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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이제야 너를 알았니?(창세기 22:9~1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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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이제야 너를 알았니?

창세기 22장 9~14절

서론

덴마크 출신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의 작품에 미운 오리새끼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동화에요! 큰 알에서 태어난 새끼오리는 다른 새끼오리들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합니다. 처음에는 품어주던 어미오리마저 생김새가 너무 달라 외면합니다.

미운오리새끼는 상처를 안은 채 집을 떠나 착한 할머니 집에서 지내지만 고양이와 닭의 괴롭힘에 도망쳐 나옵니다. 어느 날 우연히 하늘을 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못생긴 오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백조였던 거예요. 미운오리새끼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황홀한 백조로 행복하게 산다는 동화입니다. 내가 누구인 줄을 안다면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여김 받는 사람임을 안다면 훨씬 행복하게 산다는 동화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축복송!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알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나는 사랑받기위해 태어났다~ 나는 사랑 받고 있다 어린 시절에 이런 사랑의 DNA를 심어주는 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유산입니다. 내가 우리교회에서 사랑 받고 있구나 여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러면 교회생활은 성공입니다. 우리교회 30주년 이후에, 사랑의 자존감! 행복한 자존감의 온도가 올라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멀리 2천년 후의 메시아를 바라보는 그 믿음을 칭찬하시는 내용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놔두고 떠나라! 는 명령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는 즉각 순종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시련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하나님의 본심을 묻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하나님께서 자식 준다, 약속해 놓고 25년을 질질 끌었습니다. 지칠 때쯤에 겨우 외동아들 하나를 주시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합니다.

 

주실 때는 언제고 바치라는 것은 무슨 심술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본심을 다 몰랐지만 이번에도 순종합니다.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때 하나님께서 급히 칼을 멈추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 마지막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에요!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당시로 치면 영국의 런던이고 가나안은 아프리카입니다. 문명지대에서 살던 사람이 가라! 한 마디 말에 순종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그래서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은 믿음의 전당 1호 위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쳐라! 는 시험을 통과시킨 후에,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니? 평생 믿음으로 살아온 아브라함을 갖고 장난치는 것입니까?

 

25년 동안 기다려 얻은 아들을 죽이라 할 때 여러 날 잠을 못 이루고 부인에게도 말을 못했어요. 아들을 생()으로 죽인다는데 어느 엄마가 그냥 가라고 하겠습니까?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아들에게도 못했습니다.

7,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이삭도 자기를 번제로 인신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아내도 몰라! 아들도 몰라! 5절에 보면, 함께 따라나섰던 종들도 몰라! 몇 날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하나님의 본심을 묻고 혼자 가슴에 숨긴 채 모리아산으로 올랐고 아들을 눕히고 칼을 든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래놓고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 내가 알겠다!

 

반 죽여 놓고 속 터지는 말씀이지요! 지금까지 내 믿음은 무엇입니까? 내 순종은 모르셨나요? 말씀을 몇 번 어겼거늘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셨습니까? 항의할 만도 한 상황입니다.

 

객관적 입장으로 제가 볼 때도 하나님께서 너무 하셨어요. 하나님에게 올인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너무도 몰라주신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 사람의 목숨을 갖고 장난치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심심해서 사람을 테스트해보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 말씀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2. 입술의 고백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참 믿음이었구나?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바치는 순종을 통해 비로소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비로소 아셨다는 것은 말로만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경외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입니까?

 

21:33,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개역성경에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더라. 이건 지식이고 자칫 관념입니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목숨을 달라, 쉽지 않아요.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게 입에만 있는 믿음인가,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믿음인가,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이삭을 바침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고백의 진정성을 보여라, 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딜레마가 생긴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언약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로 열국의 아비, 어미가 됩니다. 그런데 언약의 자손으로 삼으신다 해놓고 이삭을 죽이라? 이건 하나님 안에서 모순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진리자체이기에 내부에서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뭔가 섭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최악의 경우, 이삭을 죽여도 죽은 이삭을 살려주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부활의 믿음으로 딜레마를 넘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들에게 말합니다.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이건 번제예배입니다. 번제는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자 빈손으로 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을 보세요.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제사인데 어떻게 같이 돌아옵니까?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설령 죽여도 다시 살리신다는 부활신앙입니다.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순종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생부활을 믿는 그 믿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았다 지식과 행동이 함께 하는 산 믿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지식과 고백을 전제로 압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내 모든 것의 소유주입니다.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손해요 희생이요 양보입니다. 그럼에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는 두 믿음이 하나가 되지 못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할 때가 많은데 아브라함은 사랑한다는 입술의 고백에서나 고백의 진실성을 행동으로나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야 알겠다, 하신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무엇입니까? 머리로만 말로만 입으로만 헌신하고 자기희생이 없는 믿음은 네가 이제야 네 믿음을 알았노, 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고백에 행동이 동반될 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칭찬을 우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입술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행동으로는 또 다르게 주인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 내려놓고 주님만이 내 주인되심을 입술로 행동으로 보여드리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믿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믿음이요 믿음생활인 것입니다.

