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힘이 있다!
시편 90편 10~17절
서론
10절, 모세는 인생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했습니다. 그랬는데 정작 본인은 120년을 살았습니다. 남들은 80되면 가라 해 놓고 자기는 120세를 살았으니 고약한 심뽀처럼 보이지 않나요? 모세가 인생 나이를 80이라 한 것은, 80이 넘으면 먹는 맛, 보는 맛, 사는 맛은 없어지고 전적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인생이 아니겠냐는 의미로 들립니다.
조물주께서 사람, 소, 개, 원숭이에게 공평하게 30년씩 수명을 주었습니다. 30년이 지났을 때 조물주는 모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는 게 어떠냐?”
사람은 인생이 너무 짧아요!, 동물들은 너무 길어요! 소는 일하는 게 너무 힘들고 개는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며 마당을 지키는 일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했습니다. 원숭이는 나무를 옮겨 다녀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조물주께서는 동물들에게서 각각 20년씩 모두 60년을 빼내 사람에게 얹어주었습니다. 사람은 기존의 30년에 60년을 덤으로 받았습니다.
인생 수명 90년! 대단한 행운이지요! 그러나 사람답게 사는 것은 30년에 불과할 뿐 30세에서 50세까지는 소처럼 일하고, 50세에서 70세까지는 개처럼 자식 보호, 아내 지키는데 보내고 70세에서 90세까지는 원숭이처럼 이 자녀 저 자녀 집 찾아 헤매고 양로원 그늘로 찾아들다 90년의 인생을 마무리 짓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인간의 생애가 어떠함을 교훈하는… 조금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인생을 80년으로 보았는데… 문제는,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사는 게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도, 30년-40년 정도 행복했고 소, 개, 원숭이에게 주었던 20년의 생애-60년을 받았는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수(長壽)의 자랑은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인생살이 고생만 죽도록 했으니 오래 산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모세,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모세의 능력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만 못해보았지 엄청난 이적과 기적을 행했던 초능력자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뜻밖에도 인생살이가 수고와 슬픔뿐이었다…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영광스런 생애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와 백성들이 눈이 부셔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나, 자문하게 됩니다. 모세는 40년도 안 되게 믿어 얼굴에서 광채가 났는데, 나는 55년째 믿는데도 광채는커녕 피부가 더 검어지고 속은 새카맣게 타고 있으니… 하기야 나도 구름기둥 불기둥 보며 40년을 살고 고단백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 그만큼 빛이 납니다! 동의하세요!
모세가 얼굴에 광채는 났지만 속은 어떻다고 합니까? 속은 너무 타서 까맣게 되었고 일생은 수고와 슬픔뿐이었다! 깜짝 놀랄 고백 아닙니까? 삶의 상처! 세월이 주는 상처입니다. 그가 행복했던 것은 애굽에서 왕자생활 40년뿐, 살인자 되어 망명하여 이름 없이 살았던 목자의 40년, 광야지도자로 살았던 또 40년… 영광보다는 수고와 슬픔, 상처투성이라는 겁니다.
얼른 보면 모세가 갑(甲), 백성들이 을(乙)로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호령하고 명령하고 백성들은 고분고분 순종했지만… 그것도 사실이나 모세가 을(乙)일 때가 많았고 갑과 같은 을(乙)의 불평과 원망에 모세의 80년 세월은 수고와 슬픔뿐이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5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괴로움 당한 날! 화를 당한 날들! 겉으로는 화려한 지도자였지만 거절당하고 백성들에게서 너무 실망하고 250여명 두령들이 떼로 거역하고 누나와 형도 불평하고 공격했습니다. 세월이 주는 상처, 광야가 주는 고난… 이로 인한 수고와 슬픔… 속이 까맣게 타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는 갑이고, 갑이기에 지도자들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이기에 상처는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강남의 어느 교회는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대형교회 목사이기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우리 같은 목사들과는 다르게 상처도 크지요. 큰 교회 목사는 상처도 더 크고, 크게 사업하는 분들 상처도 더 클 수밖에 없지요.
온갖 상처로 고민하고 아파하던 독수리가 낭떠러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뇌에 빠졌습니다. 여태껏 입은 상처 때문에 더 이상은 높이 날 수 없다는 시름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이 스스로 목숨을 끓겠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대장독수리가 재빠르게 날아왔습니다.
“왜 갑자기 어리석은 일을 하려느냐?”
“늘 상처만 받고 살아왔어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상처가 크더냐?” “네, 큽니다!”
“나만큼 크더냐?”
대장 독수리가 자신의 날개를 쫘악~ 펼쳤습니다.
“내 몸을 봐라! 대장 독수리다만 나 또한 많은 상처를 입고 살았지. 여기는 사람들의 총에 맞은 상처, 여기는 다른 독수리들에게 습격 받은 상처, 여기는 나뭇가지에 찢긴 상처다.”
젊은 독수리는 무수한 상처에 놀라 고개를 숙였습니다. 대장 독수리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내 몸에 새겨진 상처일 뿐이다. 마음에는 더 많은 상처자국들이 있다! 그 상처 자국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 상처 없는 독수리란 태어나지 않는 독수리일 뿐이야! 창공에서 살아야 하는 독수리는 상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느니라!”
여러분 어때요? 내 상처를 보고 싶은가요? 여러분의 상처도 보여주세요! 사람은 나이만큼 상처가 크고 길고 아픈 것이 아닌가요? 도종환 시인은 인생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에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대장 독수리. 남들 보기에는 늠름하고 흠모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큰독수리였기에 상처도 컸습니다. 모세. 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모세의 80년 세월은 곤고하고 화를 당하고… 고통과 시름과 고민과 아픔의 세월이었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대장독수리도 모세도 상처 때문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지도자 생애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고 부상병이 되었지만 상처를 간직한 채 숨긴 채 살았고 일어났습니다.
