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관점으로 볼까?
요한복음 9장 1~12절
서론
이지선씨 아시지요?‘사랑해 지선아’의 주인공 이지선씨가 SBS <힐링캠프>에 나와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다고 합니다. 이지선씨는 14년 전, 이화여대 재학 중에 오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 가해자에게 받치는 교통사고로 전신 55%의 3도 중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대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시련을 극복하고 현재 UCLA 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힐링캠프>에 닉 부이치치도 출연합니다. 호주 사람입니다. 닉은 태어날 때부터 양손, 양발이 없는 기형아입니다. 작은 발가락이 두 개 달린 기형의 왼발이 있을 뿐입니다. 그 왼발을 볼펜에 묶어 글 쓰고 컴퓨터하고⋯ 축구 수영 서핑을 즐기고⋯ 드럼을 칩니다. 30개국을 다니며 복음과 희망을 전합니다. 미소를 잃지 않는 그를 미소청년, 희망전도사라고 합니다.
중화상과 장애를 딛고 일어선 두 사람의 공통점은, 힐링캠프에 출연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고 배후에 믿음이 좋은 부모가 있었다는 거예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나은 점이 없다 핀잔 받고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닥쳤을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또 달라야 합니다. 내게 닥친 불행을 해석하는 예수님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불행한 상황에서 어떤 관점,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합니까?
1. 제자들의 관점
1절, 시각장애인-맹인이 등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편이라면 부모 얼굴, 내 얼굴, 결혼해서 아내-남편 얼굴, 아이들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보지 못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런 불행으로 자라서 청년이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2절,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잘못된 시각으로 출발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불편한 일인데 그들은 죄로 본 것입니다. 죄로 보니까, 그러면 누구의 죄냐? 로 나옵니다.
본인의 죄인가? 이것은 전생(前生)을 전제로 합니다. 전생에 그가 하도 못되어, 눈으로 지은 죄가 하도 많아서… 전생에 얼마나 못된 짓을 했기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못된 짓 많이 하고 눈 흘기고 눈으로 남을 홀리는 사람은 지옥 가서 두 눈이 뽑힌다고 엄포를 주었고 우리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런 엄포교육이 조금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눈을 덜 흘릴거잖아요!
제자들도 이런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맹인으로 난 것이 전생의 죄냐? 물은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는 질문이지요! 시각장애인이 들었으면 두 번 죽이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의 불행의 원인, 부모니까? 부모의 죄를 들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아들을 보면서 가장 가슴 아프고 미안한 사람은 부모입니다. 당시나 지금에나 자식에게 불행이 닥치면 부모 탓, 내 탓이다! 이런 의식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죄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인류사로 보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는, 성병이 유행. 산모가 성병에 걸리면 시각장애자로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에이즈 환자도 부모의 죄 탓이 될 수 있습니다! 임신 중에 약을 했거나 원치 않는 아기를 가져서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다가 살아났는데 그게 태중에 있는 아이의 두 눈을 장애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몸가짐을 잘못해서 내 아이가 벌을 받나보다… 이런 괴로움을 겪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눈먼 자식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겠어요?
하지만 본문은 그런 정황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태어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부모 탓을 거론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가르침 받았지만, 일반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반수준은, “불행은 곧 죄다! 그것이 가난이든, 질병이든 불행은 모두 죄다!”라고 봅니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죄부터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병이 들거나 실패하면 병과 실패도 힘들지만 그에 못지않게 죄로 보는 시각들 때문에 더 힘들게 됩니다!
물론 벌과 사망은 죄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론적인 죄의 원인이 될 뿐이지 개인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상당히 위험하고 율법적인 해석이 나옵니다. 제자들 역시 죄 때문이라는 원인을 전제로, 누구의 죄 때문인가? 를 묻습니다. 그러면 불행해 줍니다. 장애자식 때문에 부부지간에 파경이 오고 사돈지간에 원수가 됩니다.
제자들의 또 다른 관점은 불행의 이유를 미래에 두지 않고 과거에 둡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불행은 죄다! 라는 제자들 시각이 바로 과거에 연연하면서 병의 문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 이건 과거입니다.
사람이 어떤 불행을 당했을 때 과거에 집착하면 점점 더 불행해 집니다. 누구 때문에… 누구 탓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아니면 그때 내가 잘못했다… 그때는 과거입니다. 과거는 이미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좋은 추억의 과거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나쁜 추억의 과거는 불행하게 만듭니다. 억울한 과거의 추억은 지금의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슬픈 과거의 추억은 슬프게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이런 과거는 연연해야 합니까, 떨쳐버려야 합니까?
지금 제자들은 미래를 말하지 못합니다. 청년의 미래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고 간섭하실까? 그래서 청년이 어떤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 미래를 묻지 않았습니다. 청년에게 다가서서 “네가 지금은 시각장애인이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님이 계신다… 과거에 집착해서 누구 탓이냐 부모 탓이라 생각하며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네 탓이라 생각하고 네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해주시고 사용하실까? 예수님에게 미래를 묻고 미래를 맡겨라!” 그렇게 말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과거의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의 관점을 가지니 자신에 대한 절망, 부모에 대한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과거지향적 관점과 과거지향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믿는 우리들 중에도 있습니다. ‘늘빛맨’이라면 이걸 버려야 합니다.
