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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명절] 생산성이 높아야 좋은 예배다(요한복음 4:19~2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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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이 높아야 좋은 예배다

요한복음 4장 19~26절

서론

내일은 명절입니다. 명절이라면 설레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추석은 딱 네 글자입니다. ! ! ! ! 주부들의 추석 스트레스가 발표되었는데 1위가 경제적인 부담, ''입니다. 100명 중 40여 명 정도가 제사상에 올릴 제수 비용·추석 선물 준비 등으로 경제적 부담 1등 스트레스로 꼽았고, 2위는 명절 음식 준비(25%)였습니다.

 

명절(名節),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는 축제입니다. 축제라면 네 글자 페! ! ! ! 외국 명절은 페스티벌이 되는데 왜 한국의 명절은 앞 끝도 스트레스, 뒤끝도 스트레스! 왕 스트레스입니까? 스트레스의 주범이 조상제사와 제사음식 문제입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종교마다 형식이 다르고 내용이 다른 것처럼 예배 결과도 다릅니다. 제사예배는 뒤끝이 소비적 스트레스입니다. 가족 간 갈등이 생깁니다. 에너지를 소비시켜 버리는 것이지요. 천주교미사는 드릴 때는 엄숙하고 경건한 것 같은데 끝이 밋밋합니다. 말씀이 없고 의식 중심이라 일어서라 앉으라, 그러다 말기에 에너지를 일으키지 못해요!

 

기독교 예배는 생산적입니다. 0권사님이 그러는데, 서울대학교 성악과 출신이 유학 갔다 예배에서 은혜 받고 목회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어쩌다 있으면 감정이겠지만 수도 없어요! 이처럼 예배에는 생애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있고 생산성이 있습니다.

 

좋은 제사 좋은 예배는 음식을 많이 차리고 지극정성 드린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영향력-생산성이 높아야 합니다. 어제 예배도 무덤덤, 오늘 예배도 무덤덤하면 조상제사와 뭐가 다르겠어요? 우리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 능력을 받고 사람이 점점 좋아지는 생산성을 일으키려면 누구에게 제사 드리는가, 제사대상이 생산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조상들에게 제사 드리고 천주교가 마리아나 성인을 중보로 미사 드리니 냉담신자가 될 수밖에요!

 

우리 명절의 제사상의 대상은 조상, 죽은 조상입니다. 죽은 것에는 생명이 없고 기운이 없고 생산성이 없습니다. 움직여야 생산성이 나오는데 죽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죽은 조상을 대상으로 제사할수록 음울한 기운이 나옵니다. 과거지향입니다. 공연히 조상님 드신다고 음식 만들면서 힘을 빼고 명절의 참 뜻 즐거움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소비적이지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생산성이 높은 예배제사법을 예수님께서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이시며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100% 정확한 제사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사, 예배를 드리되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어떻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요? “이렇게  이렇게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로 번역합니다. 이 번역이 익숙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상에 음식 잔득 차려놓고 제사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하라 하신 주님 말씀에 위배됩니다. 우리는 효도에도 주안에서 효도하는 것처럼 제사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도를 좇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법도는 진정과 신령의 예배입니다.

1. 사마리아 제사는 진정이 부족했기에 생산성이 없습니다.

지금 본문 현장이 사마리아고 등장인물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는 혼혈민족입니다. 땅은 이스라엘이지만 앗수르 이방인들과 섞여 혼혈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튀기 민족이라고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혈통의 섞임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외면하고 그들의 지역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성전입니다.

 

마을 가운데로 고속도로가 생기면 한 마을이 완전히 다른 마을이 되는 것처럼, 성전이 두 군데로 나뉘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전혀 다른 민족처럼 행세했고 질시와 반목과 대립을 일삼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건방진 놈들!” 이라 몰아붙였고, 유대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을 이단자!”라 경멸했습니다. 서로 엄숙하게 또는 열정적으로 예배하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서로 대립한 것이지요! 예루살렘도 그리심산의 예배자들도 생산성이 없는 공연한 제사, 공연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을 대표하는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를 대표하는 여인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 남자에게 이런 종교적 갈등을 비아냥거린 것이지요!

