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3:12~1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7.
반응형

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서. 참고삼아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3장 12~15절

서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교육을 테마로 한 연설에서는 어김없이 한국을 단골 모범사례로 언급합니다. 오바바는 국정연설에서 중학교를 방문해 교사들 앞에서 ““부모 다음으로 아이들의 성공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교사이다. 한국에서는 교사가 국가 건설자(nation builder)라고 불린다”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미국도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교사를 존경하면서 대우해야 교육이 향상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은 50년 만에 전쟁 폐허에서 선진국 대열로 들어선,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민족입니다. 한국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교육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교육을 통해 일어선 국가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교육이 아니라 교육열입니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가 알아줍니다. 그 덕에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반기문 유엔총장이나 김용 세계은행 총재 같은 인물들…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은‘교육’으로 일어나고 과다한‘교육열’때문에 국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 교육이념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공과 출세를 위한 과다한 교육열이 대한민국을 위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대통령이 찬사를 보내며 부러워한 것은 한국의 교육제도나 교육방향, 교육성과가 아니라 교육열입니다. 자녀들의 성공위주의 교육열이라면 기러기아빠도 감수하는 그 대단한 교육열, 오마바는 바로 그것으로 미국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자극시켜 교육 열기를 지펴내고 교육개혁을 시도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엄마의 교육열을 본받으라는 오바마의 찬사 이면에는 미국 흑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흑인들은 아직도 백인들에 비해 지적열등감이나 피부로부터 오는 피해의식-패배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흑인은 대통령도 배출했습니다. 그러니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적대감을 버리고 교육을 통해 실력을 쌓고 백인들과 대등하게 실력으로 경쟁하라는 것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개천에서 용을 나게 하는’ 대한민국 엄마들의 교육열입니다.

 

오바마가 한국학생들이 온 종일 학교-학원-과외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 청소년 자살까지 초래하는 문제점을 알았다면 과연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본받으라고 추천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오바마의 말에 정작 한국인들은 찜찜한 거예요!

 

 차라리 오바마가 유대인교육, 그중에서도 유대인 부모교육을 본받으라고 했다면 세계가 더 수긍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2천년을 세계를 유랑하면서도 유대정신을 지켜냈습니다. 그 근본이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이 히브리인의 정신을 지켜냈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기에 미국 대통령이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인들의 교육내용은 본받지 말고 교육열은 본받으라는 숨은 행간을 알고 있기에 우리가 내어놓고 박수를 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가 교육종교라면 유대교와 뿌리를 같이 하는 기독교 역시도 교육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로부터 교육을 강조해 왔습니다. 본문 13절,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하나… 맞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쳤던 선생님입니까?

 

한국교육의 내용의 기본 취지는 아주 좋습니다. 홍익인간. 남을 이롭게 하는 교육입니다. 우리가 흔히 열심히 공부하라고 할 때 잘 배워서 남주냐? 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라,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 배워서 남주냐? 다 네 것이 되니까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잘못된 것입니다. 배워서 남주냐? 따라합시다!, 배워서 남 준다! 그래요, 배움은 남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교육은 남을 준다는 기본에서 출발할 이것이 진정한 교육입니다.

14절, 내가 선생이 되고 너의 발을 씻었다… 유대인들은 정결을 중시하기에 식사 때 필히 손을 씻습니다. 이건 종이 해주거나 주인의 몫입니다. 방문자에 대한 최고의 존경입니다.

 

본문은 상황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마지막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주인이 경황이 없어 손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얼른 일어나 선생님 손을 씻어드려야 만찬이 시작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시기가 예민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일모레 정도 왕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한자리씩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스스로 낮아져 손과 발을 씻어주는 일을 하면 권력서열에서 하락합니다. 그러니 눈치 보느라 발을 씻어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자리를 내줄 수 없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권력을 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밥값을 낼까? 눈치를 보던 우리의 심정처럼 저들도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내가 선생이라고? 그래, 내가 선생이다! 나의 교육은 홍익의 가르침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3년 동안 배워 남주는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을 씻겨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습니다.

