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복원하자!
요한일서 4장 7~11절
서론
다음 주일은 창립 30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제자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의 앞날을 맡겼습니다. 요한아, 보라 네 어머니다! 왜 요한일까요? 예수님에게는 사촌 동생이고 마리아에게는 조카래서? 이런 구도는 아닐 거예요! 왜냐? 사역하던 과정에서 누가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저기에 와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나의 모친이며 내 형제다”
이런 말씀으로 보건대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은 인척관계보다는 요한의 성품을 보셨던 것 같아요! 요한은 사랑의 제자입니다. 사랑이 많았어요! 사랑은 인정이지요. 내 어머니를 부탁할 때 인정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겠어요, 무뚝뚝한 사람에게 맡기겠어요? 이왕이면 인정이 많은 사람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그렇게 요한은 사랑이 많았고 마리아를 섬기면서 사랑은 점점 성장하고 무르익었습니다. 마리아를 보낸 후 에베소교회를 담임했는데, 죽을 날이 임박함을 알았던 제자들이 강론을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서로 사랑하시오!”딱 한 마디를 하고 침묵합니다. 재청했더니 “서로 사랑하시오” 세 번째 청했더니 이번에도 “서로 사랑하시오” 그뿐입니다.
제자들은 노(老)사도의 심중을 알아차립니다. 교회가 사랑이 식어져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십자가 사랑이 죽어버리면 종교교단으로 전락한다는 것! 그래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훈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기독교 진수는 십자가사랑이라 가르침을 준 것입니다.
요즘은 사랑이 대세입니다. 연속극도 영화도 사랑을 쓰지 않으면 성공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듣는 사랑이라는 주제-우리가 다시 사랑을 말하는 것은 교회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았고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교회의 운명이고 존재의 목적입니다. 신자는 결국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서로’사랑합시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자…. 쌍방형 사랑을 말합니다. 일방적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가는 사랑만 있고 오는 사랑은 없는 짝사랑은 사랑의 열매와 기쁨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짝사랑은 있는 법, 제 짝사랑은 초등학교 6년 내내 김숙자였어요! 나만 아니라 모든 남자애들의 짝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짝사랑은 열매가 없습니다. 첫사랑은 아련한 추억이라도 있지만 짝사랑은 지나놓고 보면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헛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백번 해야 소용없습니다.
짝사랑은 표현되지 못한 사랑입니다. 짝사랑은 짝은 있는데 혼자 합니다. 나는 네가 좋아! 너는 어떠니? 이렇게 물을 수 없이 속으로 혼자 사랑하고 때로는 죽도록 사랑합니다. 그러면서도 표현이 안 됩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부도난 어음에 불과한 사랑입니다.
짝사랑의 특성은 투자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들여야 합니다. 투자된 만큼 기쁨도 있고 열매도 맺습니다. 짝사랑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시간도 들이지 않습니다. 혼자서만 합니다. 그러니 열매도 없습니다.
사랑에는 상처받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짝사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정적(靜的)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동적 사랑-움직이고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대가를 지불한 사랑입니다. 상처 받기를 각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일방적 사랑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통해 당신 자신의 상처받은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끝까지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을 위해 희생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고! 높은 것이고! 넓은 것임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품은 너무 넓어 모든 죄인을 품으시고 모두를 받으시며 사랑을 고루고루 보이셨습니다. 그 분께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새 계명을 준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일방적인 사랑의 아픔을 아셨기에 그분은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양방형의 사랑-쌍방형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사랑이 짝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적십자 표어가, 사랑은 동사다! 동사는 움직이며 실천하며 표현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의 동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먼저 인사하는 것이다.”
“사랑은 먼저 웃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당신은 미소 하나로 목사와 동역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친절함은 늘빛교회의 부흥입니다. 사랑은 큰 것에서가 아니라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양방형이 될 때 자라납니다.
칼 메닝거는 “사랑은 사람을 치료한다. 그것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양쪽 모두를!”라는 명언(名言)을 남겼습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양방형사랑을 해야합니다.
2. 우리가 ‘더욱’ 사랑합시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의 초보자에게 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사랑 해오고 있는 분들, 나름대로 사랑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들에게 더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더 잘 하자는 것입니다. 사랑에 더 많은 사랑을 업고 달리자는 것입니다.
“더욱 사랑하자”-사랑의 플러스(+). 십자가는 플러스입니다. 플러스는 더하기입니다.
