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이 됩시다!
요한복음 1장 19~28절
서론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네스북에 의하면,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살았던 로버트 퍼싱 와들로우(1918~1940)입니다. 키가 272cm. 로버트 키는 유전이 아니랍니다. 가족들은 평범한 키였고 어머니는 오히려 평균 이하였답니다. 출생 때는 정상인데 수술 받은 후 뇌에 성장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되어 거인이 되었답니다. 8살 때 182cm였으니 얼마나 일찍 큰 사람입니까? 22세에 발목 염증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3m는 되었을 거예요!
한국에서 가장 키 큰 사람은 대구 달성공원 수문장 유기성(柳基成)씨로 225㎝, 택시는 아예 타지 못하고 불고기는 30명분 먹어야 배부르다는 소리를 했답니다. 우리 키 만족합시다!
기록상 가장 큰 사람은 다윗과 싸웠던 (기원전 1060년의) 골리앗 장수입니다. 키 290㎝, 몸무게 538㎏. 엄청난 사람입니다. 너무 커서 불행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성경에 골리앗보다 더 큰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주님께서 세례요한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말씀하셨는데 왜 못 믿는 표정들입니까?
세례요한이 가장 큰 사람이다! 당연히 체형이 아니라 사람이 큰 사람이고 사명이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키는 잘 모르겠지만 삶은 짧았습니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살다간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이 크고, 인격이 크고, 믿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명이 크고, 인격이 크고, 믿음이 커야합니다. 이걸 모르면 키가 작으면 다른 걸로 자꾸 자신을 포장합니다. 삭개오처럼! 그러면 키도 작고 인품도 작고 사명도 작은 왜소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교우들은 모두 큰 사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명이 큰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인품이 큰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그릇이 큰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요한은 어떻게 해서 주님의 눈에 가장 큰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주님은 세례요한에게서 무엇을 보셨을까요? 그걸 알아야 예수님에게 큰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세례요한은 작은 자가 되어 큰 사람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19절, 넌 누구냐? 그리스도냐? 아니오! 21절, 선지자냐? 아니다! 세 번째, 그 선지자냐? 묻고 싶지 않는 질문으로 네가 메시아냐? 그 뜻입니다. 요한이 그렇다! 하면 딜레마에 빠집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아들로 태어났지만 제사장직분을 거절하고 예언자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지도자들, 로마제국 관리를 엄청 비난했습니다. 백성들은 속이 후련했지만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런 자가 내가 메시아다! 하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행히도 요한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은 그냥 부정도 아니고 공연한 겸손도 아닙니다. 요한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습니다. 왜 여기에 있는가 알았습니다. 자신의 사명 알았습니다. 내 사명 아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압니다.
그럼 넌 누구냐? 27절, 메시아는 내 뒤에 오시고 나는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자다!
요한의 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분으로, 나는 운동화 끈을 매주는 하인이다! 다른 하나는 역할입니다. 나는 끈을 매주는 일을 한다! 끈을 매주려면 엎드려야 합니다. 엎드리면 누구만 보이는가? 신을 신은 주인만 보입니다. 요한은 이처럼 자신을 부정합니다.
요한은 23절,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합니다. 이사야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선구자적 역할을 말하고 광야로 자처합니다. 광야는 빈들이요 빈들은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곳입니다. 쌀 한 톨 만들어 낼 수 없는 장소입니다.
요한은 빈들로 자처합니다. 내게는 영생의 쌀 한 톨 없다! 실체가 없이 바람에 불과하다! 그러니 내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것은 바람을 잡는 헛된 일이다! 나를 바라보지 마라!
자기 부정(否定)이 없으면 자기를 그렇게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기부정, 내려놓음을 위해 30년을 광야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부정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기 부정을 하려면 내가 주인이라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나는 그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내려놓고 남의 신발끈을 메주는 종의 의식, 우리는 빈들이라는, 빈들의식을 평생 안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니다!”는 자기 부정의 고백이 나오고 그렇게 살면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큰 자가 됩니다. 자기를 작은 자라며 자기를 작은 자로 내려놓아 오히려 큰 사람이 된 사람! 이것이 요한입니다.