옳으니라! 교육의 근본이요 인간의 도리(道理)라는 것입니다. 교육은 사람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됨은 남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러기에 교육은 배워서 남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입니다. 그중에서도 7장 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가르침을‘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율법의 중심이요 선지자들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의 기본정신이 무엇입니까? 남에 대한 대접! 남에 대한 배려! 남을 많이 생각하고 나는 덜 생각하는 것! 남의 아이들에게는 많이 생각하고 내 아이들은 덜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인간됨이요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기본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홍익정신! 이걸 놓친 거예요. 그래서 배워서 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주지 않고 내 성공과 출세, 내 자식의 성공과 이를 통한 부모의 성공만을 바랐기에 대한민국 교육은 이기적인 인간을 양산했고 배운 사람들로 오히려 대한민국은 더 부패했고 아이들을 내 ‘이데올르기’ 쟁취의 수단으로 생각했기에 이런 교육을 받을수록 아이들은 더 공격적이고 적대적이고 편을 가르고 우리 사회의 통합을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교육, 성경교육은 어때요? 지식교육, 암기교육입니다. 성경내용을 가르치고 잘 이해하면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잘 믿어 남주고 잘 알아 남주고 많이 기도해서 남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나… 이기적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들, 이웃에 대한 배려들이 삶에서 생활에서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언어생활에서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선생이고 스승입니까? 남을 섬기는 사람들,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 남의 입장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직함으로는 선생이 아니고 교회 직분이 아니지만 제대로 우리에게 삶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진정한 스승이고 교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교육은 뭐냐? 이해의 공간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이해는 수용성이고 포용성입니다. 언젠가 이화여대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배우자상(像)은 어떤 사람이냐? 1위가 수용성이 많은 사람… 바로 이걸 위해 교육이 있습니다. 남을 대접하고 남을 섬기는 일은 수용성 이해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생각합니다. 애들은 나보다 나이가 어려… 잘 난 야고보가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무슨 1등 제자냐, 실력도 없는데… 요한이 생각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내게 높은 자리 주시겠지… 안드레도 생각합니다. 지들이 전도도 한 명 못 해 왔으면서 무슨 지도자들이래… 빌립이 생각합니다. 아이고, 이 무식한 것들, 뭘 알아야지… 그러면 제자공동체가 어떻게 되겠으며 앞으로 세워질 교회공동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걸 아신 것입니다. 서로 섬기라! 서로 섬김은 이해력에서 나옵니다. 이해지수! 이것이 높으면 훌륭한 인간이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남을 이해해야 서로를 위할 수 있고 스스로 낮은 자의 자리에서 발을 씻어줄 수 있습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서서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위대함입니다. 나는 메시아의 신발끈을 메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자세의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교회교육이요 교회에 이런 스승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다녀오는데 24명 중 내 가방만 인천공항에 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공항 직원들이 실수를 한 거예요! 이해지수가 낮으면 어때요? 하필이면 왜 내가… 일을 왜 그 따위로 하는거야…. 그렇게 짜증을 부리면 성지순례가 아니라 악지순례를 하고 온 것이지요.

 

이해지수가 높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순간적으로 화도 나지요! 그러나 곧 마음을 추스릅니다. 다른 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걸렸으면 여행 뒤끝이 좋지 않는데 내 가방을 놓쳐서 다행이다, 그러면 이것도 추억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도 내가 그렇게 말해야지 목사님 가방이 그래서 낫네요, 이러면 열통이 터집니다. 제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에요!^^ 

 