무엇을 더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내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 위에 얹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 기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항상 남에 대해 내 행복을 얹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허다한 죄를… 허다한 죄는 큰 죄를 말하기도 합니다. 큰 죄-큰 녹을 없애려면 열의 강도가 쌔야 합니다. 큰 허물에는 큰사랑으로, 메가톤급 허물에는 메가톤급 사랑으로 덮을 때 교회는 변화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사랑의 위대성은 허물을 덮음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허물을 덮어줄 때 목사의 설교로도 단단한 조직으로도, 치열한 성경공부로도 일어나지 않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인내가 들어있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 아니라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광야 40년의 이스라엘이 없었을 것이고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건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기다려 준 예수님의 사랑이 시몬을 베드로가 되게 했고 의심꾼 도마를 확신에 찬 순교자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부부는 3주 서로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딘다고 합니다.‘다름’으로 만나‘같음’으로 사는 게 부부입니다. 다름이 같음이 되기 위해 30년 참은 것입니다.
사랑에는 한도액이 없습니다. 쓸수록 사랑은 더욱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우리의 사랑에 또 한 번의 사랑을 덮읍시다!
3. 우리가 “다시” 사랑합시다.
에베소교회는 사랑의 사도가 목회를 했습니다. 얼마나 사랑이 충만하고 사랑이 넘칩니까? 교회이름을 사랑의교회라 정했으니 그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칩니까? 우리교회 이름을 늘빛교회라 정했으니 얼마나 빛이 풍성하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서 살았고 여기에서 요한복음을 집필했습니다. 12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사랑의 대사도 요한이 말년까지 목회했던 에베소교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십니까?
에베소교회는 장점이 많은 교회입니다. 계시록 2장에 우리 주님께서 환상 중에 밧모섬의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절,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얼마나 대단한 교회입니까?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은 황제숭배자들로 세속주의자들입니다. 우리 역사로 말하면 신사참배자들입니다. 그런 황제숭배자 신전(神殿)참배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교회요 신자들입니까? 이만하면 우수한 교회가 아닙니까? 그러나 여기에 결정적인 결함이 나옵니다.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사랑이 뜨거웠던 교회가! 사랑의 대사도가 목회하는 교회가 다른 것은 부족해도 사랑은 넘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버렸고 잃어버렸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교리에만 매달린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서 서로 사랑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침투했고 이단들을 경계하다보니 교회 안에 유입되는 신자들을 경계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황제숭배자들을 미워하다보니 사랑의 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우수한 교회, 우수한 교리를 갖고 있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교회… 사도 요한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의 강점이라 자부하던 것이 수치가 되었고 교회 존폐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사랑이 유실된 교회! 그것은 어떤 교회이고 어떤 신자입니까?
바울은‘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유익이 없다! 왜? 하나님의 본질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사랑을 유실하고 냉랭한 에베서교회에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 결과 지금은 유적지로 변한 다른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첫 사랑을 유실한 결과가 이렇게 무섭고 성령의 소리에 귀 막아 버린 결과는 영적인 초토화를 이루고 이슬람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의 유실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 일도 중요하고 사역도 중요하지만 식어진 가슴으로 일한다면 식어진 열매만 만들어 놓게 됩니다. 식어진 가슴으로 사람을 키운다면 식어진 사람들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식어진 곳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식은 곳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자궁이 식어져 있다면 아이가 생기겠습니까? 아이가 자라겠습니까? 식은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어떤 일에 열정을 내는 것보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지금의 한국교회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론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준세이라는 복원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그림들을 복원해 내는 사람입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누구신가? 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원사-사랑의 복원사였습니다. 다윗의 가슴속에 울면서 자원하는 심령을 주소서-사랑을 복원해주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의 복원사입니다.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식어진 가슴, 상처받은 사람들, 서로 의심하며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교회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자 했습니다. 첫 사랑을 고백했던 곳, 첫 믿음을 고백했던 곳-순수하고 욕심 없고 겸손했던 곳, 그 출발점에서 다시 사랑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첫 사랑이 사랑이 식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을 복원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베드로로 하여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으로 복원시켰습니다. 제자들도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사랑이 이긴 것입니다. 사랑의 회복,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의 눈 덩이를 굴리고 나가면서 허다한 허물을 덮어가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역사와 변화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위대함입니다.
성령님도 사랑의 복원사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사랑의 불이 붙었습니다. 자신을 다 내어놓았습니다. 사랑의 불이 붙으면 아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도, 교회도 사랑의 복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다시 사랑으로 일어서야 하고 우리의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처받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처받을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사랑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을 달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사랑의 온도를 올리는 30주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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