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신다!
창세기 2장 19절
서론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믿음이 참 좋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우리가 비록 완벽하지는 못해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살았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봉사생활…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받고 싶은 것도 많고 기대하는 축복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힘들고 막막할 때… 그래서 원망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상할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런 물음은 일본 산께이신문이 제기했던 의문과는 달라요. 산께이신문은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한국대통령은 무얼하고 있었나? 청와대에 있었나, 청와대에 있었다면 누굴 만나고 있었나? 일국의 대통령 사생활을 거론한다는 것은 사실유무와 관계없이 유치하고 무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종종 하나님께 묻는 질문들은 결코 유치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대답을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질문입니다. 그 대답이 19절입니다.
19절,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섭섭하게 생각하던 하나님이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나?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아담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피조물의 이름을 직접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 1:5).
부르시고… 두 번이나 연속해서 나오지요? 부르시고… 히브리어로 ‘카라’입니다. ‘카라’는 작명(作名)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 별…들의 이름을 직접 지었습니다. 새와 동물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뜻밖에도 첫 사람 아담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카라) 것이…”(19절)
부르나… 부르는 것이… 이것이 카라입니다. 아담도 카라~ 작명가입니다. 왜 동물의 작명을 아담에게 맡겼을까요? 별들 이름을 지어주다 보니 더 이상 이름이 없어서? 동물까지 작명해줄 시간이 없어서 아담에게, 야! 동물의 이름은 네가 지어라, 순전히 아담을 골탕 먹이려는 것인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들을 끌어오시고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려고 한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흙으로 만든 아담의 여러 자질을 높여주려 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들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속성의 어느 부분을 인간들과 공유하시려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아담에게 동물 이름을 맡겼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지혜를 더 계발하고 동물을 섬세히 알고 사랑하고 성공적인 관리자로 돌보도록 직접 작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야 그랬다지만 아담 입장에서는 막막~ 합니다. 이름 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 열 명 낳고 이름을 지어보세요. 오죽했으면 영순이, 일순이, 이순이, 칠순이… 말순이, 오복이 칠복이 구복이…말복이라고 지었겠어요?
동물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류학자 마이어는 현존 생물이 약 200만 종에 달한다고 해요. 절반은 식물이고 남은 100여만 종의 동물 중 해양생물은 절지동물 81만 5천여 종을 포함하여 95만(942,400) 종입니다. 나머지가 5만 종이 육상생물입니다.
성경은 생물분류학과 달리 교배가 가능하면 같은 종류로 봅니다(레위기 19:19). 교배가 가능한 생물을 같은 종류로 통합하면 아담이 1차적으로 이름 지은 들짐승과 새들은 3,500여 종의 포유동물과 8,000여 종의 조류… 합하여 약 1만5천 종 내외였을 것입니다.
분류학의 아버지 크리스천 생물학자 린네(1707-1778)는 8,000여 가지의 식물과 4,162종의 동물을 분류했습니다(1758). 이 많은 생물을 분류하는 데는 20년이 걸렸습니다.
그 많은 동물 이름을 어떻게 지어요? 새들도 데리고 오셨어요. 이름들을 다 만들어 주라, 는 것입니다.
골치가 아픕니다. 사람이 힘들면 여자는 마음이 아프고 남자는 머리- 골치가 아픕니다. 아담은 혼자 산다는 외로움 외에는 걱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먹을 걸 걱정해요, 돈 벌어오는 일을 걱정해요,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나요?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사태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작명을 맡기셨어요. 이게 머리 쓰는 노동이지요! 노동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이 머리 쓰는 노동입니다. 머리가 아프니 골치가 아프고… 이게 아담의 고통일까요?
아담이 동물과 새들 이름을 짓느라 힘들 때 하나님께서는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보고 계십니다. 여차하면 도와주시려고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성숙됩니다. 독수리는 절벽에 집을 짓고 새끼들을 사정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늘왕자가 됩니다. 참새는 새끼들에게 먹을 것을 입에 넣어줍니다. 그러니 작은 일에도 화들짝 놀라는 참새로 밖에 못 삽니다.
야곱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한 사람이 된 것은 고통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붙잡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고통을 통해 더 지혜롭고 겸손하고 강해지는, 신앙의 노하우를 배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때마다 개입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 보시는 분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의 고통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아프면서 큰다!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기에 자식들의 고통에 그때마다 개입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 보시는 것입니다.
19절, 동물과 각종 새는 하나님께서 끌고 오셨어요.
나의 고통은 어디에서 왔고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나요? 원인이 있겠지요? 가슴 아픈 일은 사랑하는 이들이 끌어오는 고통이요, 골치 아픈 일은 주변의 누가 끌어옵니다. 어떤 고통은 야곱처럼 내가 끌어오는 고통들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누군가 끌고 왔지만 모든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게 끌어오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약한 자들은 강함을! 교만한 자들은 겸손을!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을 가슴으로 체험하라고… 그래서 성숙하라고… 하나님의 자녀다우라고… 하나님께서 고통을 끌어다 내게 안기신 거예요!
그러므로 고통이 닥쳤을 때 이 고통을 이끌어 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통을 주심은 골칫덩어리를 통해 성품을 더욱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고통의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나, 보고 계시며 언제라도 도울 자세가 되어 있다! 이걸 알 때에, 마음이 상할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십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이름을 만들어 내는 일! 굉장한 창조사역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첫 사람이며 930세까지 장수합니다(창 5:5). 아담은 장수하면서 생물들 이름을 하나하나 지었습니다. 호랑이처럼 생겨서 호랑이? 기린처럼 생겨서 기린… 마구 지었을까요? 아담은 머리를 짜내어 특성에 맞게 적절하게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담은 원시인이 아닙니다. 고등 지혜를 갖고 있는 영물입니다.
