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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믿음의 본질(마태복음 5:43~4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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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

마태복음 5장 43~48절

서론

제자반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성품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품학교는 일종의 제자반 보습교육입니다. 제자반의 모든 수료생에게는 기수별로 차근차근 하려고 합니다. 협조해 주세요! 처음에 성품학교를 한다니, 거부반응들이 느껴져요. 이 나이에 성품이 바뀌냐?

 

그래요,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반도 50세 이상은 말라고 해요! 50세 이상은 듣기는 하지만 생활의 변화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거예요! 50년생 굽은 나무를 반듯하게 펼 수 없듯 사람도 그래요, 성품은 뼈대거든요. 뼈대가 굽어진 사람에게 이제 와서 성품클리닉으로 뼈대를 펴려면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걸 왜 해? 그런 반응이…, 이해됩니다.

 

성품은 혈액형 같아요. 타고 난 혈액형을 변경할 수 없듯 부모로부터 받은 성품도 평생 뼈대입니다. 이걸 고친다고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석 달 정도하는 성품학교를 통해 성품이 바뀐다면 제가 떼돈을 벌었어요. 자기 성질 바꾸고 싶은 분들 얼마나 많습니까? 남편 보고 저 성질머리 죽어야해… 이런 분들 많아요.

 

요즘 엄마들 자녀들을 4등급으로 나눈답니다. 1등급-공부 잘 하는 놈, 2등급-성격 좋은 놈, 3등급-건강한 놈, 4등급-지 애비 닮은 놈… 남편의 성품을 싫어한다는 거예요! 남편만 아니라 자녀들 성품에 대해 만족하는 부모들은 얼마나 되겠어요? 어떤 이들에게는 성품이 평생 애물단지에요! 석 달 속성과정으로 살을 확~ 빼주듯, 3개월 만에 내 싫은 성품을 확! 바꿔준다면 성품클리닉 떼돈 벌 것입니다.

 

성품학교는 성품이라는 엔진교체가 아니라 성품을 운전하는 운전스타일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차는 종류에 따라 성능과 기능이 달라요. 자동차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엔진을 교체하면 그게 어찌 소나타가 되고 에쿠스가 되겠어요? 소형차든지 중형차든지 기능과 성능을 제대로 알아야 좋은 운전자가 되고 즐거운 운행이 됩니다. 그러니 자동차만 탓하지 말고 내 운전습관과 차에 대한 성능을 잘 아는 운전수가 정작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성품학교에요!

 

베드로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고 말합니다(벧후 1:4). 하나님을 믿은 베드로, 성품이 엄청 변했어요! 천방지축이던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은 이후에는 조신한 자가 되고 지적 성장을 해요. 베드로전후서는 신학이 깊고 문장이 유려해요. 아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내면이 얼마나 감성적인지 몰라요! 

 

성령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지적으로 역사하지만 믿음생활을 할수록 성품에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성품에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했다고 팔팔 뛰어도 성품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성질이 강하게 거칠게 나오면 자기 충만이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격이 살아있으면 성화성장도 멈춰요! 그러니 신앙생활 10년 후부터는 성장되지 못하고 그 모양으로 공회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요한복음 1:12, 예수,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예요. 하나님의 자녀는 제 아버지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조금씩 닮아가며 향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온전’은‘완전’과 같지만 조금 달라요. 완전은 완벽함! 온전은 완벽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어떤 성품에서, 나를 닮아라, 온전하라 하실까요? 권능, 능력, 지혜, 주권… 그래서 우리가 늘 두려워하고 벌을 받을까봐 벌벌 떨며 사는 것을 원하실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으신 것은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어느 정도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 같이 한 즉이, 무엇입니까?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세상은 항상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받아온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은 경쟁체제입니다. 섬김이나 돌봄, 상생하는 교육은 받지를 못했습니다. 저 사람이 떨어져야 내가 합격합니다. 모두가 경쟁자들입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공격합니다.

 

요즘 세상을 보세요. 긍휼과 자비가 없어요. 운전하다보면 왜 그렇게 공격적이고 살기(殺氣)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면, 이 새끼 저 새끼… 들이에요. 그 새끼 왜 그러냐, 그 새끼 나이가 몇이냐? 그 새끼 지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냐? 서로 간에 조금의 인내도 사랑도 없어요. 그러다가도 정작 그 사람 앞에 가면 아무 소리도 못해요! 비굴해요!

 

이런 체제가 교회 안에도 들어옵니다. 교회 안에도 자비와 긍휼이 없어요! 조금의 이해도 여유도 아량도 없이 비난하고 공격해요! 은혜가 없는 비은혜의 교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은혜로운 신자보다 비은혜로운 신자의 비율이 교회마다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마음을 나누고 어려움을 내놓고 서로의 섬김을 통해 다듬어지고 점점 온전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꺼냈다가는 이야깃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식 속상한 이야기를 해놓았다고 합시다. 금방 옳고 그름으로 판단합니다.