과거지향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성공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과거는 관계를 악화시키고 인생을 퇴행시킵니다. 믿음도 과거지향으로 나가면 왕년에… 이런 말로 지금의 ‘열정 없음’을 위장하고 맙니다. 과거가 그를 망치고 믿음 성장의 발목을 잡습니다. 부부싸움도 대체적으로 과거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다가 미래를 포기하고 맙니다.
질문은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해답을 갖고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각장애를 죄로 보았고 부모나 자신 중의 누구 하나의 죄로 본 것입니다. 과거지향적 질문을 한 셈입니다. 과거에 무슨 희망이 나오겠습니까? 질문 하는 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답이 나옵니다, 바른 질문을 해야 바른 대답을 얻습니다. 미래지향적 질문을 해야 미래지향적인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관점
병의 원인을 과거로 해석하면 부모는 원망의 대상입니다. 살인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병의 원인을 자신에게 두면 자학(自虐)입니다. 자살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행을 과거적이 아닌,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정말 멋진 해석입니다.
제자들의 과거적 해석-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러니 죄가 나오고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죄스러움과 원망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미래적 해석-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해석을 참 잘 하시는 분입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 두지 않고 미래에 두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장애, 기형아… 원죄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이 사람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걸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할 죄라거나 부모가 책임져야 할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건 우리가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장애인을 보호해 주고 사랑해주고 잠재적 능력을 계발해주고 힘이 되어주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 청년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실재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증인이 되는 전도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과거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만 있었으면 누구 탓이냐, 아니면 참 안 됐다… 동정하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적 관점을 가지신 예수님에게는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 탓이냐… 탓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낼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습니다. 이게 바로 질문의 차이고 관점의 차이입니다.
누가 중병에 걸렸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다면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가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투병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됩니다.
-교회가 기도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교인들의 사랑이 불붙습니다.
-위로자격증을 얻습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 남들이 당하는 고통을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이것을 알면, 고통의 상실은 주님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변합니다. “빼앗겼다!”가 아니라 “드렸다!” 가 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미래에 두는 사람만이 이런 신앙적인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관점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병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나 의학적 차원에서만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은 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는 환자들을 낙심시키고 병을 더 중하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상담과 코칭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상담이 과거로부터 받은 고통스런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치료라면, 코칭은 사람들이 비전을 세워서 미래를 향해 나가도록 돕습니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성장시키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상담이 역행적으로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코칭은 주도적으로 앞을 바라보게 합니다. 코칭은 치유가 아니라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상담이 약점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코칭은 기술과 힘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기에 상담이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코칭은 대등한 동반자, 동역자 관계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각을 눈먼 청년에게 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상담이 아니라 코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지선씨는 사고 당시 상황과 극단적인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연까지 솔직하게 털어놔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는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닌 사고를 만난 것"이라며 가해자를 탓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얼굴이 익어버리고 몸이 녹아버리는 3도 화상으로 얼굴은 흉칙했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알게 되었고 가꾸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날 이지선으로 돌아가라면 당연히 가겠지만 지금의 삶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는 예수님의 관점이 새 눈을 열었던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가 태중에 있을 때 부모는 알았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출산할 거냐? 태어났을 때도 물었습니다. 키울 거냐? 장애인시설에 위탁할거냐? 닉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제자들 관점으로 본다면 원망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아내 탓을 했을 거예요. 임산부는 남편 탓을 했겠지요.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이 아들을 우리가정에 주셨다! 이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미래적 관점으로 상황을 보는 사람들의 위대한 생각이며 행동입니다.
그 아들이 지금 얼마나 세계적 인물이 되었습니까? 8세에 자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았고 엄마에게 죽고 싶다고 말해 엄마를 울렸던 이 소년이 하나님의 힘으로 일어나 일반대학에서 회계와 재무학을 복수 전공합니다. 17세에 비영리단체‘사지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을 조직했고, 대학을 졸업한 21세 때부터 지금까지 30개국 수백 만 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다닙니다. 결혼도 해서 아이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책 한 권을 펴냅니다. 제목은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걱정도 없다(No Arms, No Legs, No Worries)>. 그는 정말 걱정도 없을까요? 좌절이 없을까요? 있겠지요! 그때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서 희망을 만들어 내고 미소를 잃지 않고 사는 그 사람을 우리는 웃음전도사, 희망전도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론
요셉의 위대함은 총리가 아닙니다. 그의 위대함은 용서에 있습니다. 그가 만약 과거지향적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객지생활을 하게 된 것에 대해 형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성추행범으로 몰았던 보디발의 아내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던 술관원도 차별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모두를 용서했습니다. 그는 과거지향적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 잊어버렸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차남 이름을 에브라임… 창성함…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었던 형제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은 미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과거를 보며 과거로 퇴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불행에서 하나님께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불행한 상황에서는 왜? 라고 묻지 말고 무엇을? 무엇을 주시려고… 그렇게 물어야합니다. 질문이 좋아야 좋은 대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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