아담은 이왕이면 좋은 이름, 그 모양에 적합한 이름을 정했습니다. 처음부터 쥐새끼는 없었습니다. 쥐새끼는 사람이 지어놓은 나쁜 작명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기 이름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니 이름이 없던 것들이 자기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름이 없던 동물에게 호랑이라 이름을 붙여주니 늠름하게 호랑이처럼 살았습니다. 사슴이라 이름을 붙여주었더니 더 예쁘게 품위 있게 뛰었습니다. 모두 제 이름값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20절)
좋은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좋지 않는 이름을 지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마음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다시 이름을 지었을 거예요. 부르기도 좋고 듣는 동물도 기분이 좋고… 그러면 아담도 좋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이름들… 그 좋은 이름을 만들어 가는 아담의 창조능력은 갈수록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그만큼 이름을 만들 때마다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모든 상황의 이름을 만들라!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도록 좋은 이름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이름을 잘 붙인 자이며 실패한 자들은 실력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이름을 잘못 붙여서 망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가나안을 정탐한 12명 정탐꾼! 실력이 있는 쟁쟁한 차세대 리더들입니다. 그러나 차세대 리더는 2명으로 끝났고 10명은 헌세대 리더로 망했습니다. 성공자 2명은 이름을 잘 붙였고 실패자 10명은 이름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보며 10명의 리더는 저들은 거인이다! 우리는 메뚜기다!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나안은 메뚜기가 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기에 메뚜기라 이름을 붙인 10명과 그 이름을 믿는 백성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상의 이름, 상황의 이름을 잘못 붙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꿈을 접은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가나안 거인들, 너그들은 밥이다, 작명했습니다. 가나안은 밥이라 이름을 만든 사람들에게 정복당했고 그들이 건설해 놓은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밥이 됩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 사울 군대에게는 대장부였지만 다윗에게는 대장군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블레셋 사람’(삼상 17:32)에 불과했고 빗나갈 수 없는 표적에 불과했습니다. 원수를 천하무적이라 이름을 붙여버린 사울에게는 천하무적에게 패배했고 블레셋 사람이라 명명했던 다윗에게는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요!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만드나,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나?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고난이라 써놓으면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은총이라 작명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은총이라 내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다, 깨달았다 합니다.
세상이 장애물이 생겨 “문제가 생겼다” 쓰면 그리스도인은 문제라는 말을 기도제목으로 명하고 기도제목이 생겼다! 라고 외칩니다.
세상이 자살! 하면 우리는 그걸 거꾸로 돌려 살자! 라 작명하고 세상이 위기라면 우리는 기회라 작명합니다. 남들이 영어로 NO! 노우! 할 때 우리는 뒤집어 ON!이라 작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이름을 어떻게 짓나? 그 상황을 무엇이라 명명하나? 그걸 보시려고! 그걸 들으시려고 지금 내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런 상황을 이끌고 오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름으로 작명하기를 기대하시기에 지금 무엇이라 이름을 짓나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사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도 계속됩니다. 아담은 아내 이름을 여자라 명했습니다. 여자는 ‘남자’라는 이름과 같은 것입니다. 짐승과는 달리 인격을 가진 존재-너는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이름을 준 것입니다. 아내는 고양이나 여우가 아닙니다. 나와 같은 인격의 사람입니다. 얼마나 영특한 작명입니까?
지금까지 지상에 사람은 아담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또 하나의 사람이 생겼습니다. 동물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너는 사람이다! 작명할 때 그것은 내 반쪽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와가 반쪽이라고 명명할 때 아담의 마음에 사랑의 시어(詩語)가 쏟아집니다.
23절, “…이는 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건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아플 때 나도 아프고 네가 울 땐 나도 운다는, 우리는 한 몸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해 이렇게 멋지게 작명한 시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어떻게 짓나 보시는 하나님께서 하와의 이름을 너는 사람이다, 라고 작명하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그러나 인간은 이름을 붙이는데 완벽할 수 없습니다. 너는 여자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의 반쪽이다! 이름을 붙였지만 3장에 가서 이름을 잘못 붙입니다.
12절,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여기 ‘여자’는 더 이상 사랑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여자는 ‘웬수’입니다. 이 웬수가… 그렇게 이름을 작명하니, 그때부터 부부는 평생웬수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잘 붙여야 합니다. 우리 목사는 누구입니까? 아내는, 남편은 누구입니까? 그 이름대로 살아갑니다. 좋은 목사라 이름을 붙이면 좋은 목사가 되고 남편-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략)
시인은,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나에게도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도 너에게 꽃이 되고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셔서 어떻게 이름을 짓나, 무엇이라 부르나,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힘들 때 어디에 계시냐고요? 아니에요! 내가 힘들 때 지금 여기에 계셔요.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 그걸 보시기 위해 여기에 지금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애물단지라 지으면 그는 내게로 다가와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내가 보물단지라 지으면 보물단지 노릇을 합니다. 쓸데없는 들꽃이다, 하면 들꽃이지만 너는 내게 꽃이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의 꽃이다! 하면 꽃이 됩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내가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 무엇으로 부르는가? 작명에 있고 해석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좋은 이름을 붙여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쪽으로 명명하는 영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내 생애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삽시다. 쥐새끼, 그 새끼는 그리스도인이 지을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이름을 짓나 그걸 보시려고 지금도 내 곁에 계십니다. 이름들을 잘 지어주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늘빛가족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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