3. 내가 준 믿음이 얼마나 큰지 너 자신도 몰랐지?

아브라함도 그동안 자기 믿음이 어느 수준인지 몰랐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십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는 이런 말씀이십니다.

 

이제야 네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지? 아들을 바칠 각오로 나를 사랑했잖냐? 아들을 포기할 각오로 내게 순종했쟎냐? 누가 너처럼 그런 행위를 보이겠고 믿음을 보이겠느냐? 그러니 네 자신의 믿음이 대단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네게 준 믿음이 얼마나 큰 믿음은 줄을 알고 살아야 한다. 네가 너에게 준 그 믿음이 너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것을 이제 알고 살라!”

 

사실 아브라함은 그런 대단한 믿음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믿음의 정도(正道)를 걷지 못했습니다. 거짓말도 했고 사라에게, 이스마엘 모자(母子)에게 제대로 처신을 못했습니다. 지금도 아들로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아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는 심정으로 결심했고 3일을 걸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모리아산 꼭대기까지 올라 아들을 죽이려 칼을 들었고 끝내는 하나님께서 됐다! 너의 믿음을 알았으니 그만 하고 아들을 데리고 내려가라! 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아찔한 순간들이고 어떻게 그런 대단한 결정으로 순종할 수 있는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는 그런 배짱이나 믿음이 없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도하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가 위대하다는 것에 우쭐하지 않고 그런 굉장한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뭐를 믿고 내게 그런 믿음의 시도를 하시는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험을 통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큰 어려움도 시험도 믿음을 주시면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큰일에도 그만한 믿음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큰 믿음의 그릇을 담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미 만들어 놓았으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라 내가 책임지마! 그걸 믿는 큰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라고 본문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대단하니 대단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니?

 

사실 저는 이 대목에 설교의 강조점을 주고 싶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맞는 행동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너는 아들을 바칠 만큼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그런 믿음을 네 안에 넣어놓았어! 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임에도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을 했냐?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애굽의 바로 왕에게 아내로 줘버리면 나의 약속은 어떻게 되겠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넘겨버리면 이삭은 어떻게 출생하려던 것이냐? 내가 준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믿음의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니 언약집안이 분란이 났잖냐?”

 

너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니 이제는 그런 불신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결코 그런 일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너는 미운오리새끼가 아니고 백조다! 너는 구정물 속에서 쓰레기나 건져먹는 오리새끼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백조다! 너는 백조답게 화려하게 아름답게 날갯짓을 하며 창공에서 살아야 한다! 백조의 날개를 접은 채 구정물이나 휘저으며 살아서야 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정체성을! 자존감을! 그에 걸맞은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아브라함에게 무서운 시험을 주시면서 그 사실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막을 내립니다. 다음 23장에서 사라가 죽고 역사는 아들 이삭에게로 넘어갑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믿음에 걸 맞는 생애를 살았고 더 이상 인생이 갈지자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내가 누구인가? 그걸 알았을 때 아브라함은 그 믿음에 맞는 믿음의 행동을 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얻어진 믿음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결론

아프리카에 열등감에 빠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괜찮은 아가씨인데도 스스로의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결혼풍습은 결혼할 때 신랑이 장인에게 소를 지참금으로 지불했습니다. 지참금 소가 많을수록 가치가 있는 신부였습니다. 한 마리 소를 바치면 한 마리 가치의 신부가 되고 다섯 머리를 바치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여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런 계산법이라면, 이 여자는 소 한 마리도 넉넉할 정도였습니다.

 

쟈니 총각은 신부가 될 여인을 위해 소를 8마리나 내 놓았습니다. 신랑 아버지도 동네사람들도 그건 너무 많다, 한 마리로도 충분하다 했더니 쟈니 총각은 이렇게 말했지요.

 

그녀가 소 여덟 마리의 가치가 있음을 모든 사람, 특히 그녀 자신이 알아야 합니다.”

쟈니 총각의 멋진 선물에 그녀의 자존감이 살아났고, 신부가 되자 8마리의 가치에 알맞은 품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백합화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워 갔습니다.

 

물맛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맛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맛을 찾아야 하고 교회는 그 맛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맛, 사람의 맛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사람이야, 거짓말이나 하고 목숨 부지를 위해 아내도 버리고 지금도 이게 뭐냐, 아들을 주었더니 선물을 준 나는 잊어버리고 선물에만 아예 맛이 갔구나? 너는 믿음의 조상이야~ 조상은 조상처럼 살아야 해~ 네가 얼마나 큰 믿음의 자산이 있는가를 네가 좀 알고 그에 맞게 처신했으면 좋겠다! 알았느냐? 그게 본문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미운오리새끼가 아닙니다. 백조입니다. 백조의 자화상을 가지세요! 여러분은 한 마리의 소와 바꿀 수 있는 신부가 아니에요! 8마리 소의 지참금도 아까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나를 사주신 귀한 사람, 사랑을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기에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00통의 편지가 있는 거예요!

우리교회 목회관 행복한 자존감을 가지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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