2. 세례요한은 큰 사람 예수님을 가리켜 큰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자기부정(否定)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부정(否定)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저 사람 별로에요! 저 사람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내게 맡겨주는 일에 작다고 부정합니다. 그 일은 싫어요! 그 일은 못해요! 나는 부족해요!
그건 누구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자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큰 사람이다, 나는 주도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감히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누구를 보이고 있습니까? 나를 보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우리 주님은 보이지 않아요!
한국교회. 대단해요! 엄청난 예배당 보세요! 한 사람 목회자 역량으로 만명 2만명, 십만명, 심지어는 70만명… 그러면 예수님이 더 크게 보여야지요!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면 예수님이 더 크게 보여야 하고 더 큰 사람들! 더 큰 교회! 더 큰 예배당이 되어야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니, 예수님 교회가 보이지 않으니 주님 눈에는 작은 교회지요!
세례요한이 짧게 살다갔는데 왜 큰 사람이지요? 큰 사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집이 어디지요? 청와대입니다! 청와대보다 큰 공장, 사무실. 심지어는 도청 구청청사도 많아요! 그런데 청와대가 왜 가장 큰 집이지요? 가장 큰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큰 사람입니다!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하는 일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훌륭한 장관이요 공무원입니까? 대통령 하는 일 잘 보이도록 이게 대통령 역점사항이다, 대통령은 이런 마인드 갖고 있다고… 잘 가리키는 사람이 큰 장관입니다.
요한의 자기 부정이 왜 큰 사람이 됩니까? 사실 요한은 부정적 인물입니다! 상당히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습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입니다. 우리가 부정적 마인드를 갖지 말라고 항상 말하잖습니까? 부정적인 사고는 큰 사람이 못됩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부정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긍정적이고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은 자기를 부정했고 자기를 부정한 까닭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는 고개를 숙이면서, 그는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침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 드리려 짐승 끌고 올라가는 무리들이 있었겠지요. 요한은 양(羊)과 예수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그때 성령께서 그의 눈을 여셨습니다. 친척동생 예수가 속죄사역을 위해 세상에 오신 어린양 구세주였던 거예요. 30년 친척으로 알고 지냈지만 육신으로만 알았지 영의 눈이 감겨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보라! 감탄사입니다. 우리말로, 우와! 아! 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위해 성전 제단에서 죽으시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양이 바로 예수동생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 삼아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칼을 멈추도록 하시고 수풀 속에 갇혀있는 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아! 라는 감탄사를 내질렀을 것입니다. 그 탄성은, 감사, 감격, 놀람, 경이, 안도… 등이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 구세주를 발견했을 때 요한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30년을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율법적 생활로 대리석처럼 차가웠던 심장에서는 심판의 경고가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개와 심판을 외치는 마음이 기쁠 수가 없습니다. 경직되게 살았어요!
이제 예수를 봅니다. 복음을 발견한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시려 오셨다는 것, 구원은 자기희생으로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30년을 광야에서 도(道)를 닦아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동생을 두 눈으로 보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눈은 예수를 제대로 보는 복된 눈이 됩니다. 더 이상 심판을 보지 않습니다. 심판을 외치는 입술이 아닙니다. 죄를 보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심판과 비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 눈에 거듭남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거듭나면 마음은 저절로 변화됩니다. 부드럽게 됩니다. 눈이 거듭나면 입술도 거듭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보여주게 됩니다! 은혜로운 입술로 변화된 나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자기는 부정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모습은 바로 내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 이웃에게 주님을 가리키고 보여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큰 자가 된 것입니다.
