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합니다. 이게 성경의 기록사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의 표면은 깔끔했지만 이면은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생 졸업장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상()을 주시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용서, 구원, 도움의 의미 외에도 그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호의, 친절, 선의, 관대함, 아량, 사랑 등의 의미입니다.

은혜는 한쪽 눈은 감아버리고 다른 한 쪽 눈은 크게 들 때에 이루어집니다. 안 좋은 것에는 크게 눈을 뜨고 좋은 점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이것은 심판입니다. 안 좋은 모습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좋은 모습에 눈을 두 배로 크게 뜨고 바라보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면(裏面)-실수에는 눈을 감아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표면, 아브라함이 잘 하는 것만 바라보셨습니다. 잘 하는 것은 칭찬하고 상()을 주시면서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비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실수를 간과합니다. 간과는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입니다. 때때로 책망하고 야단도 치지만 항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못 본 척했고 수치와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언약의 계약자! 믿음의 조상으로 간주했습니다. 자격도 실력도 부족했지만 언약의 계약자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많은 이면적인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무엇이며 교회는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상징하는 언약,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중 최고의 단어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교회에서 부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은혜의 저수지가 되고 은혜의 기관, 은혜의 수단입니다. 저수지에서 물을 빼면 아무리 저수지가 크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대형 댐이 말라버리면 댐의 사이즈가 무슨 가치가 있나요?

 

교회는 사이즈로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교회에 은혜가 있는가, 은혜가 말라버리고 시스템만 있고, 사람들만 보이는가? 그것이 교회의 가치를 논하는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직분도, 신앙 연수도, 교회 봉사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은혜의 크기로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합니다. 은혜가 마른 직분인가, 은혜가 사라져 버린 신앙연수인가, 은혜가 가득 채우진 직분인가? 그 은혜가 넘쳐서 남들에게 흘러가고 있는가? 좋은 것은 알리고 실수를 품어주는 은혜가 작동되는 사람인가? 은혜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 은혜가 사라졌어요>라는 책을 썼습니다. 은혜의 기관이던 교회저수지에서 은혜의 물이 빠지고 있다는 거예요! 교회에 은혜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예요! 교회 안에 형제자매라는 형제애보다는 계급화된 직분으로 서로를 대하는 교회, 약함을 채워주고 독려해주는 재활기관 같은 은혜의 교회가 서로의 부()와 명예와 외모를 뽐내고 자랑하는 핼쓰클럽 같은 교회, 조금만 실수도 용납되지 못하고 허물을 묻어줄 마음의 무덤들이 사라지는 교회 상대방의 잘못을 현미경으로 들추어내고 찾아내어 확대경으로 온 교회에 선전하는 바리새인들! ! 한국교회에 은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저수지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나쁜 교회와 착한이단 중에 어디를 택할 것인가?”라는 말이 나오겠어요! 영국의 한 소녀가 이런 기도를 합니다.

 

오 하나님 나쁜 사람들은 착해지게 해주시고 착한 사람들은 친절해지게 해주세요!”

 

친절이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따뜻한 얼굴표정에 있고 따뜻한 악수에 있습니다. 헬라어로 은혜를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기쁘다 즐겁다, 동사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에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쁨이나 즐거운 환한 표정이 아니라 짐짓 거룩한 척 하는 무표정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교회는 잘못을 청산하고 가는 곳이지 있는 모습 그대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말로는 죄 있는 사람들을 오라하지만 교회는 죄들을 들춰내고 공격하고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은혜보다 도덕이 먼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성장이 아닙니다.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의 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얼룩투성이, 찌질이 아브라함의 민낯을 믿음의 조상 얼굴로 만들어 낸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실패와 약점에는 못 본 척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간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열매가 아브라함입니다!

 

사라 역시도 남편을 은혜로 대했습니다. 그녀는 허물투성이 남편에게도 깍듯이주여 주인이시여 순종으로 단장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벧전 3:5). 남편의 허물을 못 본 척 간과하고 남편을 하나님처럼 떠받들었던 사라 그 은혜로운 순종과 은혜로운 언어, 허물을 덮어주는 은혜의 행동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내를 장사지내면서 더 애곡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은혜가 사라지면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집단이고 기독교 동아리에 불과합니다. 은혜만이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한국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의 티끌을 찾아내려는 현미경 든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허물을 알리려는 확성기를 든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갈수록 냉랭하고 사랑이 없고 그래서 이단들은 저희들끼리 사랑으로 뭉치기에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건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요, 은혜가 꺼져버리면서 생겨나는 교회의 역기능의 결과입니다.             

결론

한국교회 애창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05장은, 영어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놀라운 은혜입니다. 작사자 존 뉴턴은 어릴 때 교회를 다니다 선원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버립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신앙인들을 타락시키며, 노예무역선 선장으로 죄란 죄는 다 짓습니다.

자신이 노예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둔 북대서양 폭풍우속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 후, 바울처럼 자신을죄인의 괴수라고 회개하고,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어 윌버포스의 노예무역폐지 투쟁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살리신을 비롯,‘시온성과 같은 교회’‘지난 이레 동안에 등도 작시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3절은,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되는 때 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회개하고 죄악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증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주의 은혜 내가 받아 교회에 이런 은혜가 사라져버린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은혜의 고백을 놓치면 종교로서 기독교인, 바리새인이지 진정 회심한 교인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2:15)

 

스티븐 브라운은 그의 책에서수의사들은 개만 보고도 생면부지의 개 주인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주인이 은혜로우면 개도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주인이 난폭하고 공격적이면 개도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은혜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며 죄를 품어주지 않는 교회에 누가 오겠습니까? 은혜가 풍성해야만 교회다운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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