 

20, 우리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 어느 게 진짜 예배냐 내가 보기에는 선지자 같으신 당신이 판단해 보라 는 주문이지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받아 21, 이곳도 말고 저곳에서도 말라, 라는 말씀으로 참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 경배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해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예배는 진정의 예배, 바른 예배, 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떤 형식으로 제사하라 하셨나? 이런 사항들을 바로 알고 바른 대상을 향해 제사 드리는 것이 진리의 예배-진정한 제사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제사는 이런 진정, 진리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뜨거움이 있었지만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통이 없었기에 이단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예배, 우상숭배였고 미음과 증오라는 파괴성-소비적이면서 낭비적인 제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유대인 제사는 신령()이 부족했기에 생산성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예배했습니다. 제사장을 세우고 희생제물을 바치며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예배 방식을 좇아서 반듯하게 예배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정통입니다. 예배가 장엄했고 경건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형식에만 집착하다보니 마음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감격과 감동이 없었습니다. 열광적인 찬양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예배는 세월이 흐를수록 형식화 되고 영적예배가 아니라 인본주의적 제사로 굳어갔습니다. 당연히 영적 흥분이 없었습니다. 이런 예배는 근사하게, 조금의 하자(瑕疵) 없이 경건하게 반듯하게 드렸지만 마음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없습니다. 예배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렸고 종교적 절차로 끝났기에 예배 이후의 생산성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사랑을 공급받고 용서를 배우고 더욱 낮아지는 섬김의 도가 나타나야 하는데 오히려 예배는 그들의 주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총대같이 곧은 교리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죄인, 선인으로 구분하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예배의 치명적 결함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예배에서 나타나는 비() 예배적 요소, 비은혜적 요소들입니다. 교인들이 왜 그렇게 은혜가 없으며 인정머리가 없고 공격적이고 비난적입니까? 예루살렘예배의 영향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통적인 예배의 회복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신령한 예배-역동적인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형식으로 차 있는 예배에는 영으로 드리는 생명력 있는 밝은 예배를, 열광적인 예배에는 신학적인 전통을 원하신 것입니다.

3. 진리와 영의 병존예배만이 생산성이 높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진리가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그리심산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습니다. 불완전한 예배의 두 극단입니다. 한편에는 그리심산 예배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예배, 황폐하고 생기 없는 정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모든 정확한 자료들을 소유했으나 뜨거움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뜨거운 열정, 광적 열광을 가졌으나 신학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양쪽 모두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 반쪽예배, 하자예배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두 예배는 자기가 진짜라고! 자기들처럼 예배드리라고! 우겨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판정내리셨습니다.

 

21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말씀은 예배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참 의미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 조화를 이루는 예배,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영이신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적인 예배,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열정예배, 그런 예배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두 스타일의 예배가 병존합니다. 전통적 장로교예배와 순복음 스타일의 뜨거운 예배입니다. 장로교예배는 진리는 있지만 신령이 부족합니다. 장로교의 엄숙한 예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드려집니다. 심지어 11시에 시작하고 정확히 12시에, 혹은 정해놓은 시간에 1분도 지나지 않고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끝냅니다. 그런 예배에 익숙한 사람들은 시간의 정확성을 예배의 우수성으로 거론합니다. 오순절 계통의 예배는 형식과 의식을 타파하고 신령하게 영으로 예배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손을 들고 찬양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 예배보다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더 많은 순서들로 꾸며놓습니다.   

 

두 스타일의 예배는 서로를 헐뜯고 정죄합니다. 은사 중심의 뜨거운 오순절예배는 형식과 말씀중심의 장로교예배를 식어버린 예배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하고 싱겁다고 합니다.

