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교회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도행전 19장 1~7절
서론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교주의 가르침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교주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친 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내세에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다… 주장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교주의 인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님의 인격을 더 중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에 앞서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예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시면서 완벽한 사람이시다…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세상종교는 가르침을 따르고, 기독교는 인격을 받아들이고… 이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살아계신 인격적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만 따르고 있다면 종교적 기독교인으로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모든 종교는 나와 교주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석가모니를 믿고… 공자님을 따르고… 알라신을 믿고… 일대일로 그러면 됩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에 성령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이건 비논리적 비이성적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종교심으로는 이걸 수용할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십자가 보혈로 내 죄가 정결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지금 내 마음에 영으로, 인격적으로 내재하신다… 이런 사실은 지성이나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믿음에는 성령의 역사가 개입해야 합니다.
본문은 ‘에베소의 오순절’입니다.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 전하던 바울이 에베소성(城)에 들렸습니다. 에베소성은 항구도시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아시아의 보고(寶庫)’로 불릴 만큼 번창하였습니다. 각종 미신들과 이방 종교들과 사회적 병폐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인들은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점점 잃어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전부터 섬겨오던 아데미 여신을 더욱 더 열심히 섬겼는데 이 여신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 하나였을 만큼 굉장한 신전입니다.
1절,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를 만났습니다. 성경교사 아볼로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로 추측합니다. 아볼로는 학식이 있고 언변이 능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교훈에 대해 잘 가르쳤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니 성경지식도 잘 알고 말씀도 지키려고 애는 쓰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묻습니다.
2절,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그들의 대답이… 성령이 무엇이냐? 성령이 있음도 몰랐다! 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에 바울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진정 믿는 자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와보니 십자가 숭배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서학종교 상징물 십자가를 들고 와서 성경도 모르고 성경적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과 보혈도 모르고 이것만 믿으면 구원 얻는 것처럼, 부적처럼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믿음들이 한국교회에도 있습니다.
3절, 바울이 물었습니다.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이 세례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세례만 받으면 구원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경적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6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의 오순절입니다.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종교적 기독교인이었지만 비로소 거듭난 그리스도인,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제대로 된 기독교가 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한국교회에서 거의 지켜지지 않습니다. 사실은 성탄절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직도 죄의 속박에서 살고 있으며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가 해결되고 천국 소망이 생겼습니다. 성자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기에 성탄이라고 합니다. 성령강림절은 성령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지 않고 영으로 오셨기에 강림이라고 하며 강림절이라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내가 어떤 종교인인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분류합니다.
1.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구경꾼 교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그냥 교회에 출입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종교적 하나님, 즉 조물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그야말로 하느님, 하늘님 개념의 신앙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존경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4대 성인 중 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며 살기보다는 좋은 가르침을 주신 종교가, 스승으로 섬기며 삽니다. 인격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슈바이처 같은 경우입니다. 슈바이처는 음악박사 의학박사 심지어는 신학박사입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존경했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아프리카 토인들의 건강과 행복, 삶의 질(質)을 생각했습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육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는 분으로 알고 끝난 것입니다. 신학박사도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알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으니까 영적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 고백할 수 없고 주님을 구세주로 세상에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역사 속의 예수님으로만 지적으로만 믿고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역사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구경꾼 기독교인입니다.
2.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종교적 기독교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세례를 받고 회개도 하고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을 영적으로 어린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밥을 먹지 않고 젖을 먹습니다. 젖병을 빨고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초보입니다. 기복주의 신앙, 병을 고치고, 낮은 은사에 연연하고… 은사운동에 쉽게 빠져버리고…
3절,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지금 한국교회에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종교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인격적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예수님과의 만남에 감동이 없습니다. 회개는 했습니다. 그래서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가짜로 받은 것은 아닙니다. 진짜로 받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았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강렬하게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이 믿음이 많아지면 상당히 종교적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종교적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은혜가 없습니다. 본인도 종교가 너무 무겁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쁨도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3.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즉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2:15)
신령한 자는 성령을 받은 체험이 강력하고 성령의 주도적 힘에 끌려서 삽니다. 내 아집이나 주장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120명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새술에 취했다! 고 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도권을 빼앗깁니다. 내 안에 있는 본능이 나를 주장하고 이끌고 다닙니다. 술에 취하면 담대해 집니다. 괜히 즐겁습니다. 아픈 것도 견디고 힘든 것도 견딥니다. 이런 옛술은 잠시적으로는 취해서 좋지만 우리를 파괴합니다.
성령강림 시에 성령을 받고 충만히 받은 제자들을 보니 꼭 술에 취한 것 같은데 모양새가 다릅니다. 거룩하게 취하고 맨 정신으로 취한 것입니다. 그러니 와! 이건 새술이다! 새로운 술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쁘게 취하는 술이 지금까지의 술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술에 취한 사람은 취해도 곱게 취하고 좋게 취하고 거룩함에 취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주님의 마음과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으로 꽉 채워진 마음입니다.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로 핍박 받을 때 최권능 목사님, 때리니까 계속 예수! 예수! 하더라는 것입니다. 조용해라… 했더니 최권능 목사님 왈, 내 안에는 예수님으로 꽉 차 있다! 건드리면 계속 나온다… 해서 순사도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건드릴수록 내가 나옵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본성들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거듭남을 체험할 때 한 번 들어오면 세상 끝날 때까지 떠나가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령님과의 차이점입니다. 구약에도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령은 떠나갑니다. 사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성신이 떠나갔습니다. 인격에 내재했던 성령님이 아니라 사역을 도와주시기 위해 임했던 사역의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직분을 감당하지 못할 때 성령님은 떠나갑니다.
신약의 성령님은 다릅니다. 신약의 성령님은 은사 이전에 인격에 임합니다. 그러기에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합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성령이 충만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이 성령의 량이 나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발목을… 무릎을… 허리를…헤엄칠 물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전폭적인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항상 성령을 주입해야 합니다. 매일 성령을 주입합니다. 그래야 오래 될수록 더 좋은 교회, 오래 믿을수록 더 좋은 교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주입하지 못하고 계속 믿음으로만 나가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내 경험과 지식으로만 충만해지면 유교적 교인이 됩니다. 서로가 힘들게 됩니다!
결론
훗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이렇게 칭찬합니다(2장).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절)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절)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교회가 되었습니까? 7절, 이 날 성령을 받고 충만한 사람이 12명입니다. 그들은 열두 남자라고 나옵니다. 남자들이 성령 충만 받으니까 가족마다 성령 충만해지고 숫자와 상관없이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매일 성령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교회에서, 한 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공급이 딸리니까 첫 사랑을 버린 교회로 책망을 받습니다.
미국에서 성령 충만하기로 자타가 인정하는 무디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성령의 충만을 입으셨지요?”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충만하시겠군요.”
“아닙니다, 자꾸 새어나갑니다! 그래서 매일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동차가 기름을 계속 공급받아야 하듯 성령 충만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중형자동차는 소형보다 더 많이 주유(注油)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래 믿을수록, 교회 직분이 중요할수록 더 자주 더 많이 성령 충만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교회 중직은 그만큼 성령이 새는 기회도 많습니다. 교회 일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기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이 성령충만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 늘빛교회가 성령에 충만한 교회, 성령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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