어떻든 이런 예화를 들면서 강조하려는 것은 오래 믿을수록! 성경을 많이 알수록! 기도를 잘 하고 많이 할수록 이해지수가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서 남주는 것입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월례회 하다보면,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하다보면 나오잖아요, 이해지수가 낮은 모습들이…. 결국 믿음생활 교회생활은 이해지수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앎은 있는데 실행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경배대상입니다. 시장에서 부모와 스승이 걸어오면 스승에게 먼저 달려가 인사합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에 키파(Kippa)라는 모자를 쓰는데 스승이 오면 이걸 벗어 존경의 표시를 합니다. 아버지와 스승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스승을 먼저 구해내라고 가르칩니다. 부모는 육체를 낳아준 부모요 스승은 정신을 낳아주고 인도하는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누가 가르치느냐? 스승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있나요? 그러면 말빨이 서지 않습니다. 스승이 학생들에게 아버지와 내가 빠지거든 나를 먼저 구하라! 이건 진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걸 부모가 가르칩니다. 배워서 남주는 교육! 그래서 유대교육이 세계에서 최고의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본(本)-본보기, 모델입니다. 말로 설명이 부족하니 어떤 모양을 만들어 보이거나 어떤 사람을 내세워 저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이 본을 보이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 생기거든 이렇게 착용하시고 이렇게 행동하시오…. 이게 본입니다.

 

본(本)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가르침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위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위선자는 입과 행동이 다른 상태입니다. 머리와 행동이 같으면 어린아이, 머리와 행동이 다르면 아이 같은 어른, 머리와 입과 행동이 달리 놀면 위선입니다. 위선(僞善)은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것입니다. 대표적 인물이 바리새인이고 한국으로 건너오면 일부 양반들입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들에게 체면문화, 허위문화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위선을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가르침은 듣되 행동은 본받지 말라!”

 

주님께서도 남을 좋게 말씀하지 못하심에 마음이 불편하셨겠지요? 그래도 제자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반면(反面)교사,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상이 가르침을 전문으로 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체면문화 허위문화를 베끼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가르침과 행동을 함께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 가르침대로 1절,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용서하라! 가르치신 것처럼 십자가에서는 모두를 용서하셨습니다. 가르침대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참 모델이 되십니다.

 

다윗의 생애에 두 사씨남정기(?)가 있습니다. 사무엘과 사울입니다. 사무엘은 그냥 본받을 스승입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 그래서 다윗은 끝까지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평안할 때도 기도했고 다급할 때는 더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분노와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 자체를 죄로 여겼던 사무엘의 가르침을 그대로 본받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울은 반면교사(反面敎師)입니다. 반면교사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 뜻입니다. 다윗은 성령을 떠난 사울에게서 인간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 것을 알고 이를 긍정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도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한 때는 세계 최고의 기독교국가요 선교국가였던 영국, 지금은 진화론과 무신론의 선봉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영국교회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영국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워하며 하나님 앞에 죄스러워합니까? 50년 후 동남아 어느 나라가 한국교회를 반면교사로 삼을지 모릅니다. 나아가서 누가 나의 언어와 행동을 보면서 사무엘처럼 본받아야 할 멘토가 아니라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면 교사는 교사로되 부끄러운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다 우리가 반면교사가 되는 불명예를 얻게 되는 것일까요. 

결론

오늘 교사주일이자 교육주일입니다. 교사주일이라 하지 않고 교육주일이라고 범위를 넓힌 것은 우리 모두가 평생을 배우는 학생이요 누군가에는 스승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다 배웠다!~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군가에, 저러면 안 되지… 저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돼, 반면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배워서 남준다! 이런 마인드를 갖는다면 많이 배워서 많이 주고 더 배워 더 주고… 계속 배워 계속 주고…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롭게 홍익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서독 수상을 지냈던 빌리 브란트는 19세기는 군사력이, 20세기는 경제력이, 21세기는 교육, 그 중에서 자녀교육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2천5백 년 전에 벌써 교육의 중요성,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위대한 국민들입니다.

빌리 브란트의 말을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한 때는 교인수로, 예배당 크기로, 헌금의 액수로 교회를 평가하지만 이제는 잘 배운 교인들, 배워서 남주려는 교인들! 믿어서 남주려는 교회들… 이런 교회들이 살아남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배워서 남주고 믿어서 남주고 헌금해서 남주는 그런 교회 중의 하나가 되는 목표에서 이탈하지 말고 더 많이 나아가도록 합시다!

교육주일에 교육위원장 송장로님을 비롯한 교사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