 

“그거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기도하지 않더니 하나님께서 벌주신 거야…”

 

하나님에 대해 무조건 우리는 옳고 나쁘다… 그런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잘못된 하나님상(像)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고 설복당해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그 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섬기는 것입니다. 기계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45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옳다 그르다 그렇게 판단해서 옳으면 천국 보내고 틀리면 지옥 보내고… 옳으면 복을 주고 제대로 믿지 않으면 즉시로 징계하시는 그렇게 기계적인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주장하고 계심도 확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살면 혼낼 거야, 심판할 거야… 그렇게 협박하면서 우리를 기계적으로 믿음생활을 하게하고 경배하도록 만드시는 무정하고도 무자비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성격 때문에, 죄성 때문에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고 그 뜻대로 살지 못해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며 인내하시며 설득하시며 감동시키셔서 결국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나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을 거대하게 지어놓고 할 일 다 했다, 자부하는 백성들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에게 온갖 정성을 들였으면 그 성전사랑이 이웃에게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정작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탄식합니다(7장).

 

이사야 선지자도 금식을 자랑하는 이스라엘을 비판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금식 했다고 자랑하지만 왜 했느냐, 그 금식이 내 마음을 알면서 하는 것이냐, 금식을 할수록 내 마음을 더 아느냐,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내 백성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58장).    

 

그때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웃들을 미워하고 약자들을 괴롭히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금식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들은 무엇을 탓하고 있습니까? 좋은 믿음이 남에게 혜택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웃에게 도움이 못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며 요란하게 제사하고 금식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사랑이 이웃들에게는 전달되지 못하는 종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뭐예요? 배워서 남주는 것처럼 믿어서 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하고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하시는 대표적 성품은 심판이나 권위가 아닌 자비와 긍휼입니다. 선인이나 악인들에게 비를 동일하게 내려주시는 그 긍휼하심, 오래참으심, 자비로우심, 억지가 아니고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를 감동시켜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예배하게 하시는 그 자비로우심…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노하셨지만 모세의 중보기도에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편 103:8절의, 이런 구절은 구약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에 기대야 한다고요?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으로 우리가 점점 녹아지고 감동 받고 항복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날마다 성숙하게 됩니다. 그게 44절의,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웃에 다한 아량이며 자비이며 긍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나와야 바로 우리들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여호와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타콤. 로마제국하의 무덤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신앙공동체 모임장소로 삼았습니다. 굴은 미로(迷路)입니다. 로마 군사들이 들어왔다가 횃불이 꺼집니다. 나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한 일 주일 정도 굶고 기진맥진해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지하땅굴에 익숙한 사람들이기에 힘이 빠질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군인들을 여러 날 정성으로 먹이고 힘을 얻게 하고 동굴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그리스도인이 된답니다. 로마제국 하의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실천했던 것이지요!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량과 긍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아버지를 본받아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마음입니다. 교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아량과 긍휼을 가져야 합니다. 죄인과 의인으로 갈라놓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갈라놓고 비판하며 판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박수와 존경과 칭찬을!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그래야 우리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삶에서는 물론 교회에서조차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고 전도하고 우리교회로 나오라 해놓고 어렵게 교회로 전도해 왔더니 교회 안에서 싸우고 서로 헐뜯고 지적하고 사랑으로 품지 못하면 그들이 교회 안에 머무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는 못해 와도 남들이 전도해 온 사람들, 우리가 품고 양육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부자의 덕목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덕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 형제들이 이웃들이 부자의 덕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덕을 받는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말고 그들이 어렵게 사는 것에 대해 동정하고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며 그들이 일어서도록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늘아버지처럼 온전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없는 이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있는 자들이 베풀어 줄 때 입을 다물고 그 혜택을 받아 누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위해 헌금하고 헌신할 때 고맙게 생각하며 그들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지가 돈 좀 있다고 재네? 지가 있으면 얼마나 있어? 이런 식으로 뒷담화를 하고 너그들 돈이 많아서 내가 억울하다고 악을 쓰면 아버지의 아들다운 온전한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결론

프랑스에서 성당에도 가고 여러 유적지도 둘러보았습니다. 걸인들이 요소요소에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쇼핑센터 앞에서도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것은 그들은 걸인인데도 불어를 씁니다. 먹는 것도 순 양식입니다.

어떤 생각이 듭니까? 불어가 아깝다! 우리가 그런 불어를 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1달러만 달라 손 내밀어 구걸하는데 유창한 영어를 쓰다니, 영어가 아까운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가 그런 상황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비와 긍휼은 다 어디로 가고 공격하며 비난하며 작은 것 하나도 넘어가지 못하고 싸운다면… 아하~ 우리의 믿음들이 아깝고 기도가 아까운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믿음의 본질로 더 나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 혜택을 교회가 받아야 합니다. 기도의 열심이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 혜택을 교회가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혜택을 교회가 받아야 합니다. 내 기도로 성경지식으로… 저 사람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판단의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긍휼과 자비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믿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해야 될 일이고 늘빛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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