상처로 황폐하고 백성들에 대해 정나미니가 떨어지고 형식적 지도자로 끝날 것 같은데 성경은 뜻밖에도,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고 합니다. 어떻게 상처가 애증과 갈등, 원한이 아니라 온유함이 되었나요? 비결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합니다. 그러기에 상처가 되는 상황! 상처 받고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생애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절,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9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 곧 끝난다! 인생의 영광도 잠깐이라면 인생의 수고와 슬픔도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10절,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든 것이 곧 끝난다! 그러기에 모세는 곧 끝나게 될 영광에 유혹되지 않았고, 곧 끝날 슬픔과 고통에 빠져들지도 않았습니다. 인생은 유한하며 모든 것은 곧 끝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40년 죽도록 일하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토사구팽 대접을 받았지만 가나안도 곧 지나간다는 인간의 유한함을 생각하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성당에는 아름다운 세 개의 아치문이 있습니다. 한 문에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장미가 조각되었고 밑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기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은 잠시뿐이다!”
다른 문에는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고 “우리를 고생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도 잠깐이다” 적혀 있습니다. 세 번째 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이 중요하다.”
다 끝난다! 이것이 상처를 증오로 만들어 내지 않는 비결입니다.
㈂ 하나님의 보상. 하나님께서 모든 상처에 충분히 보상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모세에게 광야 40년은 상처의 세월입니다. 대놓고 원망할 때 모세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믿었던 사람들일수록 모세의 가슴에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모세는 나만 상처를 받았다고… 나만 인생 80이 수고와 슬픔 뿐이었다고… 나만 위로 받고 내 상처만 치료해달라고… 나만 힐링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상처를 받았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했던 사람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수천 명씩, 수만 명도 죽었습니다. 고라족장을 비롯, 그에게 동조했던 250명 족장들이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졸지에 자녀들은 고아가 되고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죽음의 자랑스런 유족이 아니라 천벌을 받은 수치스러운 가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상처! 대대로 대물림되는 상처입니까?
모세는 내 상처만 아니라 온백성의 상처를 생각합니다. 나도 상처 받았지만 남들도 내게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상처가 있고 그들 상처가 치료 받을 때 내 상처가 치료 받고 힐링이 되기에 모두의 상처를 회복시켜 달라 기도합니다. 그만큼 상처를 위한 힐링기도를 통해 모세는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온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도 누구보다도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이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급으로 생각한 것은 장차 받을 영광이 컸기 떄문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것이 바로 상처가 주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 날, 인생이 70이며 강건하면 80이라는 날 중에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점검하라는 거예요! 인생이 지금 시작인가, 끝인가? 전반전인가 후반전인가… 후반전이라면 후반전 20분인가? 종료 5분전인가, 아니면 로스타임에서 살고 있는가? 그걸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축구경기에서 내가 어느 시간대에 있는가를 알아야 거기에 맞게 경기를 진행합니다. 시작하자마자 천방지축으로 뛰면 안 되지요! 운동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대방을 파악해야지요! 전반전에 너무 수비 중심이 되면 안 되지요!
후반전에는 내가 이기는가, 지는가를 알아야지요! 한 골로 이기고 있는가, 두 골 세골로 넉넉히 승기를 잡고 있는가, 알아야지요! 그러면 수비형 축구를 해야지요! 지고 있다면 공격형 축구를 해야지요! 여러 골 차로 지고 있다면 이길 생각보다는 멋지고 페어플레이 축구를 해야지요! 이것이 축구시간을 계수하는 지혜요 요령입니다.
모세가 이런 기도를 한 것은 그의 나이 언제였을까요? 아무래도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기의 생애가 인생의 후반전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했던 기도일 거예요! 지금은 상처를 받지 않게 해 달라 기도할 시간이 아니라 내가 상처 준 이들에게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무리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힐링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목동이 양을 몰고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모퉁이에서 양들이 상처 입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들이 모퉁이 가시나무에 걸려 상처가 나고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목동이 도끼를 들고 양들에게 상처 입히는 가시나무를 자르려는데 차마 도끼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시나무에 걸려있는 양털을 새들이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하~ 양들이 상처를 입음으로 새들이 그 부드러운 털로 둥지를 트는구나!”
상처는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상처를 받았다 할 때 나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또 나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상처만 아프다 하지 말고 남들도 그 상처가 아프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항상 남들을 좋게 해주려다 보면 내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더 받습니다. 교회를 더 많이 위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더 많이 받습니다. 그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내 상처로 인해 누군가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누가 덕을 보는 구나, 그걸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는 상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너무 힘들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상처가 교회의 힘이 됩니다! 상처를 받은 것만큼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보상해 주시고 상처들을 통해 힐링을 배워가는 교회 훈련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늘빛교회 30년! 내 말이 누군가에게 가시가 되었고 누구의 말이 내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 견디었더니 상처에 붙은 양털로 누군가는 집을 짓고 누군가는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내가 힘들게 헌신하고 청소하고 찬양대, 교사들… 당회원으로… 구역장으로 섬기고 식사 봉사했기에 그 수고와 슬픔의 상처의 양털로 이렇게 좋은 예배당에서 예배하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누리게 된 것입니다. 상처를 두려워했다면 누가 남아있었겠어요?
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상처 없이 섬길 수 있는 교회봉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상처에 너무 올인하지 말고 지금 내 인생이 어디에 와 있는가, 계수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성숙하고 그만큼 우리 인생에서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용기와 덕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상처에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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