3. 세례요한은 큰 사람 위해 비켜서서 큰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예수님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사명도 제대로 알았습니다. 전에도 선구자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제대로 알았을 때 제대로 된 선구자 사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조지 굳멘은 선구자의 책임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길을 깨끗케 하는 책임
-길을 예비하는 책임
-길에서 비켜서는 책임
세례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전령(傳令)역할을 잘 수행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 사역을 위해 길을 깨끗케 하는 일을 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칠고 더러운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아니고야 마음이 어떻게 깨끗해 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마음을 정돈하고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선구자는 길을 비켜서야 합니다. 선구자의 가장 어려운 사역이 비켜섬입니다! 누구나 비켜서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장기집권이 나오고 절대 권력이 나오고, 썩고 부패합니다. 한 자리를 차지해 영원히 군림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민주투사 때문에 민주주의가 막히고, 지도자 때문에 국가번영이 막힙니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입니까?
요한은 자기의 신분, 자기의 위치를 잘 알았습니다. 자기는 등불이라는 것, 등불은 참 빛이 왔을 때에 자리를 비켜서야 하고, 자리를 빛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등불에 불과한 자들이 참 빛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 추태를 사울 왕에게서 봅니다. 한국교회에서 봅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요한은 모범생입니다. 요한이 선지 사역을 제대로 담당한 것은 고작 1년 미만입니다. 30년 준비하여 1년 일하다 가는 것은 억울합니다. 어린시절 광야로 나와 가정의 따뜻함을 느껴보기나 했던가요, 따뜻한 침대에서 두 다리 뻗고 잠이나 편하게 자 보았나요, 마음 드는 여인의 손 한번 잡아 본 적이 있던가요, 기적이라도 한번 보란 듯이 사용해 본적이 있던가요, 베드로까지 행했던 이적을 위대한 선지자 요한에게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놓고 지금은 비켜서라니…, 참 빛이 왔으니 비켜서라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게 토사구팽 아닙니까? 사냥감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 사냥할 일이 없으면 죽을 둥 살 둥 애쓴 사냥개를 팽개쳐 버리는 일, 요한에게는 지금의 비켜섬이 토사구팽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순순히 물러섭니다. 억지로 밀려난 게 아닙니다. 기쁘게 그 길을 비켜섰습니다. 자기 제자 그룹을 해체시키고 모든 사람들 시선을 오직 예수님에게 모이게 합니다.
35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절,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어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추종자들을 조건 없이 권리금도 없이, 저 분 따르라고 보낼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 가족이 있습니까? 형제가 있습니까? 너무 외로울 텐데… 너무 허망할 텐데… 그래도 비켜섭니다. 제자들이 더 이상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게 비켜섭니다. 자기를 따르지 못하게 비켜섭니다. 자신은 등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옥에서의 죽음도 예수님을 쫓는 길에 자기가 혹시라도 걸림돌이 될까, 시선이 분산될까 사라졌을 것입니다.
세례요한 시대의 등불은 보잘 것 없는 물건입니다. 흙으로 만든 기름병과 심지, 불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 자신은 기름도 불꽃도 아닙니다. 오직 심지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심지는 본질적으로 숨겨지는 일입니다. 눈에 뛰는 것은 빛뿐입니다.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이제 물러서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물러설 때에 물러설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물러섬으로 위대해지고 비켜섬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큰 사람입니다.
결론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으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생깁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준 것입니다. 그런 희생적 모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사도요한은 시각까지 똑똑히 기억합니다. 4시입니다!
39절,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안드레 역시 형을 위해 비켜섬을 통해 큰 사람 베드로를 얻습니다. 한 사람의 겸손과 희생이, 세례요한과 안드레의 사명이 또 다른 열매들을 맺게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의 밀알이 희생하고 양보하고 죽으니까 많은 제자열매들을 맺게 된 것입니다.
다시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큰 사람 예수님 아래에서 작은 사람으로 낮아지면 큰 사람 됩니다.
큰 사람 예수님을 가리키면 큰 사람 됩니다.
큰 사람 예수님을 위해 비켜서면 큰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큰 사람 세례요한을 벤치마킹해서 큰 사람 되기를 기원합니다! 작지만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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