장로교 정통파 예배자들은 오순절예배를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무슨 박수를 치며 온몸으로 펄펄 뛰며 예배 드리냐, 그게 무슨 거룩한 예배냐, 굿거리지! 비판합니다.   

 

예배는 어느 한 쪽만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조화를 상실합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오순절계통의 예배는 훌륭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대상을 놓치고 내 흥()에 겨워 박수치고 알지도 못하는 방언을 해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성경말씀에 기초하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열심과 열망, 감동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반쪽짜리 예배입니다. 뜨거움이 없는 곳에 생명이 돋아날 수 없습니다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단순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예배자들을 잘 조정하는 조정 역할자입니다. 진정은 없고 신령만 있는 예배자에게는 진리에 바로 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진리는 있는데 신령이 없는 예배자에게는 열정으로 눈물로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영적 핼퍼가 목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결과는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헌신으로 생산성이 나타나야 합니다. 새 힘이라는 생산성을 얻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예배 이후의 생산성이 나타납니다. 생산성은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 나타나고 주일이 아니라 주간에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예배는 아무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훈련된 사람들이 드려야 좋은 예배가 됩니다. 훈련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훈련된 예배가 생산성이 높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주 창조를 논하는 데는 창세기 1, 31절로 짧게 끝났습니다. 예배하는 성막에 대한 묘사는 무려 7,  243절이 할애되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예배하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20세가 되면 군인으로 국가에 봉사합니다(1:3). 레위인은 25세가 되면 성막을 돌볼 수 있습니다( 8:24). 제사장이 되려면 30세가 되어야만 합니다( 4:3).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배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예배는 대단히 중대한 책임이기에 고도의 영적 성숙을 요구했습니다. 가장 높은 표준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이끄는 제사장에게 적용되었습니다예배는 천지 창조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에 대한 연구와 예배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지만 받으시는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면 예배 뒤끝이 파괴적이 됩니다. 남을 비난하고 미워하고 많이 아는 것 때문에 교만해져서 남을 정죄합니다. 비은혜의 예루살렘 교인이 되고 자기감정으로만 방방 뜨고 끝나는 무례한 사마리아교인이 되고 맙니다. 예배를 모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예배의 역기능입니다.

 

제대로 예배하는 예배자에게는 예배를 통해 분노와 상처와 이기심들을 극복합니다. 용서와 이해와 관용으로 사람이 달라지고 파괴적이고 소비적이던 사람들이 생산성으로 돌아서고 선한 열매로 세상을 섬기게 되며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갑니다. 좋은 영향력을 보입니다. 예배의 순기능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배입니다. 이걸 만들어 내지 못하면 조상제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산성이 없는 예배는 공연한 예배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4장은 초미니 예배입니다. 목사와 성도 한 명만이 참석한 개척교회 예배입니다. 목사 입장이 되는 설교자 예수님, 성도가 되는 사마리어 여인 한 명입니다. 그 여인은 일종의 화류계 여인입니다. 가장 비종교적이고 비은혜적인 예배참석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배를 통해 놀랍게 변했습니다.

 

-지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당신-유대인 남자-랍비-선지자 구세주가 됩니다.

 

-감정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공격적이던 여인이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환호합니다.

 

-의지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자 트라우마, 인간관계 트라우마를 벗지 못했던 여인이 사람들 만나러 달려갑니다.

 

인격의 전 요소인 지--의의 변화입니다.

예배가 주는 생산성이요 예배가 주는 감격입니다. 기독교예배에 이런 감격이 있기에 예배를 드리다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겠다, 헌신하고 선교사로 나가고 내 아들을 살해한 이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하고 예배당을 짓고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뒤끝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페스티벌이 되는 것입니다

 

늘빛가족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좋은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더 열심히 제사를 드려서 많은 은혜들을 누리며 신령한 것들과 함께 능력을 공급받으며 이 땅에서 영향력과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 내면서 땅에서 하늘을 사는 하늘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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